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거진 소설쓰기

인생을 바꾸는 화가

사라진 감정을 복원하는 화실에서 벌어지는 시간의 균열

“기억을 그리는 화가와, 기억 속에서 잃어버린 삶이 다시 그려지는 순간 — 인생을 바꾸는 화가”


서울의 인사동은 항상 예술을 하는 사람들의 발길이 이어지는 곳이기도 하지만 자신만의 인생을 살아가고 싶은 사람들이 머무는 곳이기도 하다. 그런 인사동에 너무나 독특한 화가가 있다는 소문이 퍼지고 있었다. 이른바 인생을 바꾸는 화가가 있다는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다. 실제 나이는 60이 넘었는데도 불구하고 외모를 볼 때 40대 초반처럼 보인다는 이야기도 떠돈다. 그는 어떤 방법으로 젊은 모습을 가지고 살아가고 있을까. 그 화가는 서울 인사동 낡은 골목 끝에 간판 없는 작은 화실에서 자신만의 작품을 그리고 있었다.


과거에 국전 출신으로 돈도 많이 벌었던 유명화가였지만 음주운전을 한 사람이 몰던 차에 아내를 잃게 되었다고 한다. 그리고 그의 인생은 180도 달라졌는데 자신의 아내를 잃어버린 대신에 다른 사람의 기억이야기를 듣고 그걸 그림으로 재현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지게 되었다. 의뢰인이 요청한 기억은 단 한 번만 가능하며 그 그림으로 인해 바뀐 인생은 다시 되돌리지는 못한다. 그리고 그 사람의 얼굴도 바뀐 채 살아가게 된다. 기억을 되찾은 사람들은 이전과 같은 얼굴로 살아가지 못했다. 삶이 바뀌면 표정도, 눈빛도, 인생의 결이 달라지며 결국은 그 사람 자체가 달라지기 때문이다.


서울 인사동 골목은 언제나 시간이 늦게 흐르는 곳처럼 느껴진다. 관광객들의 발걸음은 분주하지만, 골목 안쪽으로 한 걸음만 들어가면 소음이 줄어들면서 골목길안은 묘하게 오래된 색으로 변한다. 시대를 알 수가 없지만 그 골목 끝, 지도에도 표시되지 않는 낡은 2층 건물에 그의 화실이 자리 잡고 있었다. 간판은 없었고, 창문은 항상 반쯤 가려져 있었으며, 문 앞에는 아무 설명도 없는 작은 종이 한 장만 붙어 있었다.

‘기억을 바꾸고 싶다면 문을 두드리세요.’

처음 보는 사람들은 장난이라고 생각하고 지나쳤다. 그러나 한 번이라도 그 문을 두드린 사람들은, 다시는 예전의 삶으로 돌아가지 못했다. 화가의 이름은 한때 화단에서 꽤 알려져 있었던 사람이다. 국전 출신, 대형 갤러리 초대전, 해외 전시 경력. 그러나 지금 그는 세상에서 사라진 사람처럼 조용히 숨어 살고 있었다. 아내를 잃은 날 이후였다. 음주운전 차량에 치여 병원으로 실려 간 그녀의 손을 끝까지 놓지 못했던 그날 밤 이후, 그의 삶에는 설명할 수 없는 균열이 생겼다.


처음에는 환청이라고 생각했다. 누군가의 목소리가 머릿속으로 흘러 들어왔고, 보지 못한 풍경이 눈앞에 떠올랐다. 그리고 그는 그 장면을 마치 그 공간에 있었던 것처럼 그려냈다. 그 그림을 가져간 사람은 오열하듯이 말했다. 어떤 사람들은 사람이 보는 것을 넘어선 공간과 내면을 그대로 표현하는 능력이 있었다.

“이건… 제가 잊어버린 기억이에요.”

그날 이후 소문이 퍼져나가기 시작했다. 그는 사람들의 잃어버린 기억 속의 시간과 감정을 그림으로 재현하는 화가가 되었다. 단 한 번만 가능했고, 그 그림이 완성되는 순간 의뢰인의 삶은 어딘가에서 조용히 수정되듯 바뀌어 버렸다. 그리고 그 대가처럼, 화가는 점점 더 젊어 보이기 시작했다. 지나가버린 시간이 그에게서 빠져나가는 대신, 누군가의 과거가 되살아나는 것처럼. 그날도 겨울 햇살이 골목 위에 낮게 내려앉아 있었다. 화실 안은 고요했고, 벽에는 얼굴 없는 인물화들이 빼곡히 걸려 있었다. 눈은 있지만 표정은 없고, 입은 있지만 말이 없는 그림들이었다. 그때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톡, 톡.

