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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는 누군가 May 18. 2017

1박2일 백제

다시, 백제를 생각하다. 

백제는 어떤 국가였을까. 


신라가 통일하여 한반도에서 고려, 조선으로 이어지기 전까지 700여년 동안 한반도에서 찬란한 문화를 꽃피우고 한 때는 강국으로, 한 때는 대백제의 미래를 꿈꾸며 문화적 발전을 이루었던 국가이다. 그러나 통일신라나 고려, 조선에 비해 알려진 것이 적어서 국민들에게 연결성 있게 알려진 것이 많지 않다. 한반도에 존재하는 귀중한 역사 자산중 하나인 백제를 소흘히 하고서는 우리의 문화 유산을 온전히 보존했다고 보기는 어려울 것이다. 


그동안 지자체 차원에서 관리가 되던 백제의 유적들은 2015년 7월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등재되면서 관광자원화에 탄력을 받기 시작했다. 세계유산 백제역사 지구는 문화재청과 백제세계유산센터의 주도로 관광벨트를 만들어 '고도 세계유산 팸투어'를 운영하며 스토리와 체험, 먹거리, 접근성에 대한 근본적인 고민을 시작했다. 지난 15일과 16일 백제 문화유산이 가장 많이 남아 있으며 도읍이 있었던 공주(웅진), 부여(사비), 익산지역을 중심으로 팸투어가 진행이 되었다. 아직은 초반이라 미흡한 것이 있을 수 있지만 다시 백제를 생각하게 된 반가운 여행이었다. 

역사의 기록을 살펴보면 백제는 BC 18 ~ 660년~까지 한반도에서 존속했던 고대국가중 하나다. 한성백제 시대를 제외하고 고구려의 남하로 인해 맞이하게 된 웅진-사비 (475~660)시대가 백제역사유산의 관광벨트의 대상지이다. 후반기의 백제는 백제색이 강한 것이 특징이다. 발굴된 것이 많지 않았을 때는 백제를 알 수 있는 것은 교과서를 통해서였다. 그러나 이후 백제역사에 대한 조명이 다시 이루어지면서 찬란했던 그 문화가 다시 꽃피우기 시작했다. 

서울과 경기도를 제외하더라도 충청도와 전라도에는 적지 않은 백제의 흔적들이 남아 있지만 그 흔적이 집중적으로 분포되어 있는 곳은 당연히 수도로 사용이 되던 지역이자 공간이었을 것이다. 팸투어의 답사는 공주의 공산성을 시작으로 송산리 고분군, 차 문화 체험, 부여의 관북리 유적, 능산리 고분군, 나성, 백제문화단지, 부소산성, 익산의 미륵사지, 왕궁사지로 이어졌다. 조금은 빡빡한 일정이었지만 백제의 흔적을 확실하게 만날 수 있는 시간이었다. 

한국에서 12번째로 등재된 백제역사유적지구는 공주의 공산성과 무령왕릉이 있는 송산리 고분군, 부여의 관북리 유적, 부소산성, 능산리 고분군, 정림사지, 백제 나성이 각각 등재되었다. 나머지 두 곳은 익산의 왕궁리 유적 및 미륵사지이다. 등재된 지역을 살펴보면 충청남도를 중심으로 고대왕국 백제가 한반도 역사에서 중요한 축을 담당하고 있었다는 것을 다시 한번 확인한 셈이다.

웅진시대를 열었던 백제의 왕들은 위급했던 국가를 다시 밑바닥에서 다시 국가의 틀을 잡았다. 특히 무령왕의 경우 외부 위협에 대한 버텨내고 혼돈의 시대에 사회적 결속을 도모할 수 있는 방향을 제시한 군주였다. 과거 군주들은 성인이 아니었다. 그들의 손은 때론 피로 얼룩져 있었지만 국가를 지키고 백성들에게 메시지를 던지며 결속을 다졌다. 

