논산 광산김 씨의 명문가를 이어간 신독재 김집
논산을 넘어서서 광산김 씨는 충청남도뿐만이 아니라 충북등에 큰 영향을 미친 성씨이기도 하다. 광산김 씨의 중심에는 사계 김장생선생과 신독재 김집 선생이 있다. 이 둘은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이기도 하면서 노론과 소론을 뿌리를 만든 사람들이기도 하다. 사계 김장생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지만 큰 아들이 임진왜란 때 의병으로 참전하였다가 실종되면서 사실상 장남의 역할을 하면서 살게 된다.
논산의 한삼천리라는 지역에는 김집선생의 묘가 남아 있다. 이곳은 벌곡이라고도 하는 곳이기도 하다. 김집을 보고 할아버지인 김계휘는 항상 '우리 집을 이을 사람은, 오히려 반드시 이 아이가 족히도 된다.'라고 했다.
안쪽으로 들어가면 김집선생의 묘로 가는 이정표가 나온다. 김집은 이이(李珥)의 서녀사위이면서 학문과 송익필의 예학(禮學), 아버지 김장생(金長生)의 학문을 이어받아 집대성을 이루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사람이 신독재 김집이다.
신독재 김집선생의 묘로 가는 길은 이전에 갔을 때와 전혀 다른 모습올 바뀌어 있었다. 산의 상당 부분이 평탄화작업이 되어 있어서 처음에는 어리둥절했었다. 김집은 1649년(효종 즉위년) 대임(大任)을 맡겨달라는 김상헌(金尙憲)의 특청을 효종이 받아들여 이조판서에 임명되기도 하였다.
김집은 선조 때 초시에 합격하고 1610년(광해군 2) 헌릉참봉(獻陵參奉)에 제수되었으나, 광해군의 정치에 반대하여 은퇴하게 된다. 김집은 광해군의 정치를 지지하지 않았던 사람이다.
서인 산림의 당수로 송시열, 송준길, 이유태와 윤선거, 윤문거, 박세채 등이 그의 문하에서 배출되어 학문적으로는 노론과 소론의 정신적 지주이기도 하다.
그의 삶의 흔적을 담은 신도비에는 빼곡하게 그의 삶에 대해 쓰여 있다. 김집의 비문은 공주 7월의 인물이라는 용문 서원의 초려 이유태가 짓고 윤선거가 써서 1663년(현종 4년)에 건립한 '문경공신독재김집선생지묘' 묘비가 있다.
김집은 태어나면서 특이한 자질이 있고, 영걸하고 순수함이 다른 사람보다 뛰어났다고 한다. 옛사람들이 학문을 배우고 가문을 이루는 것과 현재에 학문을 하는 사람들과는 차이가 있다. 김집은 19살 되던 해 봄에 송당(松塘) 유홍(兪泓)의 딸과 결혼하여 정실부인으로 맞이하였다.
임진왜란 중 형 김은, 형수 음성(陰城) 박 씨 그리고 세 살 된 조카가 왜군에 의해 살해되면서 그의 삶에도 큰 변화를 겪었을 것으로 보인다.
세상을 떠나자 왕명으로 예장하여 충남 연산 동쪽 천호산 고운 승사(孤雲僧舍) 북쪽 손향원(巽向原)에 안장되었는데 이때 모인 사람이 거의 천여 명이었다가 후에 그의 묘소는 논산군 벌곡면 양산리에 이장되었다.
1656년 6월 5일(향년 83세)에 세상을 떠난 그는, 생전에도 이언적, 이황, 이이, 송시열, 박세채와 함께 인신(人臣)으로서의 최고 영예인 문묘와 종묘의 종사를 동시에 이룬, 6현 중의 일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