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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주하 Jun 19. 2024

도망친 곳에 낙원은 없다.


나는 어리석고 나약했던 과거의 내가 뼈저리게 미웠다. 미워서 견딜 수가 없었다. 왜 마음이 약해져서 엄마에게 주소를 알려줬지? 다른 가족들에게 절대 알리지 않기로 약속해두고서 다짜고짜 어느날, 갑자기 문을 두드리며 방문한 큰오빠 일을 생각해보면, 그때 바로 달아나지 않고 미적거린 내가 더 증오스러워서 견딜 수가 없었다. 그때 큰오빠가 이것저것 많은 걸 해줘서 기뻤지. 청소를 해주고 환기를 해주고 마트에 가서 맛있는 걸 잔뜩 사다줘서 정말로 기뻤지. 그래서 마음이 약해졌었지. 그리고? 

그런 나날들이 지나고. 엄마에게 내가 연락을 하지 않을 때. 엄마가 보복성으로 언니를 내게 데려올 것이라는 걸 몰랐나? 멍청하게도. 엄마를 믿었나? 그렇게까지 할 줄은 몰랐던가?

알고는 있어. 엄마가 홀로 오기에 수원은 낯선 곳이었고 그렇기에 같이 가줄 사람이 필요한데 오빠들이 그렇게 해줄리 없으니 한다면 언니라는 걸. 하지만. 언니잖아.

내가 절대 언니에게만은 알리지 말라고 했었는데.

나는 나락으로 쳐박혔다. 매일 밤 언니에 대해 생각하고 토하려고 변기를 붙잡다가 돌아가면서 하염없이 침대에 누워 천장만을 바라봤다.

그러는 동안에도 시간은 흘렀고 나는 미쳐버렸다. 신경이 과민해졌고 계속 현관을 지나가는 작은 인기척에도 놀랐다. 계속 집들을 알아보고 이사를 준비했다.

하지만 그 많은 짐들을 어떻게 옮겨야 하는지는 몰랐다. 그러나 하루라도 빨리 이동해야 했다. 

그 주변으로 이사를 한다면 비교적 이사가 편리하기는 하겠지만, 언니의 집념을 아는 나는 두려웠다. 분명히 그 근방 3km 인근은 죄다 죽치고 기다릴 수 있는 사람들이었다. 그들 각자의 인생이 있으니 그렇게까진 하지 않겠지, 라는 생각 따위로 안심할 수 없었다. 그래서 나는 계속 알아봤다. 그러다가 치안이 안 좋은 대신에 집값이 싼 곳을 찾았다. 

여러가지 일이 있었지만 간략하게 말하자면 나는 혼자서 여러번 캐리어를 들고 나르며 이사를 했고 그 과정 중에 허리를 크게 삐였다. 하지만 그래도 이사를 마쳤다.

그 겨울에 나는 이사를 홀로 마쳤다. 부동산 업자의 농락으로 그동안 악착같이 모은, 지금 생각해보면 하찮기 짝이 없는 180만원을 잃을 뻔 했다가 겨우 되찾았다. 

이사를 하며 TV가 없던 집이었는데 계약서상에는 TV가 있었다며 옛 집주인이 화를 내며 전화를 해서 돈을 그대로 송금해줬다. 그 뒤로 계약서를 엄청나게 꼼꼼히 봤다.

분명히 TV가 없다고 말을 했는데 나중에 수정하자고 하더니 그 뒤로도 일을 미루다가, 결국 내가 이사를 하고 나서 그 말을 해서 어이가 없었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텅 빈 집에서 나는 이제 뭘 하지? 모르겠어. 나는 아무것도 못하겠어. 라며 좌절했다. 

내 취향으로 완벽하게 꾸몄던 작은 자취방. 4시간을 자도 행복하던 순간들. 다시 봐도 즐거웠던 탐구 책들. 어떻게든 되어가고 있다는 감각이 나를 정말로 설레고 기쁘게 했었는데.

전부 망했다. 내가 나약한 인간이라서. 진즉 처리해야 했을 문제를 방치하고 외면한 대가로 나는 내 가장 즐거운 순간에, 내가 다시 태어나고 있던 그 순간을 망쳐버렸다. 