공주에 위치한 공산성은 사비시대를 열기전에 웅진시대를 열었던 백제의 중심에 있었던 성이다. 백제뿐만이 아니라 통일신라, 고려, 조선시대에도 전략적 요충지를 방어하는 역할을 해왔다. 한성백제 시대에 성의 흔적은 나성정도로만 남아 있고 충청도 지역에 노성산성, 두릉윤성, 성흥산성, 부소산성도 있기는 하지만 산성의 형태를 온전히 잘 보존하고 있는 성으로는 공산성이 유일하다고 볼 수 있다.

 

사시사철 공산성은 다른 모습을 보여주는 곳이다. 봄이면 화사한 봄꽃의 향연이 즐거운 곳이고 여름이면 그 생명력의 기운이 공산성 안을 흘러다닌다. 가을에는 갖가지 색상의 단풍을 볼 수 있다. 하얗게 눈이 내린 겨울의 공산성을 본 사람이라면 설경의 아름다움이 무엇인지 다시 생각하게 될 것이다. 

백제시대 고분군의 대표적인 곳으로 현재 네곳이 남아 있다. 무령왕릉이 있는 송산리 고분군, 귀족들의 무덤인 수촌리 고분군과 백제 사비시대(538~660)의 왕릉묘역으로 현재 정비되어 있는 7기가 능산리 고분군과 귀족들의 무덤이라는 능안골 고분군이 남아 있다. 그중 왕들이 묻혀 있는 공주의 송산리 고분군과 부여의 능산리 고분군이 유네스코 세계유산에 선정되었다. 

무령왕릉이 있는 송산리 고분군에서는 적지 않은 백제의 유물이 출토되었는데 개인적으로 관심이 많이 가는 것은 최근 공주 송산리고분군 중 29호분 출토된 철제대도이다. 금선으로 새긴 금상감이 발견되면서 상감에 대한 새로운 연구를 할 수 있다는데에 그 의의가 크다. 백제의 힘을 보여주는 고대 상감은 이미 일본에서 그 진가가 입증되었다. 일본에서는 '쿠다라나이'라는 단어가 있는데 이 단어는 한국어로 번역하면 '시시하다'라는 뜻이다. 그런데 '쿠다라'라는 단어는 백제를 의미하는 것으로 '쿠다라' + '나이'는 백제물건이 아니면 시시하다는 의미이다.

무령왕릉이 있는 송산리고분군에는 7기가 정비되어 있으며 주변으로 힐링 산책길이 마련되어 있어서 뜨거운 태양만 피할 수 있다면 걷기에 너무 좋은 곳이다. 

현재 무령왕릉은 훼손등의 우려로 인해 일반인에게 공개가 되지 않고 있어서 송산리고분군내에 있는 무령왕릉 복원 공간에서 같은 체험을 해볼 수 있게 해놓았다. 당시 무령왕과 왕후가 누어 있던 공간은 백제 기술의 정수가 녹아들어가 있는 곳이었다. 특히 백제의 경우 연꽃 문양을 많이 사용하였는데 연꽃은 불교의 상징이다. 백제를 다스렸던 왕들은 백성을 자비로 대하는 것을 원칙으로 삼지 않았을까. 

공주의 마지막 여정은 전통문화체험관에서 차 체험으로 이어졌다. 백제시대에도 차를 즐겨 마셨는데 차는 마음을 평온하게 해주고 건강에도 도움이 되며 다른 사람을 이해하는 시간을 만들어 준다. 

차체험관은 공주 한옥마을 내에 있으며 체험을 하려면 문의를 하고 가면 된다. 모든 강에는 시작점이 있다. 차를 마실 때도 시작이 있고 그 과정이 있는데 그 과정의 기다림을 알면 인생의 묘미를 알 수 있다. 강의 시작점의 물은 항상 수심 한가운데 중심을 따라 흐른다고 한다. 이 물은 가장 무거운 물이어서 한 번 담기면 다른 물과 섞이지 않는다. 