그는 붓을 내려놓고 잠시 숨을 골랐다. 문을 두드리는 소리는 언제나 조심스럽고 망설임이 섞여 있었다. 삶을 되돌리고 싶어 하는 사람들의 손끝은 늘 떨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문을 열자 스물다섯쯤 되어 보이는 여자가 서 있었다. 눈가에는 오래된 피로가 내려앉아 있었고, 손에는 낡은 사진 한 장이 쥐어져 있었다.


“여기… 기억을 그려준다는 화실 맞나요?”

그는 대답 대신 잠시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가 사람을 보면, 그 주변에 흐르는 시간의 결이 희미하게 보였다. 그녀의 시간은 어디선가 찢겨나간 채 비워져 있는 것이 보였다.

“어떤 기억을 찾고 싶습니까.”

그녀는 사진을 내밀었다. 사진 속에는 한 남자가 웃고 있었고, 그 옆에는 흐릿하게 잘려나간 빈 공간이 남아 있었다.

“이 사람과 함께 있었던 시간이에요. 모두가 제가 혼자였다고 말해요. 기록도 없고, 사진도 지워졌어요.

그런데 저는 분명히 이 사람과 사랑을 하고 시간을 보냈어요.”

그의 손끝이 미세하게 떨렸다. 사라진 관계와 지워진 존재 같은 의뢰는 언제나 위험했다.

“기억을 되찾으면 지금의 삶이 바뀝니다. 그리고 되돌릴 수 없습니다.”

“그래도 괜찮아요. 잊고 사는 것보다, 아프더라도 기억하고 싶어요.”

그녀의 목소리는 담담했지만 절박함이 묻어 있었다. 그는 잠시 눈을 감고 그녀의 기억을 되살려보았다. 그녀의 과거가 물결처럼 스며들며 손끝에 그려지는 느낌이 들었다. 비 오는 날의 골목에서 손을 잡고 걷던 두 사람의 그림자, 그리고 어느 날 갑자기 잘려나간 시간.

그는 캔버스를 꺼냈다. 그의 손에서 연필이 움직이기 시작하자 공기가 서늘해졌다. 기억은 색으로 번졌고, 사라진 사람의 윤곽이 점점 또렷해져 갔다. 그 그림을 보는 그녀의 눈에서는 눈물이 조용히 흘러내렸다. 마지막 선이 완성되는 순간, 화실 안의 시계가 짧게 흔들렸다. 그리고 동시에— 그녀의 휴대폰이 울렸다. 화면에는 한 이름이 떠 있었다. 사진 속 남자의 이름처럼 보였다. 그녀는 숨을 삼킨 채 화면을 바라보았다. 존재하지 않던 사람이, 현실로 되돌아온 순간이었다.


그는 말없이 자신이 그린 그림을 그녀에게 건넸다. 그리고 거울에 비친 자신의 얼굴을 보았다. 주름 하나가 더 사라져 있었다. 누군가의 기억 하나가 돌아온 만큼, 그의 시간도 또 한 겹 벗겨져 나갔다. 그녀가 나가고 나서 화실의 문이 조용히 닫혔다. 겨울의 빛 속에서 또 하나의 삶이 바뀌고 있었다.


그녀가 화실 문을 나섰을 때 골목은 여전히 같은 겨울이었다.

그러나 공기의 결이 달라져 있었다. 눈에 보이는 풍경은 변하지 않았는데, 세상이 미세하게 다른 방향으로 기울어진 느낌이었다. 마치 잘못 놓인 퍼즐 조각 하나가 조용히 맞춰지며 전체 그림의 균형이 바뀌는 순간처럼.

휴대폰 화면 속에 떠 있는 이름은 여전히 선명했다.

민우

존재하지 않았던 이름.

기억 속에만 남아 있던 사람.

