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이야기를 들어줘요
은애
죽었다면 내가 왜 여기 남아있는 거지? 드라마에서 본 것처럼 밝은 빛이 보이고 떠나야 되는 거 같은데 어디로 가야 하는지 어떻게 죽었는지 기억도 안 난다. 누구한테 물어봐야 하는 거지? 이럴 땐 저승사자 같은 것이 나와서 인도해주고 그런 거 아닌가. 죽었는데 왜 기억상실증에 걸린 것인지는 잘 모르겠다. 분명한 것은 전설의 고향이나 원한이 사무쳐서 죽은 그런 느낌이라기보다 그냥 붕떠 있는 그런 느낌이다. 자유로이 오가긴 하지만 아무런 느김이나 감각은 없는 상태..
"언니 은애언니는 아직도 연락이 안돼요?"
"응 폰이 꺼져 있다고 나오는데"
"은애 언니가 그럴 사람은 아닌데"
"맞아 경찰에 실종신고를 할 수도 없고"
"가족이 아니면 할 수 없는 거죠?"
"아마 그럴 거야."
"수희야 지희야 나 여기 있어. 안 들려?" 둘 다 무표정이다. 원래 친한 사람에게는 들린다는데 그것도 아닌 모양이다. 그럼 누구에게 말해야 하나. 내가 기억을 잃어버린 때로 돌아가려고 해도 돌아가지지가 않는다. 수경이와 헤어진 이후부터 기억이 잘 나지 않는 것 같다.
"어머 벌써 2시 30분이다."
"그러게요. 오늘은 더 이상 안 올 것 같은데요?"
"지희야 간판 불 꺼"
"예"
"난 마감할게. 그런데 은애가 없으니까 매출이 잘 안 나오는 것 같아"
"그러게요. 어제도 그렇고 오늘도 맥주손님만 있고..."
"지희야 해장국이나 먹으러 갈까?"
"마침 배고팠는데 그래요."
이 시간에도 거리에는 적지 않은 사람들이 있다. 대부분 젊은이들이지만 가끔 감당할 수 없을 정도로 취해서 길러이에서 자는 중년의 남자들도 눈에 뜨이기도 한다. 해장국집으로 가는 중간에 아가씨 한 명이 속이 다 훤히 보인채 술에 취해 보도블록에 앉아 꾸벅꾸벅 졸고 있다.
"저러다가 큰 일 날 텐데"
"적당히 좀 마시지 여자가 저러면 더 흉해 보이는데..."
"그러게요. 언니 "
매일 새벽에 보는 그런 광경인데도 낯설다. 밤일을 하는 사람에게는 해장국은 매우 친근한 음식이다. 은애와 내가 잘 가던 집은 해내 탕이 맛이 괜찮은데 진득한 국물에 소고기와 내장의 쫄깃함의 영양가가 풍부해서 자주 가곤 한다. 일본에서 한 1년쯤 산적이 있었는데 일본은 늦게 하는 집이 많지도 않았지만 한국처럼 국물음식이 많지 않았던 기억이 난다.
"언니 때문에 처음 해내 탕 먹었는데 괜찮은 것 같아요."
"소주 한잔 할래?"
"예 그래요."
"여기 소주 하나 주세요."
어떤 손님이 나에게 물어본 적이 있다. Bar에서 그렇게 술 마시고 또 술이 들어가느냐고 말이다. 내 생각에는 Bar에서 마시는 술은 알코올은 있지만 영혼이 없다고 할까? 내가 위스키를 싫어하는 것은 아니지만 편하게 마실 수 없기에 그런 것 같다. 은애가 나에게 그런 말을 한 적이 있다. 위스키의 어원은 라틴어 '아쿠아 비테(Aqua Vitae)'라고 말해준 적이 있다. 그 뜻을 물어보자 은애는 '생명의 물'이 그 뜻이란다. 물론 나도 은애도 소주도 좋아했다.
"은애가 없으니까. 썰렁하다 그치?" 소주잔을 기울인다.