시원에서 시작된 물로 차를 달여 마시면 그 맛이 얼마나 달까. 

수류화개는 '물 흐르고 꽃 피듯이'라는 뜻으로 찻물이 흐르고 그속에 꽃 피듯는 듯한 향이 코끝을 스친다. 물은 항상 흘러야 한다. 잠시 멈추어 있기도 하지만 흐르지 않으면 그 물은 물이 아니다. 

차를 한잔 마시니 시인이 되는 듯 하다. 물은 시작점이 있지만 그 순간 어디로 간다는 생각을 하지 않는다고 한다. 어떤 물은 바다로 가기도 하지만 사람이나 동물의 갈증을 해소할 수도 있고 공장이나 논에서 사용되는 용수로 활용되기도 한다. 차가 되어준 이 물 때문에 우리는 향긋한 차를 즐길 수 있었다. 

옷이 날개란 말이 괜히 있는 것은 아니다. 체험관에서는 왕이 되어볼 수도 있고 왕후가 되볼 수도 있다. 백제의 패션은 화려하면서도 단아했다. 한반도에서도 패션은 엄청나게 길면서 오랜시간을 걸어오면서 진화했다. 당시에도 수많은 아이디어가 의복에 적용이 되었다. 

부여로 가서 처음 만난 정림사지는 지금은 터만 남아 있는데 백제가 사비시대를 열기 위해 부여로 도읍을 옮긴 시기(538-660)의 중심 사찰이 있던 자리다. 지금은 건물 몇동과 정림사지 5층석탑만이 남아 있는 상태지만 백제 기술의 정수인 정림사지 5층 석탑이 있어 그것만으로 충분한 의미가 있는 곳이다.

정림사지 5층 석탑을 가만히 보고 있노라면 그 절제된 균형미와 조화, 무게중심이 상당한 수준의 기술력이 바탕이 되었다는 것을 알게 된다. 정림사지 5층 석탑이야 말로 유네스코 세계유산중에 가장 다가가고 싶으며 부담이 없는 유적이란 생각을 해본다. 유네스코 세계유산이란 세계유산협약이 규정한 탈월한 보편적 가치를 지닌 유산을 의미하는데 그중에 백제역사유적지구가 한국의 12번째 세계유산으로 등재된 것은 백제의 독특한 문화, 종교, 예술적 기교를 인정한 것이다.

본격적인 복원 작업이 이루어지지 않은 정림사지가 조금 안타깝기는 하지만 지금 이대로도 여유가 있어 좋다. 고구려, 백제, 신라가 공존했던 시기에 한반도에서 무역이 가장 활발했던 국가가 어디었을까라는 생각을 해본다. 무역의 중요성을 가장 크게 인지한 곳은 아마도 백제였을 것이다. 문화적 교류를 비롯하여 국가의 경쟁력을 높여주는 무역의 중요성을 백제는 알고 있었을 것이다. 호전적인 고구려나 계속 생존을 걱정해야 했던 신라에 비해 백제의 문화가 화려한 발전을 이룬 기반에는 무역이 있지 않았을까. 

사비시대의 정림사는 웅장하면서 소박했고 화려하면서도 단아했다. 절제할 때는 절제했었고 화려할 때는 기술을 마음껏 활용해서 과시하듯이 표현했다. 사람들과 함께하는 백제의 흔적들을 살펴보는 것은 재미있는 일이나 작업을 함께하는 느낌이다. 

능산리고분군은 백제의 중심에 자리한 지리적인 특징보다 이곳에서 발토된 금동대향로로 더 잘 알려진 곳이다. 1993년 백제 나성과 능산리 사이 절터 한쪽에서 백제의 금동 대향로가 출토되었다. 향로가 출토된 곳은 왕의 묘역이며 제사터가 있었다면 금동대향로는 신물이라고 볼 수 있다. 사비시대에 백제왕이 사용하던 귀한 물건일 가능성이 큰 금동 대향로는 자체로도 너무 아름답다. 