그리고 방금 전까지 세상 어디에도 없던 번호였다. 떨리는 손으로 통화 버튼을 눌렀다. 신호음이 울리는 동안 심장이 비정상적으로 빨라졌다. 꿈에서조차 들리지 않던 연결음이었다.

“여보세요?”

낯익은 목소리가 귓가에 닿는 순간 그녀의 다리가 풀렸다. 몇 년 동안 혼자만 간직하고 있던 목소리. 다른 사람들은 그런 사람은 없었다고 말했지만, 그녀의 귓속에는 항상 남아 있던 소리였다.

“민우야…?”

잠시 침묵이 흐른 뒤 그가 웃듯 말했다.

“왜 이렇게 오랜만에 전화한 사람처럼 불러? 방금도 메시지 했잖아.”

그녀의 숨이 멎었다.

메시지?

기록을 열어보니 정말로 그와 나눈 대화가 며칠치로 남아 있었다. 존재하지 않던 시간들이 채팅창엔 텍스트로 채워져 있었다. 사진첩에도 변화가 있었다. 둘이 함께 찍은 사진이 여러 장 새로 생겨 있었다. 배경도, 계절도, 표정도 자연스러웠다. 합성이라기엔 너무 완벽했고 조작이라기엔 너무 현실적이었다. 그러나 거울을 보는 순간 그녀는 더 큰 변화를 알아차렸다. 얼굴이 미묘하게 달라져 있었으며 분위가 자신 같지가 않았다. 눈꼬리가 조금 내려가 있었고, 입가에는 전에 없던 부드러운 선이 생겨 있었다. 자신의 얼굴이라는 것은 알겠지만 분명히 이전과는 다른 얼굴이었다. 기억을 가진 사람이 되어버린 얼굴. 혼자가 아니라 누군가와 시간을 나눈 사람의 표정이 얹혀 있었다. 그날 밤 그녀는 민우를 다시 만났다. 약속 장소도 자연스럽게 정해져 있었고, 그 역시 아무 의심 없이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다. 카페 창가에 앉아 있는 그의 모습은 너무나 현실적이었다. 손에 들린 컵, 테이블 위에 놓인 책, 그녀를 바라보며 짓는 웃음까지. 사라졌던 사람이 아니라 원래부터 존재해 온 사람처럼 자연스러웠다.

“왜 이렇게 울 것 같은 얼굴이야?”

그의 말에 그녀는 아무 대답도 하지 못했다. 되찾은 기억이 기쁜 것인지, 아니면 무언가를 건드려서는 안 되는 시간을 끌어낸 것인지 알 수 없었다. 그와 대화를 나눌수록 이상한 균열이 느껴졌다. 그가 말하는 과거와 그녀가 기억하는 장면 사이에는 아주 미세한 차이가 있었다. 같은 시간을 공유하는데도 완전히 같은 기억이 아니었다. 그림으로 되살아난 기억은 진짜였지만, 어딘가에서 수정된 흔적이 남아 있는 듯한 느낌이 진혀졌다.

“우리… 헤어진 적 있었나?”

그녀의 질문에 민우는 잠시 멈칫했다.

“무슨 소리야. 그런 적 없잖아.”

그의 눈빛에는 아주 짧은 공백이 스쳐 지나갔다. 존재가 복원되었지만 시간의 결까지 완벽하게 맞춰진 것은 아니었다. 며칠이 지나면서 그녀의 주변에서도 변화가 생기기 시작했다. 친구들은 자연스럽게 그를 알고 있었고, 함께했던 일들을 당연하다는 듯 이야기했다. 그러나 세부적인 기억을 물어보면 모두 조금씩 달랐다. 누군가는 여행을 갔다고 했고, 누군가는 그날 비가 왔다고 했으며, 또 다른 사람은 그 자리에 없었다고 말했다. 되찾은 기억은 완전한 복원이 아니라, 현실 위에 덧칠된 또 하나의 삶이었다. 마치 유화물감으로 그림을 그리다가 다시 위에서 덧칠을 해서 예전에 그렸던 것을 바꾼 그런 느낌이랄까. 그녀는 점점 불안해졌다. 행복해야 할 시간이었지만 마음은 자꾸 흔들렸다. 사라졌던 것이 돌아왔다는 기쁨보다, 존재가 바뀌어버린 세계에 대한 어색함이 더 크게 밀려왔다. 그렇게 지나가던 1주일쯤 지난날, 그녀는 깨달았다. 자신의 과거가 아니라 자신이 살아온 현재가 더 많이 지워지고 있다는 사실을 말이다. 민우와 함께했던 시간이 늘어날수록 혼자였던 시간의 흔적이 조금씩 희미해져가고 있었다. 친구들과의 사진 일부가 사라지고, 기록이 바뀌고, 기억의 우선순위가 바뀌었다. 하나의 삶이 복원된 대신 다른 삶이 뒤로 밀려나고 있었다.