다시 무언가를 하려고 해도 의욕이 생기지 않았다. 그때도 통화하던 친구가 말해줬다. 그럼 쉬어보는 건 어때? 그 친구의 최선을 조언이었을 테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런 말에 휘둘리지 말고 최선을 다해서 살라고 윽박지르고 싶다만. 그때 당시 코로나 면봉 공장에서 일을 했지만 얼마 하지 않고 그만뒀었다. 공장에서 친해진 사람은 불륜을 저지르는 사람이었고 그걸 스스로 말했다가 이해받지 못하자 나에게 공격적으로 굴고, 다른 사람들 눈치가 보여서 애매하게 굴다가 그만뒀다. 나는 그 공장에서 더 버티고 남아 있고 싶지 않았다. 생리통이 너무 심한 날, 나는 조퇴를 하고 그 길로 다시 공장에 가지 않았다. 더는 생리통에도 참아가며 일을 할 동기따위는 없었다. 

완전히 지치고 절망해버린 내게 친구는 어떻게든 행복을 주고 싶어했다. 모아둔 돈도 써가면서 조금씩 쉬어보라고 했다. 날 행복하게 해주기 위해서 최선을 다한 말이라는 건 안다. 다만 아직도 나는 내가 그렇게 돈을 쓰며 소비하기만 했던 날들이 정말로 내게 최선이었는지는 확신할 수 없었다. 다만 그 당시에 나는... 그때에 나는... 

그 뒤로는 모호한 시간들이 흘러갔다. 당시 새해가 되어 스물둘이 되었던 나는 아직도 내가 한참 어리게만 느껴졌다. 엄청나게 늦었다는 감각이 들고 초조했지만 사람들이 전부 내게 어리다고 하는 말을 믿어보려 애를 썼다. 한두해 정도는 날려도 된다는 말을 믿었다. 그렇게 나는 내 스물 두살의 시기를 버렸다. 시간을 버렸다. 히키코모리처럼 지냈고, 밖으로 나간 건 친구가 일방적으로 내 연락을 피한 시기에, 나에 대한 절망을 막을 길이 없어서 올리브영 물류센터를 간 일이었다. 거기서도 텃세가 너무 심했고, 견디려던 나는 5일간 버티다가 마지막 날 친구와 연락이 닿아서 그 일을 그만두기로 했다. 

노트북 화면은 박살이 나 있었고 나는 노트북을 새로 샀다. 그 시기에 나는 계속 인터넷 세상에서 살았다. 글을 쓰고 사람들과 떠들고 게임을 구경하고 글을 쓰고 사람들과 떠들고 게임을 구경하고 글을 쓰고 사람들과 떠들고. 그런 짓들만 반복하면서 살았다. 배달음식을 하도 자주 시켜서 그 근방에서 내가 먹지 않은 배달집이 드물 지경이었고, 친구와 연락이 닿은 뒤로는 3주간 완전히 탈진해서인지 침대에서 조금도 벗어나지 못했다. 일주일에 한번씩만 친구와 통화할 여력이 생겼고, 그 외에는 계속 침대에 누워서 소설을 읽거나 했다. 노트북이 박살난 뒤로는 노트북을 켜서 글을 쓸 일도 없어졌고, 노트북이라는 너무 비싸고 무서운 존재를 내가 다시 마련할 수 있을리가 없다고, 내 스스로 살 수 있을리가 없다고 생각해서 공포에 떨었다. 나는 결국 무력하고 무능했다. 아무것도 제대로 할 수가 없었고 그런 내가 너무 끔찍이도 싫었다. 액정을 사서 교환하면 된다는데 교환을 어떻게 해야하는지도 모르고 그렇다고 수리를 맡기자니 수리 기사가 꼭 내 집에 들어와서 수리를 해야한다고 우겼다. 게다가 가격도 비쌌다. 나는 내 집에 타인을 들이는게 너무 끔찍이도 싫었고 내 노트북을 수리하기 위해서 매장을 방문해서 물건을 맡기는 것이 아니라, 수리 기사가 기어코 집에 들어와서 내 노트북을 봐야한다는 사실이 너무 납득도 되지 않고 스트레스를 받았다. 하지만 내가 맡길 수 있는 근방의 수리점은 그곳 뿐이엇다. 