660년 나당 연합군에 의해 백제의 마지막 수도가 함락될때 제사 책임자가 금동 대향로를 묻으면서 후일을 기약했을지도 모른다. 663년 사비성은 완전히 불에타서 사라지고 지금은 사라져버린 왕흥사 역시 당시 소실되었으니라 추정된다. 금동 대향로의 기약한 백제의 미래는 영원히 오지 않았다. 이후 1,300년후에 발굴될때까지 영원한 어둠속에 묻어야 했다. 

백제의 나성은 안과 밖의 2중으로 구성된 성곽으로 안쪽의 작은 성과 그 바깥의 도시를 감싼 긴 성벽을 말한다. 백제 나성은 부여에서 백제문화를 다시 볼 수 있는 그런 발굴작업이 오랜기간 이루어지고 있다. 7차 발굴에서는 공주 송산리 고분군에 있는 무령왕릉에서 출토된 연화무늬 전돌이 출토되어 주목을 받고 있다. 공산성을 중심으로 웅진시대를 펼쳐나가고 있을때 사비시대를 열기 위해 나성이 이미 축조되었다는 것이 밝혀진 것이다. 

능산리 고분군에서 출토된 백제 금동대향로는 국립부여박물관에 잘 보관되고 있다. 백제 멸망기에 묻혀진 금동대향로는 기름진 평야를 기반으로 제국을 꿈꾸었던 백제의 기술이 집약된 작품이다. 왕궁이 남아 있었을 때를 상상해 본다. 

2일째 첫 일정의 대상지였던 백제문화단지는 옛 백제를 다시 복원해놓은 곳이다. 똑같이 복원한 것은 아니지만 상당부분 고증에 의해 복원이 된 곳이다. 백제문화단지는 1994년에서 2013년까지 무려 20년간에 걸쳐서 만들어진 곳으로 6,000억원이 투자되었다. 


조선시대의 정자도 이렇게 규모가 있었을까. 아마 서울 압구정의 지역명을 만들게 한 한명회의 압구정이 이정도의 크기가 되지 않을까. 시대가 지나갔다고 하나 백제 궁성의 매력을 느낄 수 있게 조성되어 있다. 

일본 교토에 가면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된 킨카쿠지가 있다. 화려한 금빛 누각이 인상적인 킨카쿠지는 교토를 상징한다. 백제문화단지에 있는 능사가 우리 역사에서 사라지지 않고 현존하였다면 킨카쿠지(금각사) 못지 않은 곳이었을 것이다. 화려한 곳에서 내려다보는 연꽃은 더 화사하게 느껴졌을 것이다. 

여름이면 그 모습을 화려하게 보여줄 연꽃이 수줍게 꽃망울을 터트리고 있다. 벚꽃은 흐드러지게 눈처럼 흩날리는 것이 매력이라면 연꽃은 고요하게 물에 떠 있는 것이 매력이다. 

전망대에 올라가서 바라보면 백제문화단지를 한눈에 조망할 수 있다. 뒤쪽에는 위례성이 있는데 강력한 고대국가로서의 모습을 갖춘 역사를 간직한 위례성은 한성백제의 중심이였다. 시조 온조왕이 도읍하고 무려 21명의 백제왕이 통치했던 위례성은 풍납토성이라고 알려져 있다. 

백제 문화단지에서 만날 수 있는 하남위례성은 고대국가의 흔적을 그대로 가지고 있었던 백제시대 역사의 한 부분이다. 그 당시 백제가 석성이 아닌 토성을 쌓은 이유는 중국의 축성술이 토성으로 쌓았기 때문이다. 중국으로부터 많은 문화를 받아들인 백제가 석성을 쌓지 않고 토성을 쌓은 것은 자연스런 현상이다. 그렇다고 해서 토성이 석성보다 견고하지 않다는 것이 아니다. 실제로 판축토성은 벽돌식 건축보다 훨씬 복잡하다고 알려져 있다. 

