세조의 계유정난 칼날을 피해 간 진천 남지 묘소 및 신도비
문종은 자신의 병환이 심상치 않음을 느끼고 있었다. 그에게 남겨진 자식이며 세자인 이홍 위였다. 조선왕실에서 역사상 모두 외자였으나 단종과 태종 둘만 이름이 두 글자다. 고려말에 태어난 이성계나 이방원 등은 왕이 될 것이 아니었기에 이름이 두자였지만 고려 때부터 피휘때문에 왕실에서 태어나면 이름은 대대로 외자였다. 아들이 걱정된 문종은 황보인(皇甫仁), 김종서(金宗瑞)와 좌의정으로 있었던 남지(南智)에게도 특별히 아들을 부탁을 했다. 이들 세명은 단종(端宗)의 안위를 부탁받은 고명대신(顧命大臣)의 한 사람이다.
진천의 농다리가 자리한 곳에서 멀지 않은 곳에 작은 마을이 있다. 이 마을에는 묘와 신도비가 있는데 충청북도 시도기념물 제80호로 지정된 진천 충간공 남지 묘소 및 신도비다. 조선 개국공신이었던 남재의 손자이기도 하다. 김종서보다 더 빠르게 정승의 반열에 올랐던 사람이다.
남지라는 사람은 시사와 역사에 능통했던 사람이라고 한다. 의령남씨인 남지는 수없이 세종, 문종과 단종에게 관직에서 물려날 것을 요청했다. 그는 정말 관직이 하기 싫었는지 그의 상소문의 일부를 살펴보자.
"신은 바탕이 본디 용렬하고 어리석으며, 더욱이 배우지 못하여, 자못 밝은 시대에 쓰일 바가 아니옵니다."
"신(臣)의 자질이 본래 용렬하고 그 위에 배운 것이 없는데 외람되게 삼공(三公)의 자리를 차지하니..."
"신은 본시 게으르고 소루하며, 재주 또한 천박하고 쓸모가 없으니, 진실로 의정부(議政府)에 있기는 적합하지 못했습니다."
"신은 용렬하고 우매(愚昧)한데 그릇 열성(列聖)의 은우(恩遇)를 입어 도당(都堂)에 반식(伴食)하면서 하나도 건명(建明)함이 없고..."
그렇게 여러 번 상소를 올렸지만 그는 조정의 주요 요직을 겸하면서 일을 하게 된다. 그에게 왕실과 연을 맺게 되는데 세종의 아들이었던 안평대군의 아들과 딸을 혼인시킨 것이다. 묘소는 관리가 잘되어서 접근하는 길이나 주변의 시야가 확 트여 있다.
도로에서 남지의 묘소까지는 조금 걸어서 들어가야 하며 신도비까지는 아래로 내려가면 볼 수가 있다. 사람의 인생을 살펴보면 인생의 길흉화복은 변화가 많아 예측하기 어렵다는 뜻으로 이른다는 뜻의 새옹지마가 연상이 된다. 행복이나 불행이 어떻게 나올지는 알 수가 없는 것이 삶이다.
남지의 묘소는 충청북도 진천군 문백면 평산리 양천산(凉泉山)에 자리하고 있다. 장방형의 대형 분묘로 봉분 아래쪽은 높이가 낮은 호석(護石)을 둘렀으며 상석·문인석·장명등·망주석 및 묘비를 세웠는데, 이중 장명등과 망주석은 최근의 것이다.
묘비는 봉분 좌측에 있으며 1732년(영조 8)에 세웠다. 그는 죽을 운명이었을지도 모른다. 문종의 고명대신이었기에 수양대군과 한명회의 제거대상일 뿐만이 아니라 다른 제거대상인 안평대군과도 사돈 사이가 아니었던가. 그렇지만 그는 병에 걸려 쉬고 있었다. 계유정난 때 수양대군이 왕위에 오르는데 방해가 되는 김종서, 황보인 등을 모두 죽이고 안평대군과 그의 사위 안우직까지 죽음을 당했으나 그는 화를 면했다.
묘소를 돌아보고 진천 남지 신도비를 보기 위해 내려가본다. 기쁨과 슬픔의 희비(喜悲), 불행과 행복의 화복(禍福)이 양단으로 나뉘지 않고 함께 붙어서 끊임없이 순환한다. 삶의 고달픈 길에서도 일희일비(一喜一悲) 하지 말고 상황의 전개를 침착하게 지켜보는 것이 삶일까.
아래쪽으로 내려오니 남지의 신도비가 보인다. 방형 대석 위에 높이 214㎝·폭 82㎝·두께 42㎝의 비신(碑身)을 세우고 가첨석을 얹은 신도비의 비문은 8대손인 남구만(南九萬)이 지었으며, 1713년(숙종 39)에 세웠다.
신도비를 묘의 동남쪽에 세우게 된 것은, 지리가(地理家)의 말에 따르면 동남쪽을 신도라 하기 때문이다. 신도의 개념을 한 마디로 정의하기는 어렵다. 중국에도 있고 조선에도 있고 일본에도 있다. 일본에서 신도는 신사로 들어가는 입구 도라이가 연상된다. 사람에게 행복과 불행은 어떤 의미를 가지고 있을까. 과연 신으로 가는 길에는 그런 것에 대한 구분이 있나란 생각이 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