그때는 여름이었다. 어느날 창문이 열리고 아저씨들이 벽에 걸려 있었다. 나는 그 사람에게 "지금 뭣 하시는거에요?" 라고 소리내어 물었고 상대는 답하지 않았다. "지금 뭐 하시는 거냐고요." 다시 물었고 그는 대답이 없었다. 그러고 나서 다시 창문이 닫혔다. 나는 다시 누웠고 따질 의향도 없었다. 다만 나를 존재하지도 않는 사람 취급하던 그 인부가 오래 생각이 났다. 그는 창문을 잘 닫고 갔고, 내가 어설프게 겉창만 닫아뒀던 것을 속창까지 꼼꼼히 잘 닫아두고 갔다. 아마 그 사람은 나를 보고 귀신인가 싶지 않았을까. 어두운 방안, 쓰레기가 가득한 방안에, 침대에 누워만 있던 여자가 일어나 힘없이 그에게 묻는다. 지금 뭣하시는 거에요? 그리고 그는 답하지 않는다. 규격외의 인간은 투명인간 취급받는 사회답게, 내 집 창문을 누군가 열고 뭔가 작업을 해도 나는 질문을 하고 의문을 품어도 답을 들을 수가 없는 것이었다. 

처음부터 그러지는 않았다. 친구의 말을 듣고 나는 돈을 쓰기 시작했고 원하던 걸 해보려고 했고. 그러면서 내가 책상에 앉으면 눈물부터 나는 이유는 끔찍하게 아픈 목과 허리의 통증이 날이 갈수록 더해지기 때문이라는 말을 했고 친구는 병원에 가보는게 어떻겠냐고 했고 나는 병원에 갔고 1회 7만원의 비용을 지불했고. 

아니다. 정확한 시기를 따지기 힘들다. 때는 3월. 나는 아주 완벽하다고 생각했었다. 모든 건 회복되어가고 나는 결국 다시 잘 살아갈 수 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 생각은 무너졌다. 한밤중에 누군가 문을 두드렸다. 쿵쿵쿵. 착각이 아니었다. 그건 언니와 엄마였다. 주소를 알려주지 않았는데 그들이 기어코 날 찾아온 것이었다. 

그 뒤로 무력감에 시달렸다. 그들을 보며 토를 하고 싶어서 스트레스에 변기를 붙들고 구역질을 해대면서 나가라고 소리를 쳤는데 그들은 나가지 않았다. 재 왜 저래? 라는 말을 했었다.

저러다 병원 가야 하는 거 아니야? 라는 말을 덤덤하게 하는 그들을 보고 나는 스트레스가 극에 달했다. 아니, 뭐. 언니는 나를 보며 울면서 엄마를 끌고 나가려고 했던 것 같기도 하다. 

다만 내가 이상하게도 토를 하고 싶은데 토가 나오지 않고. 그들을 밀치고 화내고 싶은데 힘이 풀려서 바닥에 주저앉은 것이 기억이 난다. 

나는 그들이 증오스러웠다. 끔찍했다. 달아나려고 해도 달아날 수 없게 하는 그들이. 괴로웠다. 그렇다고 해서 내 이야기를 들어줄 것도 아니면서. "너는 너무 과거에 얽매여. 언제 벗어날래?" 같은 말 따위를 할 거면서. "나쁜 이야기는 하지 마라. 듣기 싫어. 안 그래도 힘들어." 같은 말을 하면서. 그러면서 내게 계속 과한 압박을 넣을 거면서. 내 인생을 내 몫으로 두지 않고 쥐고 흔들 거면서. 

끔찍했다. 끔찍함의 연속이었다. 뻔뻔함의 연속이었다. 그들은 동사무소에 가서 내 주소를 조회했다고 한다. 병신. 등신. 

전입신고를 왜 쳐해서는. 분명히 이사 전에 행정부에 문의를 했을 때는 가족들이라도 조회할 수 없다고 했었다. 그런데 시발. 

그들은 물었고 동사무소 직원은 알려줬다. 뻔했다. 그게 위법이든 아니든 귀찮게 하는 민원인을 빨리 쫓아내려는 수작이었겠지. 

나는 너무 법을 믿었고 나중에 알아보니 그 직원이 끝까지 말해주지 않더라도 경찰서로 가면 쉽게 조회할 수 있다고 한다. 직계가족은 가능하다고 한다. 

행정과 법의 불일치라고 한다. 생각보다 그런 사례들이 흔하다고 한다. 

1회 7만원의 도수 치료를 엄마는 받지 말라고 했다. 내가 너무 허리와 목이 아프다고 하자, "나도 아파!"라며 성을 냈다.

