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ebu Life

세부에서 배운 것은 풍경이 아니라 시간의 간격이었다

모든 것이 바뀌어가고 있는 이 시기에 어떤 능력을 키워야 할까. 대기업이나 전문직 자체가 의미가 없어져가는 시대가 되었다. AI를 활용해 어떤 일을 할 수 있는지를 고민해야 되는 시기다. AI는 활용 능력이 있는 사람이라면 한 사람이 2~3명의 일을 할 수 있는 능력의 한계선을 넘게 만들어준다. 익숙하지 않은 장소에서는 스스로를 설명할 필요가 없다. 누구인지, 무엇을 하는지, 어디로 가야 하는지 말하지 않아도 된다. 그 점이 여행의 시작을 의미 있게 만들어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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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부에서의 숙박은 조금은 독특한 공간에서 시작했다. 잘 갖추어진 원룸형태는 하루에 3,000페소쯤 돈을 준다면 이용을 할 수가 있다. 곳곳을 갈 때마다 사람을 만나면 흔히 Where are you from이라는 질문을 듣는다. 여기에 필자는 I'm a man from Mars라고 답해주었다. 여기에 이어서 Originally from Korea, but today… maybe Mars.라고 말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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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왜 한국에서 이런 서비스가 안착이 되지 않았는지 때론 궁금하기도 했다. 물론 택시를 몰면서 살아가는 사람에게는 위협이 될 수도 있지만 그건 또 다른 기회가 될 수도 있다. 특히 한국인들은 자신이 하던 일만 하려는 관성이 있다. 이는 변화를 거부하게 만들고 스스로를 갇히게 만드는 결과를 만들게 한다. 세부에서의 이동은 목적지를 향해 간다기보다, 그때의 선택에 가까웠다. Grab을 부르면 차가 왔고, 길을 걷다 보면 자연스럽게 다음 장소가 이어졌다. 계획을 세우기보다 조건을 받아들이는 방식의 이동이었다. 가끔씩은 오토바이도 타기도 했다. 어디를 꼭 봐야 한다는 생각이 줄어들자, 이동은 소비가 아니라 관찰이 되었다. 같은 길을 다시 지나도 전혀 다른 장면처럼 느껴졌다. 여행에서의 ‘목적지’라는 말은 어쩌면 잘 어울리지 않는 표현일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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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부에서 가장 많은 대화를 한 여성의 이름은 안나였다. 28살의 그녀는 웃음이 자연스럽게 나오는 사람이었는데 특히 필리핀 사람들은 웃음과 미소가 정말 자연스럽다는 인상을 받았다. 깊은 대화를 하지는 못했지만 술에 대한 이야기를 좀 할 수가 있었다. 보통 접할 수 있는 술의 맛이라던가 그 속에 담긴 의미 같은 것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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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리핀의 대표적인 술의 이름은 탄두아이다. 올해의 모델로 Andrea Brillantes가 발탁되었다고 한다. 브랜드 행사에서 공개되었고, 그녀의 커리어에서 중요한 전환점이 되는 프로젝트로 소개되기도 했다. 사실 이 모델이 누군지도 모르지만 AI는 정확하게 알고 있었다. 미래에는 질문을 잘 던지는 사람이 할 수 있는 역할이 더 많아지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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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anduay는 1854년, 스페인 식민지 시절의 마닐라에서 설립되었다. 당시 필리핀은 사탕수수 재배가 활발했고, 이를 이용한 증류주 생산이 자연스럽게 발전하게 된다. “Tanduay”라는 이름은 마닐라 지역의 지명에서 유래했으며 초창기에는 스페인식 증류기술과 필리핀의 사탕수수 원료가 결합된 식민지형 럼 산업이었다. Tanduay는 1980년대부터 매년 유명 배우·모델을 선정하는 Calendar Girl 전통을 유지해오고 있다. 카리브 럼이 “해적과 항해의 술”이라면 Tanduay는 열대 노동과 도시 성장의 술에 가깝다. 영화 캐러비안의 해적에서 존 스패로우가 마시던 술은 카리브 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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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리핀의 골목 속으로 들어가 보면 필리핀 사람들의 삶이 고스란히 드러난다. 이런 곳에서 한국인을 만나기란 상당히 어렵다. 이쁘고 아름다운 바다라던가 현대화된 공간이 아니면 한국인들은 가지 않아서 그런지 필자가 가면 유심히 살펴본다. 필리핀의 곳곳에서는 **필리핀의 이동식 놀이장(perya, 페리아)**에서 흔히 볼 수 있는 **“Color Game(컬러 게임)”**이라고 불리는 전통 도박형 놀이를 즐기는 것을 볼 수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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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게임은 카드 문양 같은 여러 개의 그림 칸이 반복되어 있고 사람들이 동전이나 지폐를 특정 칸 위에 올려 베팅하고 중앙에서 진행자가 카드/주사위/토큰을 뽑아 결과를 결정하게 된다. 사람들의 표정은 즐기는 것 같기도 하고 무언가 기대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현지식 스트레이트 겜블이라고 보면 된다. AI가 빠르게 확산되고, 기존의 직업과 역할들이 재편되는 지금의 시대 역시 하나의 거대한 판 위에 올라와 있는 느낌이다. 과거에는 정해진 길을 따라가는 것이 안정이었지만, 이제는 그 길 자체가 사라지고 있다. 대신 질문을 던지고, 도구를 활용하고, 스스로 방향을 설정하는 사람이 더 많은 선택지를 가지게 된다. 기술은 정답을 주지 않는다. 다만 더 많은 가능성을 동시에 보여줄 뿐이다. 그 가능성 중 무엇을 선택할지는 여전히 사람의 몫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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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부에서의 시간은 그 사실을 조용히 보여주고 있었다. 계획을 세우지 않아도 하루는 흘러갔고, 거창한 목표가 없어도 이동은 계속되었다. 사람들과의 짧은 대화, 길 위에서의 우연한 선택, 익숙하지 않은 풍경 속에서 느끼는 작은 자유가 오히려 더 선명하게 남았다. 설명하지 않아도 되는 상태, 규정되지 않아도 되는 시간 속에서 스스로를 다시 바라볼 수 있었기 때문이다.


어쩌면 앞으로 필요한 능력은 새로운 기술 자체가 아니라, 낯선 환경을 받아들이는 태도일지도 모른다. 정해진 역할을 지키는 능력보다, 변화하는 조건 속에서 스스로 의미를 만들어내는 힘. 빠르게 답을 찾는 능력보다, 무엇을 물어야 하는지를 아는 감각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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