이곳에 거주했을 백제의 지배계급은 왕족인 부여씨였을 것이다. 그리고 주변 지역에 거주한 귀족은 8대 성씨였고 피지배계급은 마한의 토착인들로 생산에 종사하여 군사.조세.부역의 의무를 지고 있었으면 그 아래 노예가 있었다. 

백제문화단지의 중심이 되는 이곳은 천 사백년전에 백제의 왕이 있었을 것이라고 생각되는 건물이 자리하고 있다. 위용이 대단하다. 실제로 중국 역사성 '남제서'에는 매라에 대한 기록이 있는데 동성왕이 매라 지역의 왕을 임명했다는 기록이다. 백제에는 왕후제가 존재하였는데 모두 22개의 담로가 있었다고 한다. 

부여의 부소산성은 낙화암과 나루터를 중심으로 중국과 교역을 하던 중심지였다. 계획도시인 사비성을 방어하는 중요한 역할하던 전략적 요충지이다. 부소산성은 성둘레 2,495m 와 면적 746,198평방미터의 규모로 조성되었으며 테뫼식과 포곡식이 혼합된 백제의 복합식 산성이다. 남문지, 동문지가 확인되었고 남문지는 산성의 정문으로 알려져 있다. 이외에도 시대가 지남에 따라 건물지 12기가 있었다는 것이 밝혀졌다.

정문에서 조금 안쪽으로 들어오면 삼충사라는곳이 있는데 백제말기 의자왕때의 삼충신인 성충, 흥수, 계백의 영정과 위패를 모신사당이다. 일찍이 전쟁당시에는 유배되어 있다가 흥수에게 사람을 보내 의견을 물었는데 날랜 군사를 보내 당나라 군대가 백강(白江 : 伎伐浦)을 건너지 못하게 하고, 신라 군대가 탄현(炭峴 : 沈峴)을 통과하지 못하게 하는 한편, 왕은 성에 들어가 적군의 물자와 군량이 떨어지고 군사들이 지칠 때까지 기다렸다가 맹렬히 치면 이길 수 있을 것이라고 충간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부소산성은 자연의 소나무 숲과 백제의 흔적을 그대로 만나볼 수 있어서 사색하기 좋은곳이다. 현재 부소산에 위치한 부소산성은 백제시대의 유적이 많이 남아 있는 국가사적 제5호로 정해져 있다. 부소산은 소나무가 많은 산으로 알려져 있는데 백제시대 언어로 부소는 소나무라는 뜻이 있는것으로 보아 맞는듯 하다.

이곳이 그 유명한 낙화암이다. 일제시대에 역사가 왜곡되어 있던 바로 그 현장이다. 백제 사비성이 나당 연합군에 의해 파괴될 때 사비성내에 살던 궁녀와 여인들이 이곳에서 강물에 몸을 던져 자신의 생을 끊었다고 알려진 곳이다. 의자왕들의 첩들로 알려졌지만 실제는 백제 여인의 충절이 어린것이다.

백제라는 국가의 존립이 위태로워지고 그 시대사람들은 이곳에서 그 존망을 같이 하려고 했던것 같은데 암석만이 남아 허망하기도 하고 짦은 인간의 생의 흔적을 간직하고 있다. 

짦은 시간이지만 백마강을 배를 타고 둘러보는 것은 아름다운 부여의 다른 이면을 볼 수 있는 좋은 기회다. 

익산 미륵사지. 미륵불의 이름을 그대로 사용한 사찰 미륵사에는 한국석탑의 시원이라는 미륵사지 석탑이 남아 있다. 동양 최대.최고의 석탑으로 목탑에서 석탑으로 변화 과정을 보여준다. 