그도 그럴만했다. 내 생활비를 집에서 대주고 있었으니까. 나는 완전히 가족들을 미워할 수도 끊어낼 수도 없었다. 

나는 돈이 없었고 경제력이 없었고 그 빈틈을 집에서 메꿔주고 있었다. 

내가 성실하고 착한 딸일 때는 0원의 용돈을 받아서 장학금과 세뱃돈으로 1년을 메꿔야 했고,

내가 대학에 오고 장학금을 받지 못해 정말로 생활비를 받지 못하자 한심하게 보다가 결국 기나긴 설득 끝에 월 30만원을 받을 수 있었는데.

내가 가족들과 연을 끊기로 다짐하고 잠수를 타자 월 70만원이라는 막대한 돈을 내게 주고 있었다. 

돈이 없는 게 아니라 울지 않는 아이에게 주지 않는 것이었다.

그 신선한 충격이란. 인강을 결제하지 못해서 열등감에 시달린 채로 공부하던 내 지난 날들. 옷은 커녕 음료수 사 먹을 돈 하나 없어서 비웃음을 당하고 고립되었던 캠프 생활. 

취향이랄 게 없어서 계속 공짜인 도서관 책들만 붙들고 앉아 있는데 그마저도 신간은 없어서 갈수록 고루한 사람 취급받는 내 자신이 진절머리나게 싫었지만 어떻게든 죽을 수는 없어 참아야 했던 날들.

그 모든 것들이 무의미했다. 월 30만원으로 어떻게든 새 옷을 사고 교재를 사고 공부를 하고 밥을 사먹어야 해서 매일 하루에 2시간씩 가계부를 붙들고 설계를 하고 이모저도 한달 생활비를 궁리했던 날들이 전부무의미하게 느껴졌다. 

무엇을 위해서?

무엇을 위해서 있던 돈을, 지원해줄 수 있던 돈을 그리 꽁꽁 숨겨뒀다가. 

나는 정말로 죽고 싶은 날들이 많았고, 그럼에도 꾸역꾸역 참았고, 그러다가 병이 났고, 계속 차도에 뛰어들거나 12층의 건물에서 뛰어내리려는 내가 공포스럽고 절망스러워서 견딜 수가 없었는데.

내 옷차림이 거지같고 한심해서 계속 비웃는 사람들 사이에서 어떻게든 새 옷을 찾고 물려받은 옷들 중 너무 헌 옷들을 버리면서도 물려준 사람이 뒤늦게, 내 옷 어딨어. 왜 네 맘대로 버려! 라고 윽박지를까봐 두려워했는데. 싸구려 옷을 샀다가 그런데서 옷을 사는 사람도 있냐며 비웃음을 당했는데. 남들이 다 하는 여행이나 친구와 걱정없이 노는 것들도. 술을 마음껏 마시는 것도, 그런 것들로 친목을 다지고 어울려다니는 사람들과 결코 어울릴 수 없던. 인쇄비가 아까워서 덜덜 떨던. 자료를 죄다 pdf로 주는 수업들과. 밥 사먹을 돈이 없는 주제에 그게 들통나는 게 싫어서 다이어트라고 둘러대면서 요거트로 식사를 뗴우고. 

그런 날들은 다 무엇을 위해서 있던 걸까? 그러면서, 그렇게 굴거면서 왜 그때 알바를 하지 말라고 그렇게 날뛰었던 걸까? 그 작은 돈으로 어떻게든 일은 하지 않고 공부만 하라고, 공부만 하면 장학금만 받으면 네가 그렇게 쪼들릴 필요도 없다고 압박하면서.

그건 나를 괴롭히는 것 이외에 대체 무슨 의미가 있던 걸까?

내가 화장을 과하게 해서, 혹은 하지 않아서. 내가 옷차림이 좋지 않아서, 혹은 너무 부조화스러워서. 내가 남들과 달라서. 촌스러워서. 만만해보여서. 혹은 무슨 이유로든 간에. 비웃음당하고 험담당하고 저격당하고 놀림당하고 교수 조교 학생 가릴 것 없이 한번씩은 나를 정말로 미워하고 죽이고 싶어하는 것만 같은 사람들 속에서 버티는 것만으로도 괴로운데. 거기에서 공부를 완벽하게 해내지 못한 네 탓이니 그 벌로 월 30만원으로, 식비 생활비 교재비, 모든 것을 충당하면서 견디라는. 

