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제시대에 그릇을 만들고 생활용품을 만들었던 진천 삼용리, 산수리
시대를 막론하고 중요한 발견들은 항상 있어왔다. 그렇지만 시대가 단절되는 것이 아니라 이전에 겪은 경험이 축적되어 새로운 것을 만들어냈다. 지금처럼 문명생활을 할 수 있는 기반에 그릇이 있었다. 인간은 왜 무언가를 담아두려고 생각을 했었을까. 동물들은 대부분 어딘가에 모아놓고 잊어버리고 그리고 제대로 보관하지 못해 기후변화에 큰 영향을 받으면서 생존에 위협을 받게 되기도 한다.
그릇을 만들어서 생존을 하였던 삶의 흔적은 토기 가마터에서 찾아볼 수가 있다. 진천에 가면 삼용리 요지(鎭川 山水里와 三龍里 窯址)가 있다. 대한민국에서 발굴조사된 토기 가마터 중 가장 오래된 것일 뿐만 아니라 가마의 구조가 독특하고 잔존상태가 양호하여 대한민국 원삼국시대 이래 삼국시대 토기 가마 구조나 토기의 발달과정, 한중일 토기 가마 비교 연구 등에 중요한 유적이다.
무더운 여름날 오래된 흔적을 찾기 위해 안쪽 깊숙한 곳까지 들어왔다. 대로변에 있지가 않아서 접근성이 좋다고 볼 수는 없지만 이 가마터는 1987년부터 4차례에 걸쳐 발굴조사가 실시된 곳이다. 박물관 하면 실내시설을 연상하게 되는데 야외에 있는 역사적인 공간도 박물관의 한 형태이기도 하다. 박물관은 영어로 'museum'이라고 하는데 이 말의 고전적 기원은 그리스어로 'mouseion'이며, 이것은 '뮤즈 아홉 여신의 자리'라는 뜻인데 철학원 또는 사색의 장소를 의미한다.
발굴된 진천군 이월면 삼용리 일대 5곳의 유적군에는 12기의 요지들이 발굴되었는데 원삼국시대 타날문 토기 요지들이었다고 한다. 이를 통해 한국 고고학에서는 비로소 원삼국시대 타날문토기의 생산체제를 규명할 수 있는 자료들이라고 한다.
진천군 요지들의 기본구조는 대체로 같아 불을 때는 연소실과 토기가 구워지는 소성실로 구성되었으며, 원삼국시대 초기 요지는 소규모였으나 시기가 내려오면서 점차 그 규모가 확대되고 경사도가 높아졌다고 한다.
그릇을 만들어내는 토기의 형태는 크게 보아 발형 토기(鉢形土器)→옹형 토기(甕形土器)→호형토기(壺形土器)→병형 토기(甁形土器)로의 변화를 보여 왔다. 가소성(可塑性)이 있는 점토는 섭씨 500℃ 이상으로 가열하면, 점토의 수분이 이탈(화학변화)하여 흙의 성질을 잃어버리고 다른 물질로 바뀌게 되는 것이 그것이 오늘날 보는 그릇의 모습이기도 하다.
삼용리와 산수리 사이에는 조금은 독특한 마을이 있고 그곳에는 조형물과 사람들의 공덕을 기리는 비도 세워두고 있다.
토기가 만들어졌던 곳이기에 진천군의 한적한 곳이지만 이곳에도 집성촌이 있었을 것으로 생각해 볼 수가 있다. 집성촌이 있었으며 안쪽에는 누군가를 기리는 사당도 새롭게 만들어져 있었다.
암석의 풍화토가 자연적인 현상에 의해서 다른 곳으로 옮겨져 입자가 아주 고운 점토를 바탕흙으로 사용하고, 막음 장치가 있는 가마에서 굽게 되면, 표면이 회색 또는 회흑색·회청색을 띠는 토기가 만들어진다. 산수리 토기요지는 접근성이 제한이 되어 있어서 멀리서 지켜보았다. 수풀을 헤치고 들어가면 산수리까지 갈 수가 있겠지만 상당히 험난한 길이다. 우리나라 삼국시대 초기의 두드림무늬토기 성립을 확인할 수 있는 중요한 유적으로 그릇의 발견에 대해 생각해 볼 수 있는 공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