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업도시에서 생태공간으로

옛 철길을 산책로가 되고 항구는 풍경이 되는 기억의 공간 서천 장항

과거의 철길과 지금의 철길은 다르다. KTX가 다니는 철길은 머무는 곳이 아니라 이어지는 곳이지만 과거의 철길은 공간과 공간을 연결하면서도 머무르는 공간들을 만들어냈었다. 이제 그 철길이 있었던 서천군 장항으로 떠나본다. 장항이라는 곳은 관광이나 생태와는 거리가 멀던 곳으로 일을 하는 사람들을 위한 도시였다. 일제강점기 미곡 수탈과 항만 물류, 철도, 제련 산업으로 성장했던 곳이었고 그래서 도시의 구조 자체가 항구–철도–공장–주거지라는 전형적인 근대 산업도시의 형태를 가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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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시탐험역인 장항역을 비롯하여 기벌포 복합문화센터도 자리해서 이제 문화를 향유할 수 있는 공간으로 바뀌어가고 있는 장항이다. 아직은 풍부한 문화를 만끽할 수는 없지만 향후 기벌포복합문화센터는 세미나·강연·기념식 등 다양한 문화행사 유치가 이어질 계획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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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합문화센터에 이름을 붙인 기벌포는 676년(문무왕 16)에 신라와 당나라 사이에 전투가 벌어져 신라가 승리하여 당나라 세력을 물리쳤으며, 신라와 당나라 연합군이 백제를 공격하여 멸망시켰던 곳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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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걸어서 장항의 중심공간을 돌아본다. 지금 장항이 흥미로운 이유는 이 산업의 기능이 약해진 자리에 관광시설을 억지로 넣은 것이 아니라 옛 철길은 산책로로 만들고 송림은 치유의 숲이 되고 항구는 풍경이 되고 근대 건물은 기억의 장소가 되는 방식으로 조성을 했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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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항 도시탐험역이라는 이름에서 느껴지듯이 장항이라는 도시를 탐험하기 위한 공간으로 활용을 하고 있다. 과거 물자를 실어 나르던 산업 인프라는 속도를 위해 만들었던 길이 가장 느린 길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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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대 산업도시의 구조를 가진 장항은 변한 것이 아니라 더 이상 서두르지 않아도 되는 도시가 되었는지도 모른다. 기능의 쇠퇴는 공간의 재해석으로 재개발이 아니라 시간의 전환을 추진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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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길을 중심으로 장항도시ㅏㅁ험역, 장항의 집, 도선장, 서천군문화예술창작공간, 서천군미디어센터, 기벌포 영화관, 기벌포복합문화센터, 아우름스테이등이 빼곡하게 자리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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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찻길이라는 이름을 사용한 미술작품도 있다. 에두아르 마네의 기찻길은 파리를 향한 시선이 담겨 있었다. 르누아르, 모네, 세잔 등과 마네가 구분되는 가장 큰 지점은 이와 같이 그가 풍경화보다는 도시적 풍경과 인물에 관심을 가졌다는 데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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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네는 풍경화를 그렸던 잠깐의 시기를 제외하고 줄곧 인물과 시대상을 화폭 안에 담고자 했다. 당시 파리에서 가장 크고 분주했던 생라자르역을 배경으로 그린 작품이 기찻길이다. 장항의 철길을 따라 걷다 보면, 더 이상 기차가 다니지 않는 선로가 도시의 방향을 바꾸고 있다는 것을 자연스럽게 느끼게 된다. 한때는 물자를 실어 나르기 위해 쉼 없이 움직이던 길이었지만, 지금은 사람의 발걸음을 받아들이는 산책로가 되어 있다. 속도를 위해 만들어진 기반시설이 오히려 머무름을 위한 공간으로 전환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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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항은 바다가 바로 지근거리에 있어서 이곳에서 머문다면 바다를 가까운 곳에서 감상할 수가 있다. 철길 끝자락에서 시선을 조금만 돌리면 곧바로 바다가 펼쳐진다. 장항의 바다는 거대한 관광지의 풍경이라기보다, 오랫동안 항구의 역할을 해왔던 생활의 바다에 가깝다. 파도가 특별히 화려하지 않아도, 그 앞에 서 있으면 이 도시가 산업과 물류, 노동의 시간을 지나 지금의 고요한 단계로 들어왔다는 것을 실감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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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시 곳곳에 남아 있는 근대 건축과 산업의 흔적들은 단순한 옛 시설이 아니라, 장항이라는 도시가 어떤 방식으로 성장했고 또 어떻게 방향을 바꾸고 있는지를 보여주는 일종의 기록물에 가깝다. 새롭게 지어진 건물들보다 이러한 시간의 흔적들이 오히려 도시의 성격을 더 분명하게 드러내고 있다. 장항은 과거를 지우고 새로운 이미지를 덧씌우기보다는, 남겨진 구조 위에 다른 기능을 얹는 방식을 선택하고 있는 셈이다.


어쩌면 장항은 새롭게 만들어진 도시가 아니라, 역할을 다한 기능 위에 또 다른 시간을 덧입히고 있는 도시일지도 모른다. 기차가 떠난 자리에서 사람이 걷기 시작했고, 일하던 공간에서 머무는 공간으로 성격이 바뀌었다. 그렇게 장항은 과거의 산업도시라는 기억을 간직한 채, 지금은 천천히 머물러 볼 수 있는 도시로 변화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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