그녀는 문득 인사동 골목 끝 화실을 떠올렸다.

단 한 번만 가능하며 되돌릴 수 없다는 그의 경고가 문득 생각났다. 되찾은 기억은 선물이 아니라 대체된 삶의 시작이었을지도 모른다. 그날 밤 그녀는 거울 앞에서 한참 동안 자신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이전의 자신과 지금의 자신 사이에 놓인 미묘한 거리가 있었다. 행복해 보이는 얼굴인데 어쩐지 점점 낯선 사람이 되어가고 있었다.


그날 이후 그녀는 일부러 민우에게 먼저 연락하지 않았다. 연락이 오지 않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불안은 줄어들기는커녕 오히려 더 또렷해졌다. 그가 없는 시간이 아니라, 그와 함께 있기 전의 자신이 사라지고 있다는 감각 때문이었다.혼자였던 시절의 기억은 점점 설명하기 어려운 것이 되어갔다. 왜 그때 그렇게 혼자 있는 시간이 많았는지, 왜 밤마다 같은 음악을 반복해서 들었는지, 왜 아무에게도 기대지 않으려 했는지— 그 이유들이 하나둘 말끔하게 정리되어 버렸다. 정리된 기억은 편안했지만, 그만큼 낯설었다. 마치 삶이 스스로를 설명하기 시작한 것처럼, 이게 더 자연스럽다고 설득하는 느낌이었다.


민우는 여전히 다정했고 현실적이었으며 조금의 의심도 없었다. 그러나 그 안정감 속에서 그녀는 자꾸만 자신의 자리가 줄어들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어느 날 그는 무심코 말했다.

“너 원래 이런 사람이었잖아.”

그 말이 그녀를 멈춰 세웠다. 그가 말한 ‘원래’는 그녀가 기억하는 자신이 아니었다. 그림이 완성된 뒤, 조정된 기억 속의 자신이었다. 그날 밤 그녀는 다시 혼자 잠들었다. 어둠 속에서 문득 떠오른 것은 사랑도 상실도 아닌 인사동 골목 끝의 그 화실이었다. 단 한 번, 되돌릴 수 없다는 경고. 그리고 기억을 되찾은 사람의 얼굴이 바뀐다는 말이 떠올랐다. 그녀는 그제야 깨달았다. 자신이 두려워하는 것은 민우를 잃는 일이 아니라, 자신이 누구였는지를 완전히 잃는 일이라는 것을. 다음 날 아침, 그녀는 연락처에서 민우의 이름을 한참 바라보다가 화면을 껐다. 그리고 아주 오랜만에 아무와도 약속하지 않은 하루를 선택했다.

그날 밤, 그녀는 문득 그 그림이 떠올랐다. 민우의 존재가 현실로 돌아온 순간, 정작 그녀는 제대로 바라보지 못했던 캔버스였다. 포장을 풀자 그림은 생각보다 크지 않았다. 한 사람만 조용히 들여다보게 되는 크기였다.


그림 속에는 두 사람이 있었다. 비 오는 날의 골목, 젖은 아스팔트 위로 가로등 불빛이 번지고 있었다. 손을 잡고 걷는 연인의 뒷모습. 그러나 이상하게도 얼굴은 끝내 완전히 그려져 있지 않았다. 남자의 얼굴은 윤곽만 남아 있었고, 여자의 얼굴은 빛 속에 묻혀 있었다. 마치 기억이 가장 선명한 순간까지만 허락된 것처럼.

