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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의 그림을 그리며...

영원히 완성할 수 없는 인생의 추상화를 그리는 마음으로

얼마 전에 초청받은 독서모임에서 시간에 대한 말을 한 적이 있었다. 지금은 타임슬랩을 다룬 영화, 드라마를 어렵지 않게 볼 수 있고 상상할 수 있으며 마치 자신이 그런 여행을 하듯이 꿈을 꾸기도 한다. 문학적인 관점으로 본다면 타임슬랩을 다룬 작품 중에 어떤 작품이 가장 오래되었을까. 필자에게 물어본다면 찰스 디킨스 작품의 크리스마스의 캐럴을 꼽아본다. 크리스마스가 되면 마치 단골손님처럼 찾아오는 반가우면서도 반갑지 않은 손님 스크루지에 대한 이야기를 다룬 소설에서 과거, 현재, 미래를 떠나는 여행에 대해 다루고 있다. 운명을 바꾸기 위해 스크루지는 시간여행을 하게 되는 필연적인 숙명을 가지고 있었던 것일까. 아니면 시간여행을 했기 때문에 자신의 운명을 바꿀 수 있게 되었던 것일까. 작품 속에서는 그런 이야기를 다루고 있지는 않다. 작가는 스크루지라는 한 사람의 삶이 과연 바람직한가를 여러 사람의 눈과 입을 통해서 듣고 느끼게 하고 있다.


분명히 사람은 미래를 상상할 수 있고 현재를 자각할 수 있으며 과거를 연상할 수 있는 존재라는 것은 사실이다. 인간이란 존재는 이미 일어난 일에 대해 통찰할 수 있으며 기억을 미래로 보내서 앞으로 어떤 일이 일어날지 예상함으로써 보상을 얻거나 위험에서 벗어나기도 한다. 현재의 삶을 그리고 있지만 동시에 미래를 위한 밑그림까지 고려를 하고 있는 셈이다. 사람과의 관계에서도 자신이 상상한 것처럼 상대방도 반응을 할 것이라고 생각을 한다. 다른 기억을 가지고 살아가며 현재조차도 공유되지 않은 전혀 다른 두 사람이 미래에 같은 반응을 보인다는 기대는 정말로 기적과 같은 일이기도 하다. 그런 기적 같은 기대가 이루어지지 않은 것에 실망하면서 스스로를 자책하는 것도 사실이다. 당연한 결과를 당연하지 않게 받아들이는 것이다.


크리스마스 캐럴 속의 스크루지의 변화를 즐거워하는 조카나 직원의 변화는 그만큼 스크루지의 변화가 너무나 극적이었기 때문이다. 작품을 읽는 독자들은 알고 있다. 스크루지 심경에 어떤 변화를 가져오게 되는지 전지적인 시점에서 이미 예측하고 보고 있었다. 그렇지만 그 시점으로 바라보지 못했던 소설 속 등장인물들은 전혀 예상하지 못한 결과에 갸우뚱할 수밖에 없었다. 사람은 자신을 전지적인 시점으로 바라볼 수가 없다. 아직 경험해보지 못한 사후에 그런 일이 일어날지는 모르겠지만 일반적으로 그렇게 바라볼 수 있는 사람은 없다. 항상 주변환경은 변하고 있으며 방에 들어가서 홀로 외부와 접촉을 끊고 잠시 살아간다고 하더라도 세상은 변하고 있으니 말이다.


그림을 그리는 재주가 없어서 X손이라고 스스로를 소개하더라도 자신의 삶은 그려야 한다. 사람의 삶은 명확하지 않은 추상화와 같다. 태어나서 모호하게 자신의 의사표현을 하면서 그린 그림이라고 말할 수 없는 것들을 표현하는 때부터 사람과의 관계를 조정하면서 업무를 처리하고 누군가를 만나 사랑하고 결혼하고 아이를 낳고 나이가 들어가면서도 여전히 자신을 어떻게 그려나갈지를 고민하면서 살아간다. 성장하면서 어릴 때보다 불확실성 한 요소들은 더욱더 커진다. 생각하지도 못한 사고, 사회변화, 주거환경의 이동 등 수많은 요소들이 삶을 흔들어놓기도 한다.


2025년은 어떤 시점에서 본다면 과거일 수도 있고 미래일 수도 있다. 그렇지만 분명한 것은 같은 해에 이 글을 쓰고 있다. 필자는 자신의 그림을 그리는 데 있어서 적어도 자신이 주체적으로 그림을 그렸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한다. 모든 사람에게 어느 순간 적재적소에 유령이 나타나서 당신의 과거와 현재, 미래를 잘 보여줄 수 있는 스크루지와 같은 인생은 없을 것이다. 한국사람은 특히 사회적 잣대나 부모등의 영향을 받아 형식화된 그림을 그리게끔 강요받으면서 살아온 것도 있다. 그 과정 속에서 충돌도 일어나고 자신이 그리려고 했던 것과는 전혀 다른 그림을 그리며 살아가기도 한다.


그림을 그리면서 드는 생각은 모든 그림은 항상 어렵다는 것이다. 단지 그걸 용납할 수 있는 자신과 그렇지 못한 자신이 있을 뿐이다. 잘 그리려고 하면 할수록 그림은 갈수록 어려워지고 적당히 타협하면서 넘어가면 다음단계로 나아갈 수가 있다. 특정시점에서 순간의 그림은 완성이라는 의미를 부여할 수는 있어도 긴 안목에서 본다면 삶의 그림은 완성이라는 것이 없다. 게다가 그 그림은 정물화, 인물화, 풍경화등이 아닌 자신만의 추상화다. 추상화는 보는 사람마다 해석하는 것이 모두 다르다. 피카소가 자신의 작품에서 어떤 사람을 그렸다고 하는데 설명을 듣고도 어떤 부분이 닮았는지 찾기가 너무 어렵다.


모든 것이 너무나 빠르게 변해가는 시대에 자신의 그림을 빠르게 완성하고 싶은 마음이 드는 것도 당연하다. 아무리 SNS가 빠르게 메시지를 전달하고 트렌드가 바뀐다고 하더라도 자신의 삶은 그 템포에 맞춰서 살아갈 수는 없다. 그림을 처음 배우는 사람들이나 조금은 익숙해진 사람들조차 옆에서 더 빨리 배우고 잘 그리는 사람들을 보면 조급함이 느껴져서 자신의 패턴을 놓치게 된다. 모두에게 자신에게 주어진 삶의 그림을 그리는 재능이 부여가 되어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재능을 발견하는 것은 누구도 해줄 수 없는 자신만의 몫인 것도 사실이다.


"내 삶은 영원히 완성할 수 없고 누구도 평가할 수 없는 한 점의 추상화 같은 인생"라는 생각으로 살아간다면 행복의 충분한 조건은 아니더라도 적어도 불행이라는 것을 느끼지는 않으며 살아갈 수는 있지 않을까. 다른 사람이 구하기 힘든 색감의 물감을 가지고 칠한다고 하더라도 주어진 하나의 연필만으로도 충분한 당신만의 명작을 만드는 것 자체로 삶의 그림은 충분한 박수를 받을만하다. 때론 아니 좀 많이 후회되는 과거가 있을 수 있지만 과거를 연상하는 그런 능력이 있기에 거기에 서 있을 수가 있는 것이 사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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