그런 마음은.

대체 무엇인지. 

내 이야기를 애당초 들을 생각도 안했으니 그저 옛날 대학생들처럼 머리 질끈 묶고 공부만 하면 되지 왜 못해, 라고 생각했을 것이 뻔했다.

머리 질끈 묶고 공부하려는데 그 도서관에서도 비웃음당하고 시선을 느끼는데 어떻게 공부를 해? 나를 빼고 필요한 정보들을 저들끼리 공유하는데 내가 어떻게 해?

그럼에도 해보려고 하는데 조교든 교수든 얘처럼 정신 못차리고 살면 안되냐고 저격을 하는데 어떻게 견뎌? 그런 와중에 . 

나는 죽을 것 같은데 남들은 그때 당시의 나를 보고 씩씩하다고 생각했다고 하고 어떻게든 뭔가 오래 버틸 것 같았다고 하는데 나는 정작 그날들에서 매일매일 하루마다 아침마다 그저 뛰어내리고 싶은 나 자신을 타이르고 말리느라 진이 다 빠지고. 휴학을 하겠다고 말하려고 했는데 말할 수 없고 작은 오빠에게 사과를 듣고 싶었는데 문이 굳게 닫혀있었고 나는 정말로 그때에 마을 저수지에 가서 뛰어내려 죽을 생각이었는데 죽고 싶지 않아서 나왔고 나를 찾겠다는 그런 허황된 일보다는 사실 내가 죽지 않았으면 좋겠어서 발악하는 마음으로 벗어난 거고 그래서 서울에서 벗어나 멀리 수원까지 와서 나를 못찾게 한 다음에 가족과 연락을 끊으려고 했는데 마음이 약해져서 연락을 했고 그랬는데 교통사고가 난 다음날에 엄마는 내가 자기 딸이 아니니 네 맘대로 살라고 하고 주소지를 절대 다른 사람에게 알려주지 말라고 했는데 다 알려주고 큰오빠가 불쑥 찾아오고. 내가. 

뭘 더 어떻게 해야해? 라는 생각으로 가득 찼는데 내가 다 포기하고 연락을 죄다 끊어버리고 주소지를 옮기니까 그제야 말이 통하나 싶다가. 

이거 해. 이거 하지 말아 복학해. 복학해서 A+만 받아. 같은 말도 안되는 말들만 계속 이어나가서 나는 정말로 미쳐버릴 지경이었고.

내 유일한 숨통은 그 고향 친구였는데. 그 친구와 다시 연락이 되자 엄청나게 힘이 풀려서는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그 일들은 내가 쿠팡으로 무작정 새로운 노트북을 구매하고 나서 풀렸다. 그 전의 노트북은 구매하면서 너무 많이 큰 부담을 가졌었다. 나 혼자 노트북을 멀쩡히 살 리 없다며 작은 오빠가 대신 찾아주게 되었는데 내가 감히 찾아주겠다는 사람에게 제깍제깍 오지 않아서 나는 "너같은 앰창 인생 평생 그따위로 살아라"라는 말을 들었었다. 사과하라고 울면서 찾아갔지만 작은 오빠는 사과하지 않았다. 아니, 성의 없이 어, 미안ㅋ이런 식으로 사과를 했던가. 아마 그에게 나는 계속 병신이었을 것이다. 그렇게 대해도 되는 병신.

아니, 가족들 모두에게 나는 병신이었다. 쳐맞고 물건을 내다버리고 개처럼 굴려도 아무 말 없는 병신. 쳐맞아놓고서 때린 사람에게 무릎꿇고 미안하다고 사과하는 병신. 

나는 그렇게 대해도 되는 병신이었다. 내 말은 아무도 듣지 않았다. 그래서 나는 미쳤다. 

노트북을 사고. 나는 소설을 썼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결국 내 생활의 중심에는 소설이 있었다. 다만 나는 나에 대한 이야기나, 직접 생각한 인물에 대한 이야기는 한글자도 쓰지 못했다. 

중하교 시절 열광한 패러디 소설처럼, 나는 가상의 인물들을 내세워서야 겨우 글을 쓸 수 있었다. 그렇게라도 해서 보장된 독자를 얻고 싶었다. 그리고 독자들은 나처럼 글을 못 쓰고 느리게 성장하는 사람의 글 같은 것도 봐줬다. 하지만 한번도 폭발적인 인기를 누린 적은 없었다. 나중에서 뭔가 그런 기회가 왔다가, 곧장 모두 삭제해버렸다. 