익산의 유적지에 있는 저수지 중에 이처럼 아름다운 곳이 있었던가. 

이곳에서 사진을 찍으면 어떤 각도에서도 사진이 잘 나온다. 7시게이 당시 국제적인 문화교류의 실상을 보여주는 미륵사지 석탑이 바로 이곳에 있다. 그리고 지금까지 전국에 수많은 사찰을 돌아다녔지만 당간지주가 두 개가 세워져 있는 곳은 이곳이 처음이었다. 

전시관에 들어오면 원래의 미륵사가 어떤 모습을 간직하고 있었을지 상상해볼 수 있다. 

미륵불이 용으로 변해 내려온다는 세상에서 가장 큰 사찰 미륵사는 백제 무왕때 창건되었다. 오래된 황량한 절터에는 규모로 보는 사람을 압도할만큼 큰 탑이 있었다. 이 탑을 두고 7층설과 9층설이 분분했다. 돌탑의 노반석이 발견되면서 탑의 규모가 밝혀졌는데 노반석을 기준으로 복원해본 결과 9층과 맞아 떨어진다. 

"제 30대 무왕의 이름은 장이다. 어머니는 서울 남쪽 못가에 집을 짓고 살다가 못의 용과 정을 통하여 장을 낳았다. 장은 마를 캐어 팔아 생업을 삼았기 때문에 어렸을 때 이름은 서동이었다." - 삼국유사


지금은 세계문화유산 중 하나로 자리매김한 이곳에 왜 미륵사를 세웠을까. 무왕 재위 당시 국정의 최대 현안은 신라를 공격하는 것이었다. 당시 격전지와 가까운 곳은 바로 이 곳 익산지역이었는데 그렇기에 국가를 지켜주는 사찰은 큰 의미를 가지고 있었다. 그래서 무왕은 백제의 국력을 결집시켜 미륵사를 창건한다. 미륵사는 사랑꾼으로 알려진 무왕의 백제 부흥 프로젝트의 중심 이었다. 

무왕이 즉위했을 때는 신라의 배신으로 인해 전성기의 영토를 잃고 입지가 상당히 좁아져 있을 때였다. 사비시대를 연 성왕이 있었지만 백제 무왕은 백제를 다시 일으켜야 했었다. 익산에 가면 왕궁리 유적이 있다. 왕궁리의 옛 이름은 지마마지인데 '관세음응험기'에는 부여에서 익산으로 천도한 연대와 지명을 적고 있다. 639년 백제 무왕 40년에 왕궁리(왕궁평)로 천도한다. 

왕궁리 5층 석탑에서는 해체복원할 때 '관세음응험기'에 기록되어 있었던 유물이 그대로 출토가 된다. 1층 탑신에서는 사리맘과 금강반야경, 채수병정등이 발견되었다. 

석재를 사각형으로 반듯하게 다듬어서 성벽을 보호하는 부석을 깔아놓은 성벽의 흔적이 남아 있는 왕궁리는 5만 평의 대지기반 위에 만들어진 계획 도시였다. 왕궁리 유적의 발굴 흔적으로 추정해 볼때 왕궁리는 백제 말기에 공사가 시작되었다. 

익산의 미륵사지 석탑은 2001년부터 해체 보수 작업에 들어가서 아직까지 현재 진행형이다. 익산에 대해 언급이 된 것은 김정호의 대동지지가 유일하다. "익산이 별도였다."라고 기록되어 있는데 별도란 왕이 별도로 거처할 수 있는 예비 수도를 의미한다. 


공주와 부여, 익산지역을 돌아다니며 백제의 오래된 유산을 만나보았다. 옛날에 비해 백제에 대해 많은 것이 밝혀졌지만 아직까지 백제의 모든 것을 알아내지 못했다. 1박 2일 동안 기자단과 함께 동행한 여행에서 지금까지 생각했던 백제를 다시 생각하게 한 즐거운 여정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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