그녀는 그제야 깨달았다. 그 화가는 존재를 되돌려준 것이 아니라, 기억이 멈춘 지점까지만 그려주었다는 사실을. 그림 속 민우의 웃음은 현재의 민우와 미묘하게 달랐다. 조금 더 불안했고, 조금 더 사라질 것 같은 표정이었다.


그림의 가장자리에는 눈에 띄지 않을 만큼 아주 가는 선으로 공백이 남아 있었다. 비어 있었지만 지워지지는 않은 자리. 그녀는 그림 앞에 앉아 한참 동안 움직이지 못했다. 민우를 떠올리면 선들이 선명해졌고, 혼자였던 시간을 떠올리면 그림은 조금씩 흐려지는 것 같았다. 마치 그림이 묻는 것처럼 느껴졌다. 어느 시간을 남길 것인가. 그녀는 캔버스를 덮지 않았다. 벽에도 걸지 않았다. 그림은 방 한쪽에 기대어진 채 남아 있었다. 그날 이후 그녀는 의도적으로 그 그림을 보지 않는 연습을 시작했다.


그 시간, 그녀가 선택하지 않은 밤에 화실 안에서는 또 다른 시간이 흐르고 있었다. 화가는 문을 잠그고 혼자 남아 있었다. 의뢰인이 다녀간 뒤의 화실은 언제나 묘하게 텅 비어 보였다. 공간이 줄어든 것처럼 벽과 벽 사이의 간격이 아주 조금씩 좁아진 느낌이었다.그는 천천히 화실 안쪽으로 걸어 들어갔다. 작업실의 끝처럼 보이던 벽 앞에 멈춰 서서 아무 표시도 없는 나무 패널에 손을 얹었다. 잠시 후 패널은 소리 없이 안쪽으로 밀려났다. 그 안에는 그 누구에게도 보여주지 않은 방이 있었다.


빛이 거의 들지 않는 작은 공간. 캔버스들이 켜켜이 쌓여 있었고 하나같이 천으로 덮여 있었다. 오래된 것일수록 아래에, 최근의 것일수록 위에 놓여 있었다. 그는 가장 아래에 깔린 그림의 천을 걷었다. 그림 속에는 한 여자가 있었다. 젊고 아름다운 얼굴에 미소가 걸려 있었다. 아직 아무것도 잃지 않은 얼굴— 그의 아내였다. 그러나 그 얼굴은 그가 기억하는 아내와도, 사고 직전 병실에서 본 얼굴과도 조금씩 달랐다. 그는 이미 여러 번 아내의 기억을 그려왔던 것이다. 함께 걷던 골목, 맑은 하늘 아래의 바다, 말하지 못한 마지막 순간까지. 그릴 때마다 아내는 조금씩 달라졌고, 그와 함께 그의 얼굴도 달라져 갔다.


거울 앞에 선 그는 자신의 손등을 바라보았다. 아주 얇은 균열 같은 것이 보였다. 주름이 아니라 시간이 빠져나가며 남기는 금처럼. 그 균열은 아내가 죽던 날 밤부터 시작되었다. 병실에서 그녀의 손을 끝까지 놓지 못했던 그 순간, 그는 들었다. 아내의 목소리가 아니라 어딘가에서 잃어버린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렸다. 그날 이후 그는 기억이 끊기는 지점을 볼 수 있었고, 그 지점을 선으로 옮길 수 있었다. 선이 완성되는 순간 현실은 조용히 수정되었다. 그릴수록 그는 깨닫고 있었다. 수정은 창조가 아니었다. 삶은 새로 만들어지지 않았다. 다만 누군가에게서 시간을 가져오고, 자신은 조금씩 아내가 죽었던 시간으로 돌아가고 있었다. 얻은 능력은 사실 능력이 아니라 거래의 문이었다. 누군가가 잃어버린 사람을 되찾으면, 그만큼 자신은 과거로 돌아갈 수 있었다. 그 거래를 그는 말하지 않았다. 말하는 순간, 자신이 돌아가려던 시간으로 돌아가지 못할 것 같았기 때문이다.


