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쓸모없는 교육비용

한국은 왜 사교육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는가.

한국이 가진 세계적인 경쟁력은 과연 무엇일까. 그렇게 교육열이 높은데도 불구하고 한국의 교육성과는 좋지 못할까. 혼자서는 돈을 잘 벌 수 있을지는 몰라도 다른 사람을 이롭게 할 정도의 능력은 왜 배양하지 못하는가. 전 세계에서 개개인의 행복도가 상당히 낮을 만큼 학생들의 성취도가 낮은 나라 한국을 만든 것은 무엇인지 알 수가 있을까. 주변에서 보면 정말 공부를 잘해본 사람들이 아니라 공부를 제대로 하지 못한 사람들이 오히려 SKY에 대한 막연한 동경을 가지고 있다.


한국의 교육정책은 본질은 놔두고 이상한 방향으로 자꾸 바꾼다. 예를 들어 누구도 한 번쯤 가고 싶은 전시가 있다고 치자. 그 전시는 하루에 들어갈 수 있는 사람의 수는 제한이 되어 있다. 그저 그런 다른 전시는 가봤자 의미도 없고 인증숏을 찍어봤자 다른 사람이 관심을 가지지도 않기 때문에 가고 싶은 생각이 없다. 그럼 그 전시를 보기 위해 사람들이 줄을 선다. 어떻게 보면 상당히 공정해 보인다. 빨리 줄을 선 사람이 먼저 들어가고 늦게 줄을 선 사람은 늦게 들어간다. 어떤 사람은 자신대신 줄서주는 사람을 위해 돈을 지불한다. 돈을 지불하지 못하면 그냥 기다리는 수밖에 없다.


사람들이 문제를 제기한다. 이렇게 줄 세우기를 하면 너무나 시간도 오래 걸리고 사회적 비용도 초래하지 않느냐라고 말하자 관계자는 줄 세우기 방법을 여러 가지로 나누어하겠다고 말한다. A만 있었던 줄이 B, C, D, E로 나누어서 줄을 서면 한 명씩 들여보내겠다고 말한다. 그럼 한 줄로 세우던 것보다 시간이 줄었는가? 어차피 똑같다. B는 세 군대를 가서 팸플릿을 가져온 사람의 줄, C는 이전부터 그 전시전을 여러 곳에 홍보한 사람의 줄등으로 나누었다고 해봤자 결국에는 방법만 복잡해졌을 뿐 여전히 기다려야 한다.


지금까지의 교육정책이 이런 식이 었다. 수능만을 보고 들여보냈더니 다양한 학생의 능력을 보지 못했기에 내신, 사회봉사 등의 여러 가지 전형을 만들어놓은 식이다. 서울대라는 가고 싶은 곳은 하나뿐인데 그렇게 다양하게 해 본들 사교육비만 더 많이 들어갈 뿐이다. 어떤 사람들은 수능만 보는 것이 공정하다고 말하지만 그것만 본다고 해서 사교육비가 줄어들 리가 없다. 어차피 갈 곳은 정해져 있으니 말이다. 사회는 서울대가 아니더라도 가고 싶고 가서도 인정받을만한 곳을 많이 만들면 된다. 그러면 자연스럽게 병목이 줄어들 수밖에 없다.

ChatGPT Image 2025년 4월 3일 오후 03_42_52.png

초, 중, 고까지 그렇게 많은 비용을 지출해서 어떤 학생을 만들었는가. 영어를 아무리 잘해봤자 기가 막히게 수학을 풀고 특정 논술을 잘 쓴들 일부 분야만 빼고 다 필요 없다. 그냥 대학간판까지 따고 소용이 없어지는 교육들이다. 대학에 교육부가 지원하는 돈만 봐도 그렇다. 주로 연구성과 위주로 보기는 하겠지만 그것이 결국에는 학생들에게 교육의 질로 반영이 된다. 잘하는 대학을 위주로 돈을 배정해 준다. 이미 서울대는 1940년대에 일제가 남겨둔 인프라를 통합해서 만든 대학이다. 이미 몇 발자국 앞선 대학을 지방 국립대가 어떻게 따라가란 말인가. 한 학생당 비율로 서울대 대비 1/3의 예산을 지원해 주면서 무슨 성과를 내라고 하는 것인지 모르겠다.


