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쌀 천 섬의 가치

무더운 여름날 계곡의 물소리를 들으며 쉴 수 있는 거창의 용원정

지금은 다양한 재산적인 가치를 가진 것들이 있지만 농경사회에서 재산은 보관하고 있는 곡식이나 곡식을 수확할 수 있는 땅에 있었다. 지금처럼 생산력이 높지 않았던 시대에 흰쌀밥을 삼시세끼 혹은 조선시대까지 점심은 한자로 점을 찍듯이 아주 간단하게 먹는 음식이었으므로 아침과 저녁에 챙겨 먹을 수 있다는 것은 부유함의 상징이기도 했었다. 지금이야 쌀이 다양한 형태로 포장되어서 판매가 되고 있지만 불과 100여 년 전까지만 하더라도 쌀의 계량 단위는 가마니로 통일되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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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창에는 규모도 크고 아름다운 풍광을 가진 계곡들이 있지만 사람들이 많이 찾지 않기에 여유롭게 쉴 수 있는 명소들이 있다. 거창의 고학리라는 곳은 높은 언덕 앞에 세 봉우리가 솟아 있고, 개울물은 새 '을'자로 모여 흐른다. (高阜前庭 三峯立 泉水合流乙字溪)라는 글귀모양 첩첩산중에 계곡이 아름다운 곳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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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학은 높은 언덕이며 풍수설의 산세 모양에서 높을 '고'자, 새 '학'자를 따서 지은 이름이다. 병항, 고신, 고대, 상촌 4개 마을이 있는데 병항마을에는 용원정이라는 정자가 있다. 용원정(龍源亭)은 거창군 마리면 고학리 병항마을에 있는 정자로 구화 오수선생을 기려 후손들이 세웠으며 용원정 앞에는 기백산에서 흘러내리는 용계(龍溪)라는 하천 위에 돌다리가 놓여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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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남 거창군에는 유독 큰 바위가 놓여 있는 계곡들이 많이 있다. 바위에서 신발을 벗고 계곡물에 발을 담그고 있으면 여름의 무더위도 잊힐만하다. 특히 이곳이 유명한 것은 용원정 주변 100년 이상된 꽃나무가 쌀다리와 조화를 이루는 곳으로 벚꽃이 만개할 즈음에는 사진작가들의 촬영 명소로 널리 알려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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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항마을의 동쪽 당봉(堂峰)의 자라바위와 서쪽의 자라바위가 서로 마주 보고 있는 중앙의 목넙 고개터에 자리하고 있어 자래목이라 하다가 일제때 병항으로 고쳤다. 400년 전 해주 오 씨 구화 오수의 후손들이 터를 열었다고 해서 그런지 오 씨들의 흔적이 주변에 많이 남아 있다. 가마니 이전에는 섬이라는 단위를 사용했는데 한 섬은 과거에 조선시대까지 홉·돼·말 등과 함께 사용하던 부피를 재는 단위로 쌀과 콩 등의 곡물로 조세를 내던 조선시대에 세종은 부정부패를 차단하기 위해 전국적으로 도량형 규격을 표준화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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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원정으로 건너가는 다리가 당시에 상당한 돈이 투자된 돌다리다. 이 다리가 1,000 섬이 들어간 값비싼 다리다. 오수 선생의 후손 오성재 오성화 형제가 백미 천 섬을 들여 만들었다 하여 쌀다리라고 불린다. 섬은 ‘섬틀’이라는 기구를 사용해 짚으로 짠 곡물을 담는 용구이기도 했는데 쌀 한섬은 미터법으로 환산하면 144㎏으로 한말의 열 배를 나타내는 단위로 사용됐다. 20kg도 묵직하다고 생각하는 요즘에 상당히 무거운 단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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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곳에 와서 보니 역시 거창의 매력은 계곡에 있다는 것을 알 수가 있다. 용원정 앞에는 기백산에서 흘러내리는 용계(龍溪)라는 하천이 있는데 사람들이 많이 찾는 관광지보다 고즈넉한 매력이 있어서 좋은 곳이다. 시간만 있다면 이곳에서 분위기와 어울리는 음악을 들으면서 한 여름의 낭만을 만끽하기에 너무나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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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이 지나 러일전쟁(1904년) 이후 일제는 동양척식주식회사를 설립하고 한국에서 쌀을 수탈하기 위해 일제식 자루인 ‘가마니(일본어로 가마스)’를 들여오게 되는데 이후 농촌에선 쌀 계량 단위를 섬이 아닌 가마니로 쓰기 시작했다. 가마니는 섬보다 부피는 작지만 한 사람이 운반하기에 비교적 적당한 80㎏을 담을 수 있다고 하는데 80kg이 운반하기에 적당한지는 사람에 따라서 다를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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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원정에 올라와서 보니 화려한 색감의 단청이 용의 형상과 잘 어울린다. 한국인은 색의 미학을 잘 알았던 민족이기도 하다. 누가 찾아올지도 모르는 이곳에 오수의 후손들은 자신의 자식들의 이름을 바위에 새겨두었다. 오수의 후손이 1758년 (쌀다리)를 만들었으니 267년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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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개의 중심 다리 받침돌 위에 두 개의 큰 돌을 연결하여 거문고처럼 누운 평교 다리로 길이는 11m 폭은 1.25m 높이는 2m 터 정도이다. 말 그대로 다리아래에서 휴식을 취하기에 너무나 좋다. 끊임없이 흘러내려오는 물은 마치 천섬의 쌀에서 나오는 풍요를 보는 것만 같다. 한 섬이 한 가마니가 되고 이후에 가마니는 1960년대로 접어들며 점차 자취를 감췄으며 40㎏ 단위인 폴리프로필렌(PP) 마대를 거쳐 쌀 소비량이 줄어드는 추세를 반영해 산지 쌀값을 소비자들이 많이 구매하는 20㎏ 단위 기준으로 발표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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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요로운 정자와 쌀다리의 아래에서 여름의 무더위를 잠시 식혀본다. 다리란 공공의 자원이기도 하다. 대중을 위해 큰 비용을 들여서 돌다리를 놓은 것은 불편함을 없애기 위함이 아니었을까. 그렇게 마을과 마을을 이어주는 다리처럼 사람의 마음도 이어질 수 있는 그런 베풂이 있는 사회를 생각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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