나는. 

내가 말할 수 없는 것들에 대해서 자주 글을 썼다. 내가 느끼지만 도저히 표현할 수 없는 것들에 대해서 글을 썼다. 함부로 말할 수 없는 것들에 대해서 열중하여 글을 썼고, 사람들이 그 글을 읽고 그 인물의 감정을 이해해주면 내 감정을 이해해주는 것 같았다. 아주 많은 글을 썼다. 그런 글들을 쓰면서 나는 점점 해방됨을 느꼈다. 나는 글쓰기로 나를 행복하게 하고 있었다. 내 삶의 가장 큰 기쁨이 글이었고 그 외엔 전혀 없었다. 

그렇다고 해서 그 당시에 내가 건강했던 건 아니었다. 여전히 나는 툭하면 끙끙 앓으면서 과거에 매몰되었다. 폭력적인 장면이 영화에서 나오면 벌벌 떨었다. 

누군가 손을 들면 나를 때릴 것 같아서 크게 움찔했다. 소개팅을 나가면 "눈치 안 봐도 돼요."라는 말을 매번 들었다. 그만큼 나는 일상적으로 경계하고 두려워하는 인간이었다. 

그랬던 내가 갱스터 드라마에 빠져서 계속해서 그것을 봤다. 그게 굉장히 폭력적이고 날 괴롭게 하는데도 계속 봤다. 무언가에 홀린 것 같았다. 담배를 피고 술을 마시면서 봤다. 담배를 한갑 다 피며 하루가 꼬박 세도록 그것을 봤다. 담배는 그 캡슐에 알러지가 있는지 피고 나면 입천장에 빼곡히 물집이 생기는 담배였는데도 계속 폈다. 나는 그를 다 보고 난 뒤 침대에 누운 직후, 속이 좋지 않아서 변기를 붙잡으며 토를 했다. 토를 했지만 그것에 크게 놀라지 않았다.아주 오래전부터 계속 토를 하고 싶었던 것 같았다. 그래서 토를 하는 내 모습이 기꺼웠다. 드디어, 라는 생각이 들었다. 토를 하고 비틀거리면서 침대에 누우니, 꼭 할머니의 오래된 옷장에 3년은 묵은 나프탈렌 냄새가 가득한 몸빼바지를 입에 물고 있는 것만 같았다. 그러니까 토를 하는 것도 당연하지.나프탈렌은 딱 질색이었으니까. 

그때의 일들은 잘 기억이 나지 않는다. 열심히 살겠다고 다짐했고 엑셀에 생활을 기록하게 됐다. 복학을 했고 또 A+을 받으라는 개소리를 들었다.

그러다가 문득 다 바보같고 날 견딜 수 없어서 자퇴를 결심했다. 그러다가 갑자기 또 알바를 구했다. 알바를 다니면서 점점 더 생활이 안정화됐다. 아마도. 

사실 기억이 잘 나지 않는다. 내가 스물 둘, 스물 셋을 어떻게 보냈는지, 스물 넷은 또 어땠는지. 

더듬어 기억해보자면 스물 둘은 내내 히키코모리로 살았고. 스물 셋에 극단에 들어갔고 대면 강의가 반반으로 시작되었다. 스물 넷에 만화 동아리에 들어갔고 남친과 헤어지고 정신병이 다시 올라와서 견디다 못해 삭발을 했었다. 그런 중에 퀴어동아리도 들어갔다가 회장직을 했다가 반년만에 도망쳐버렸다. 웹소설도 진지하게 시작했다가 그만뒀고 뜨기 시작하던 소설들을 죄다 삭제해버리는 기행을 반복했다.나는 계속해서 누구에게도 읽히지 않는 글을 쓰고 싶은 건가? 라는 의문도 들었다. 간절히 사람들의 반응을 원하면서도 그러는 내가 이해가 되지 않았다. 

문득. 이제는 내게 과거의 그 울음가득한 날들과 심장을 잡고 버거운 숨을 내쉬던 날들의 흔적이 많이 남지 않게 되었는데,

사람들은 묻는다. "왜 아직도 졸업을 하지 않았어요?", "영원히 학교를 다닐 셈인가, 자네는?"

나는 뻐끔거리면서 아무 말도 하지 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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