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의 초입에 방문해 본 황산성에서 생각한 ‘마지막’의 의미
서기 660년 8월 20일은 백제의 패배를 넘어, 한 체제가 멈춘 날이었다. 사비에 도읍을 둔 백제는 이미 기울고 있었다. 김유신의 군대는 주요 산성을 지나 전격적으로 부여로 향했고 황산성이 자리한 논산은 마지막 방어선이 되었다. 논산을 체험하는 공간 백제역사박물관의 주역이기도 한 계백은 5,000명의 결사대를 이끌고 황산벌로 나갔다.
상대는 5만의 신라군에게 승산은 거의 없었다. 그럼에도 그는 싸웠다. 황산성에 올라 바라본 벌판은 지금은 고요하기만 하다. 그러나 그날은 달랐을 것이다. 먼지와 함성, 그리고 피로 물들었던 자리에는 지금은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평야가 펼쳐져 있다.
오래간만에 논산의 황산성을 방문해 보았다. 황산성까지 가는 길은 생각보다 오랜 시간을 올라가야 한다. 그날의 마지막을 지켜봤을 황산성을 지나간 신라로 인해 왕조는 무너졌다. 의자왕은 항복했고 백제는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성벽은 많이 허물어졌지만 지금도 황산성은 남아 있다. 마지막은 언제나 조용히 온다 겨울이어서 그런지 몰라도 황산성의 모습이 더욱더 잘 드러난다. 황산성의 흙을 다져 쌓은 판축 토성처럼 패배를 알면서도 선택하는 순간 계백은 승리를 기대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싸움을 선택했다. 이 장면은 단순한 영웅담을 넘어 ‘불리함 속에서도 무엇을 선택할 것인가’라는 질문을 던지고 있다.
황산성 그리고 논산의 황산벌은 그 질문이 남겨진 자리다. 시스템은 무너져도 흔적은 남아 있다 남아 잇는 황산성의 안쪽에 샘물도 마르지 않았다. 현대 사회는 빠르게 변한다. 기술은 하루가 다르게 진화하고 산업은 사라졌다가 새로 생겨난다. 어쩌면 지금 우리가 서 있는 자리도 미래에서 보면 하나의 ‘마지막’ 일지 모른다.
황산성 위에 서면 논산 시내가 내려다보인다. 과거와 현재가 겹쳐 보이는 곳이다. 그날 결사대가 내려다보았을 평야와 지금 우리가 보는 풍경은 크게 다르지 않다. 성 아래에서부터 이어지는 길을 따라 오르면 경사가 아주 가파르지는 않지만, 걸음을 옮길수록 숨이 조금씩 차오른다. 아마도 계백의 군사들도 이 길 어딘가를 지나며 긴장 속에 숨을 골랐을 것이다.
지금은 흙길과 나무가 만든 그늘이 이어져 있어 천천히 걷기에 좋다. 발밑에서 낙엽이 부서지는 소리와 바람에 흔들리는 가지의 마찰음이 조용히 귀에 들어온다. 둘레를 따라 걷다 보면 길은 크게 어렵지 않게 이어진다. 인위적으로 꾸며진 탐방로라기보다, 오래전부터 사람들이 다니며 자연스럽게 만들어진 길처럼 느껴진다. 그래서인지 걷는 동안 ‘어디를 봐야 할지’ 고민하지 않아도 된다. 그저 걷는 행위 자체가 이곳에서는 가장 중요한 경험이 된다.
황산성 능선을 따라 걸으며 시선을 들면 멀리 평야가 펼쳐진다. 바로 황산벌이다. 오늘날에는 평온한 농경지와 마을 풍경이 이어지지만, 이곳이 한때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던 장소라는 사실을 떠올리면 묘한 대비가 느껴진다. 걷는 동안 과거와 현재가 한 화면에 겹쳐지는 듯한 순간을 만나게 된다.
이 산길은 특별한 볼거리를 내세우지 않지만 시간이 느리게 흐르는 경험을 남긴다. 현대의 도시에서는 목적지가 분명해야 움직이게 되지만, 황산성 주변의 길에서는 ‘어디에 도착하는가’보다 ‘어떻게 걷는가’가 더 중요해진다.
황산성에서의 산책은 단순한 등산이 아니라, 시간을 따라 걷는 일에 가깝다. 역사를 이해하기 위해 애쓰지 않아도 된다. 발걸음을 옮기다 보면 자연스럽게 이곳이 품고 있는 시간의 무게를 느끼게 된다. 황산성을 찾는다면 성벽만 보고 내려오기보다는, 주변 능선을 따라 천천히 한 바퀴 걸어보는 것을 권해본다. 전투의 기억보다 오래 남는 것은, 의외로 그날의 바람과 길의 감촉일지도 모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