서울대에 들어가는 예산이나 서울 내의 사립대에 지원하는 교육예산을 쪼개서 지방국립대에 지원해 주라는 것이 아니라 어느 정도 레벨에 올라오기까지 교육비를 충분히 배정해 주면 자연스럽게 성장하게 된다. 포항공대나 카이스트처럼 말이다. 물론 그 대학들은 교육부의 재정을 받아서 사용하지는 않는다. 다른 재정에서 나온다. 어차피 직업군에 따른 소득의 불균형은 교육에서 해소할 수는 없다. 적어도 대학의 서열화라던가 사교육의 문제를 해결할 수가 있는데도 불구하고 보수나 진보를 떠나 해결되지 않을 정책을 내놓고 있다.


이미 앞서서 달릴사람은 달리라고 추후에 최종 점수를 측정할 운동장을 돈 받고 열어주고 있는데 7세 고시라던가 초등학교의 사교육 열풍이 일어나지 않으면 이상하다. 필자가 운동을 하이다이빙을 한 적이 있었다. 그냥 운동으로 혹은 도전으로 즐거운 것이었지만 문제는 예전에 없었던 지상훈련장을 누군가가 만들고 돈을 받고 이용하고 코치가 그곳에서 연습을 시키면서 발생하게 되었다. 같은 운동시간에 나와서 사람에 따라서 다르겠지만 그렇게 능력 차이가 있지는 않았다. 그리고 대부분의 회원들에게 비교적 공평하게 기회를 주는 것도 같았다.


문제는 지상훈련장이 생김으로써 실력차이가 생겨나기 시작했다는 점이다. 물론 빠른 시간에 잘하고 싶은 마음은 누구에게나 있을 것이다. 코치의 입장에서 수강료 외에 개인 강습비를 받으니 자연스럽게 지상훈련을 나오는 사람에게 더 관심을 가지고 심지어는 공식 수강시간에도 그들에게 기회를 더주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강사는 노골적으로 어떤 자세를 더 잘하고 싶으면 이번 주 저녁시간에 나올 것을 권하면서 수강료를 문자로 보낸다. 물론 그 꼴이 싫으면 그만두면 그만이지만 학교에서는 그것이 쉽지가 않다. 대학에 들어가는 순간 거의 평생을 좌지우지되기 때문이다.


지금의 다양한 형태의 입학방식은 공정이라는 착각아래 만들어진 돈 많이 들어가는 사교육비를 부르는 방식이다. 자신의 업을 하기에도 바쁜 부모들이 그런 것까지 어떻게 신경을 쓰겠는가. 사교육을 해서 돈을 벌고 싶은 사람들이 자식을 망치겠냐면서 권하면 그냥 어쩔 수 없이 하게 되고 결국 학교의 공교육은 그런 학생들로 인해서 수준이 올라가고 원래의 교육환경에서 따라갈 수 있는 학생들이라도 못 따라가면서 다시 사교육시장으로 들어가게 되는 악순환을 반복하게 된다.


그렇다면 그렇게 사용한 교육비용이 생산적으로 사용이 되었냐를 보면 전혀 그렇지 않다. 대학을 나와서도 자신의 기본적인 업무를 하지 못하기 때문에 기업들은 신입을 잘 뽑으려고 하지 않는다. 즉 웬만한 상위권대학 외에는 쓸데없는 것을 가르치고 있다는 의미다. 대학에 투자된 비용이 적어서 교육의 질이 떨어지니 당연히 기업에서 필요한 교육은 시키지 못하고 의미 없는 돈만 쓰고 사회적 비용만 높인 꼴이 된다. 그런 격차를 만들어서 대다수의 사람들에게 기회를 안 주고 싶어 하는지는 모르겠지만 교육이 그렇게 되면 결국에는 무너진다.



keyword
매거진의 이전글치솟는 산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