"그러게요. 언니"
"애들아 나 여기 있어. 안 보여? 안 들려?"
"어디서 들었는지는 몰라도 별별 이야기를 많이 알고 있었어. 그런 우스개 소리도 있었어. Bar업계의 현자라고."
"하하하. 정말이요?"
"빈자리는 티가 난다고 그러더니 진짜인가 봐."
"언니가 나한테 말해준 것도 있는데 첨 알았거든요."
"응? 뭔데?"
"2달러짜리 지폐가 행운을 가져다준다는 소문이 어디서 나온 건지 말이에요."
"그래? 난 처음 들어보는데?"
"시나트라가 영화배우 그레이스 캘리에게 2달러짜리 지폐를 선물로 줬는데 주고 난 다음에 모나코 왕비가 되었대요. 그래서 행운의 지폐가 되었다나?"
"그레이스 켈리. 너무 예뻐. 그런 일이 있었구나. 은애 다워."
애들이 대화하는 것을 보고 있자니 내가 살아 있는 것 같다. 이상한 건 냄새가 느껴진다는 것이다. 맛을 볼 수 없는데 냄새로 모든 것이 형상화된다. 해내 탕의 냄새를 손에 담으니 손에 해내 탕이 보인다. 먹을 수는 없는데 느낄 수는 있다.
공포
여자는 눈만 껌벅이는 것 외에는 아무것도 할 수가 없었다. 지난밤에 친구들과 술 마시고 택시를 탄 것 같은데 잠이 들어버렸다. 그리고 깨어났을 때는 어두운 방에 누워있다는 것 말고는 아무것도 아는 것이 없었다. 이것이 가위눌림인가? 그건 아닌 것 같다. 눈 앞에 보이는 것이 너무 사실적이었기 때문이다. 볼을 꼬집어 보고 싶었지만 손은 전혀 움직이지 않았다. 얼핏 보니 링겔이 위에 있었고 그것이 내 팔로 들어오는 것 같다. 도와달라는 말을 하고 싶었는데 목소리가 입안에서 돌뿐 밖으로 나오지는 않았다.
"일어났나 봐"
"괜찮아 딱 하루정도 답답할 거야."
"어떤 남자도 주지 못했던 최고의 선물을 줄테니까."
거친 듯한 허스키한 남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처음 들어보는 목소리다. 누구지? 이 사람이 나에게 왜 그러는 것일까?
"사람을 기만하고 자신의 인생을 낭비한 대가를 치러야지?"
"마취는 잘되었나 볼까?" 남자가 날카로운 칼로 발 뒤꿈치의 복사뼈 밑 부분에 찔러 넣는다. 고통스럽다. 무슨 마취를 시킨 건지 몸은 전혀 움직일 수 없는데 고통은 그대로다. 조금도 움직일 수 없다.
"눈동자의 흔들림을 보니 마취가 잘되었네. 고통스럽지?"
"인생은 바르게 살아야 하는 거야. 너희 여자들은 하고 싶은 대로 하고 살잖아. 상냥한 표정으로 사람들을 속여가면서 말이야."
이 남자가 무슨 말을 하는 거지? 내가 그렇게 큰 잘못을 저지른 적이 있었나? 그냥 다른 사람 아니 여자들이 사는 것처럼 살았을 뿐이다. 적당히 놀고 명품백 좋아하고 그리고 결혼할 뻔 했지만 조건이 안 좋은 것 같아 파혼한 거 외에는 별다른 기억이 나지 않는다. 내가 그동안 만난 남자 중 하나였나? 많이 만나긴 했어도 이런 목소리를 기억 못할 리 없다. 쇠를 긁는듯한 느낌의 기분 나쁜 차가움이 담겨져 있다.
"내 엄마도 그랬어. 너 같은 여자 때문에 아빠 인생도 내 인생도 모두 망가졌지."
"난 항상 물어봐. 왜 그랬는지? 지금 너처럼 대답을 안 해줘. 왜 그런 거야."
