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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는 누군가 May 23. 2024

퓨리오사: 매드맥스 사가

퓨리오사의 프리퀼,  경이로운 비주얼 속에 강력한 복수극

문명이 붕괴된 세상에서 어떤 삶을 살아야 할까. 강력한 분노는 강력한 에너지를 발산한다. 지금까지 살아보니 어디선가에서 분노의 근원이 있다면 그것은 평생을 살아갈 수 있는 원동력이 되기도 한다. 사람이 가진 감정중에 분노가 가장 강력하고 상대를 변화시킬 수 있는 힘이기도 하다. 분노는 오래전부터 발달해 온 감정이다. 자신을 보호하기 위함도 있지만 생존을 위해 만들어진 것이기도 하다. 분노라는 감정은 양날의 검이다. 날카로운 칼날은 밖으로 향해있기도 하지만 다른 날은 자신에게 향해 있기도 하다. 그걸 잘 활용한다면 무척 효율적이지만 그렇지 않으면 자신에게 상처를 입히기도 한다.  


전편에 등장했던 시타델이란 사막 도시의 지배자 임모탄의 부하로 등장했던 퓨리오사의 어린 시절에서 이야기가 시작된다. 문명이 파괴된 지 45년이 지난 후에 소수의 사람들만 모여 사는 '녹색의 땅'에서 살던 어린 소녀 퓨리오사는 어느 날 자신이 살던 숲 근처에 침입해 온 바이커 군단 무리에게 납치를 당한다. 전 세계는 모두 하나로 이어져 있기 때문에 한 곳만 풍요를 누린다는 것은 사실 쉽지가 않다. 문명 이전시대로 돌아가버렸기 때문에 역사를 아는 사람은 일부에 불과하다. 

'퓨리오사'에서는 퓨리오사의 여정에 변화를 주게 되는 시타델 근위대장 잭이 등장한다. 잭은 퓨리오사가 고향 땅인 녹색의 땅으로 가고자 하는 여정에 변수이기도 하다. 영화 속에서 눈여겨봐야 할 것은 지금의 무역과 비슷한 개념이며 멸망된 사회에서 시타델, 무기공장, 가스타운으로 구분된 세상이다. 중심이 되는 시타델은 성채를 의미한다. 가장 많은 물과 농산물을 생산할 수 있어서 생존에 핵심이 되는 곳이기도 하다. 가스타운은 인류가 움직일 수 있는 동력원을 생산하는 곳이며 무기공장은 스스로를 보호할 수 있는 무기를 생산하는 곳이다. 


이 세걔의 공간은 서로 상호보완적이지만 이들이 필요한 것을 서로 교환하지만 항상 위험이 도사린다. 그렇기 때문에 이 차량을 이동하는 데 있어서 능력 있는 사람이 필요한데 이를 주도했던 사람이 잭이며 잭과 함께하며 성장하는 사람이 퓨리오사였다. 여기서 성장한다는 의미는 생존할 수 있는 능력을 배양한다는 의미다. 퓨리오사는 오직 복수와 생존으로 살아난 캐릭터다. 시종일관 무표정한 모습으로 자신이 어떤 행동을 하는지 행동으로만 보여준다.  

자신의 지위유지 외에 아무런 관심도 없으며 대중을 지배하기 위한 폭력이 무엇인지 아는 인물 신경 거슬리게 하는 그의 대사, 행동들은 딱, 디멘투스다. 디멘투스는 바이크 군단을 이끄는 리더로 잔악한 빌런이다. 능청스러운 디멘투스의 모습에 방심했다면 어느새 몸이 모두 바이크에 매달려서 다섯 등분이 될 수가 있다. 교묘하면서도 잔악한 성격으로 퓨리오사를 사지로 몰아넣는 디멘투스다. 마블 프랜차이즈 영화에서 어벤저스 멤버인 토르를 연기했던 크리스 헴스워스가 악역을 연기해서 그런지 더욱더 색다르게 다가온다. 


한 사람이 다른 상대에게 이어진 폭력이 어떤 변화를 보여주고 있는지 이 영화는 잘 보여주고 있다. 퓨리오사라는 무표정하고 남성과 여성을 떠나 사람이 추구해야 하는 생존에 대한 모습 그리고 그런 과정 속에서 왜 그럴 수밖에 없는지 인간의 본질을 묻고 있다. 

시타델, 무기공장, 가스타운의 모든 존재들은 본질이 생존이다. 생존을 위해서라면 얼마나 잔인해질 수 있는지 인간의 품격 같은 것은 그 과정 속에서 아무런 의미가 없다. 그나마 영화 속에서 품위를 유지하고 있는 인물은 잭과 퓨리오사뿐이다. 디멘투스를 비롯하여 각자의 세상을 다스리는 인물은 적어도 자신만의 철학은 있다. 그 철학을 통해 사람들을 지배하고 필요하다면 폭력을 휘두른다. 문제는 그 사람들을 따르는 워보이 등이 맹목적이라는 사실이다. 누군가에게 맹목적인 사람이 가장 대하기가 어렵다. 그들에게는 이념이나 철학, 사람에 대한 존중등은 아무런 의미가 없다. 그냥 따르라고 하면 따를 뿐이다. 

퓨리오사라는 인물에 대해 바라보는 사람들의 시각은 다를 수 있지만 어릴 때부터 성인으로 성장하기까지의 그녀의 동력은 분노뿐이다. 그렇지만 그 과정 속에서 가장 기본적인 품위는 지키려고 한다. 사람내면에 얼마나 많은 폭력성이 존재하고 있는지를 다룬 영화가 매드맥스다. 그 폭력성을 그대로 드러내면 사회에서 어떻게 소외되는지 알고 있기에 그걸 그대로 드러내지 않을 뿐이다. 지금의 한국사회가 얼마나 분노를 노출하고 싶은지는 각종 강력사건을 보면 알 수가 있다. 제어받지 않고 자신의 마음에 들지 않고 연인이 떠나갔을 때 하고 싶은 행동들은 분명 문명사회의 모습은 아니다. 


생존을 위해 꼭 필요한 것은 분노인 것은 분명해 보이지만 분노를 통해 이룰 수 있는 것은 매드맥스송 세상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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