그날 그녀가 민우를 되찾아달라고 왔을 때 그는 느꼈다. 아내를 잃던 날의 냄새— 피가 아니라 시간이 끊어질 때 나는 냄새를. 그럼에도 그는 경고했다. 인생을 바꾸는 것은 늘 좋은 방향이 아니었다. 더 절망스러운 순간으로 돌아갈 수도 있었다. 그 대가를 타인이 지불하고 있다는 사실을, 사람들은 그 순간 알지 못할 뿐이었다. 그녀가 떠난 뒤 그는 밤새 잠들지 못했다. 새벽이 가까워질 무렵, 그는 갑자기 숨이 막혔다. 자신의 숨이 아니라 누군가의 숨이 끊어지는 기억이 화실 안으로 흘러 들어왔기 때문이었다. 비 오는 골목. 두 사람의 뒷모습. 그중 한 사람의 윤곽이 물감에 물이 섞이듯 흐려졌다. 민우였다. 그는 그제야 확신했다. 돌아온 것이 아니라, 다시 빌려졌던 것임을. 대가 없이 빌린 것은 반드시 돌아간다. 그리고 빚은 반드시 누군가에게 남는다.


그는 캔버스에 선을 더하려다 멈췄다. 손끝이 떨렸고 연필 끝이 종이를 찢었다. 찢어진 틈으로 공기가 빨려 들어갔다. 기억이 완전히 끊어질 때처럼. 그는 패널 뒤의 방을 열어 가장 아래의 아내 그림 앞에 섰다. 아내는 환하게 웃고 있었다. 그러나 오늘은 미소가 아주 미세하게 달라져 있었다. 눈가에 그가 기억하지 못하는 주름이 생겨 있었고, 입가의 선은 조금 더 낯설게 굳어 있었다. 그는 그제야 알았다. 민우가 되돌아온 순간의 대가가 자신에게서만 빠져나간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아내의 기억이 또 한 겹 바뀌고 있었다. 그때부터 아내는 죽은 것이 아니라, 그림 속에서 ‘다르게 살아’왔던 것이다. 그가 바꾼 만큼, 그가 살아남은 만큼. 화가는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거울 속 젊어진 얼굴은 더 이상 축복처럼 보이지 않았다. 오래된 빚의 형태였다.


그날 밤, 그 여자는 결국 민우에게 전화를 걸지 않았고 저장된 번호를 지웠다. 민우는 서서히 그녀의 세계에서 흐려졌다. 그러나 그녀에게 남는 것은 상실만이 아니었다. 어느 날 아침, 그녀는 휴대폰에서 가장 가까운 친구의 이름 하나가 지워져 있는 것을 발견할 것이다. 사진 속에서 늘 옆에 있던 얼굴이 흐려지는 것을 보게 될 것이다. 그리고 어느 순간, 자신의 삶 자체가 그림 속으로 들어가 점점 선명해지고 있음을 느낄 것이다.

이름 없는 화가의 화폭에 그려진 사람들은 마치 살아서 숨 쉬는 것처럼 보였다. 자신이 가장 선명하다고 믿었던 한 문장—

“나는 원래 이런 사람이 아니었어.”

그 말이 더 이상 입에서 나오지 않는 날이 올 것이다. 되찾은 기억의 대가는 사랑이나 추억이 아니라 자기 자신이었다. 그날 이후 인사동 골목 끝의 화실은 조금씩 사라지기 시작했다. 벽이 좁아지고 창문이 줄어들고, 문 앞의 종이 한 장이 어느 날은 붙어 있고 어느 날은 붙어 있지 않았다. 마치 이곳 자체가 ‘기억’처럼 누군가의 선택에 따라 존재했다가 사라지는 것처럼. 그리고 언젠가 누군가가 다시 그 골목을 찾았을 때 그곳에는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을 것이다. 다만 골목 안쪽, 누구도 눈치채지 못하는 아주 작은 문 하나만이 남아 있을지 모른다.


문틈 사이로 보이는 것은 빛이 가장 좋은 오후의 한 장면이었다. 카메라 앵글을 바라보며 웃고 있는 한 남자와 한 여자. 사람들은 그것을 오래된 연인의 사진이라고 부를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 웃음은 살아 있는 얼굴의 웃음이 아니라, 그가 되돌아가기 위해 바꿔온 시간의 표정이었다.


그 그림앞에 서있는 여성이 혼잣말처럼 말했다.

“당신은… 제 인생에 없었던 사람인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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