대답을 할 수 있어야 해주지. 저 남자 엄마가 누군지 난 전혀 모른다. 그리고 왜 이곳에 왔는지도 모른다.
"반성할 시간을 딱 24시간 줄게."
"난 이제 일하러 가야 하니 그리고 배고프지는 않을 거야. 영양가 있는 링겔을 놔주었으니까."
발 뒤꿈치 쪽의 고통이 조금씩 가라앉고 있다. 그냥 예리한 아픔이 가끔씩 느껴질 뿐이다. 이 상황을 벗어날 방법이 없을까? 아마도 링겔에 마취제 성분이 있는 것 같다.
내 직업은 엑스레이나 초음파, CT, MRI 같은 것을 찍는 일을 한다. 진단하는 일을 주로 하는데 사람의 속을 보는 일이라 나에게 맞는 것 같다. 열길 물속은 알아도 한길 사람 속은 모른다고 하는데 나는 그 사람을 단숨에 알아볼 수 있다. 사람을 속이는지 속이지 않는지 말이다. 근본적으로 속이는 사람은 바뀌지 않는다.
"박기사님 이 환자 엑스레이 찍어주세요."
"예 엑스레이만 찍으면 되죠?"
"찍으신 다음에 이문진 선생님에게 보내주시면 돼요."
원래는 방사선사라고 부르는 것이 맞는 표현이지만 머 상관없다. 어떤 사람은 방사선 기사라고도 하고 X-Ray기사라고 부르는 사람도 있다. 세상 제대로 돌아가는 것이 뭐가 있나? 난 나만의 정의를 실현하고 있다. 내일쯤은 사회의 잉여인력 한 명을 이 사회에서 제거하는 날이다.
지훈
1년 전만 생각해도 난 내 운명의 짝을 만났다고 착각했다. Bar를 가본 경험이 없었던 나에게 그런 여자가 있을 것이라고는 생각도 해보지 못했었다. 결혼을 약속하고 사귀던 여자와 헤어진 후 힘들어하던 나의 마음을 그렇게 잘 알아주는 여자가 없다는 생각까지 했었다. 3개월쯤 지났을 때인가?
"지훈 씨 어떻게 해?"
"왜? 무슨 일 있어?"
"아니야. 오늘 저녁 뭐 먹을까?"
"말해봐. 뭔데 그래?"
"아니야 지훈 씨에게 부담될 것 같아."
"우선 말해봐."
"나 전 남자친구가 있었는데... 아니야."
수경이 눈에서 눈물이 흘렀다. 닭똥 같은 눈물이 수경이의 블라우스를 적시면서 흘러내렸다. 예전 여자친구가 우는 것을 본 적이 있지만 저렇게 말없이 눈물 흘리는 것은 처음 봤다. 어떻게 해야 할지 감이 오지 않았다. 그냥 어깨를 감싸주는 것외에 다른 건 할 수 없었다. 한 10여분이 지났을까? 수경이가 눈을 훔치면서 고개를 돌려 얼굴을 닦는다.
"돈문제야?"
"아니야. 그냥..."
"얼마나 되는데?"
"말하면 나 싫어할 것 같아."
"많이는 아니더라도 급한 게 있으면 말해봐."
"휴~~"
"말해보라니까."
"다른 건 괜찮은데 사채 빛 500이 좀 문제가 될 것 같아."
"흠..."
"그냥 신경 쓰지 마."
"그거 만 되면 어떻게 다른 건 해결되겠어?"
"응.. 지금 Bar도 괜찮아지고 있고."
"알았어 그럼 계좌번호 보내줘."
"정말 미안해 나중에 Bar 팔 때 권리금 받으면 다 갚을게."
"너무 부담 가지지 말고."
돈은 친한 친구라도 거래하지 말했는데 지금 이 여자를 놓치면 안될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3개월 동안 그녀를 봤을 때 정말 내가 좋아하는 말과 태도를 보여준 건 사실이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