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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주하 Jun 19. 2024

구원은 없다.


나는 많은 것들을 내 구원점으로 삼았었다. 소설, 그림, 공장, 인맥, 퀴어, 우정, 사랑. 그러나 그 무엇도 나를 진실로 구원할 수는 없었다. 

다만 돈과 커리어. 나를 증명해줄 것들은 그것 뿐이었다. 그렇기에 이제는 정말이지. 타인에게도 꿈이나 학벌에도 진실로 기대는 것이 없다.

막연히 어떤 지역, 나라, 직업이 날 구원해주리란 생각도 하지 않는다. 그림같이 멋진 연인의 등장도 꿈꾸지 않게 되었고, 계속해서 회자될 친구와의 우정도 꿈꾸지 않게 되었다. 

나는 현실에 대해서 배워가고 있는 것이었다. 퍽이나 낭만적이던 순결한 정신이상자던 나는 이제 세상에 찌든 평범한 사람이 되어가고 있다. 

한 개인이 무언가를 극복할 수는 없고 단지 단체에서 어떻게 상황이 흘러가는지 파악하고 기민하게 자신의 실속만을 챙겨야 한다거나.

내가 어떤 사람이든 알고 싶어하지 않고 듣고 싶어하지 않는 사람들이 많으며 그들이 원하는 건 간단한 단죄라던가, 간단한 칭송이라던가. 

삶이라는게 정말로 많이 복잡하고 너무 많은 방향성이 있지만 내 또래, 혹은 후배들. 그리고 심지어 교수님들 나이대조차도 그런 것들은 전혀 고려하고 싶어하지 않는 이들이 생각보다 많다던가.

그렇기에 진실성을 추구하는 자들은 너무 소수이고 서로를 찾기 힘들고. 소수인 사람들은 타인에게 이해받기도 힘들기 때문에 자주 움츠러들고 숨어버리고 그리고 침묵해버린다는 것도. 

그리고 나처럼 인생에 굴곡이 많은 사람들은 보통 대학에 오지 않고 대학에 오더라도 탈락되듯 떨궈져 버린 채로 허덕이며 나락에 쳐박힌다거나. 그런 것들.

그래서 오히려 인생의 굴곡을 말하는 건 약점이 될 수 있고 내가 언제든 떨궈질 나약한 사람이라는 인상을 줄 수 있다는 것도. 혹은 그렇게까지 악바리를 쓰며 노력하는 것을 기이하게 볼 때도 있다는 것.

그리고 서로에게 굴곡을 말하고 서로에게 이해받고 싶어하는 무수히 많은 관계들이 있겠지만 결코 그건 서로에게 구원이 될 수 없고 서로에게 어느 정도 온기를 나눈 다음에는 파탄이 된다는 것을. 

타인이 상처입은 사람이라고 한들 그 사람이 영원토록 좋은 사람이라는 보장은 없는데 정작 당사자는 자신이 영원한 피해자라고 굳건히 믿어서 타인에게 깊은 상처를 주고 가해자가 되는 그 순간에마저도 자기 연민에 빠져서 왜 나를 떠나? 왜 나를 지탄해? 왜 나를 버려? 라고 울어버린다는 것.

나이를 먹어서도 옛 가족의 가해를 말하면서 울며 주저앉으며 타인들에게 광활한 피해를 주며 왜 나를 이해해주지 않아? 라고 소리치는 인간은 생각보다 더 한심해보인다는 것.

폭력적 환경에서 자랐기에 폭력을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사람들이 많다는 것.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모든 일들이 있었음에도 나를 놓지 않고 계속해서 연락을 취하고 금전적으로 지원해주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라는 것. 그것이 정말로 진실되게 나를 위하는 사람들이라는 것. 그것들이 어떤 형태가 되었든 간에 결국에는 나를 위한 사랑이 있었다는 걸 인정하는 것.

나는 내가 가장 증오하던 가족들에게 오히려 정서적 지지를 받고 있었다. 

내가 뭘 하든 사랑해주는 건 그들 뿐이었다. 대다수는 내가 삭발을 하거나 말을 공격적으로 하거나 혹은 울어버리거나 혹은 너무 지쳐 쓰러지거나 하면 비웃거나 한심하게 보거나 냉랭하게 바라보기만 한다. 

그들은 나를 타인으로 규정하고 너무 이해할 수 없는 존재로 규정하고 나를 응시한다. 그 응시가 나는 너무 힘겹다. 그래서 모두 관둬버리기로 다짐했다. 실리 따위는 하나도 챙기지 못하고 꽁지빠지게 달아나버렸다. 

멀어지고 나니 보이는 것들이 있었다. 아 저 사람들은 나를 정말로 미워하고 증오하고 질투했구나. 그래서 정말로 내 인생이 망하기를 아주 간절히 바랬구나. 

아 저 애들은 사실 내 이런점을 정말로 갈망했구나. 그래서 그렇게 화를 냈구나.

얘들은, 쟤들은. 이런 식으로 사람을 분류하다보니 문득 안 것이. 

정말로 나를 이해하고 사랑할 사람 같은 건 허상이구나. 대다수는 나를 아주 증오하거나 멋대로 환상을 품다가 깨지고 나서는 나를 껄끄럽게 여기는구나. 

내가 아무리 열심히 정서적으로 교류하고 지지한다 하더라도 결국 대다수는 제각기의 자신만의 고민에 빠져서 고만고만한 사람들과 연을 이어가는구나.

생각보다 나같은 사람은 정말 없고 나는 오롯이 나 뿐이구나. 그런 생각들.

이제 사람에게도 기대가 없고 막연한 활동에 대해 품는 환상도 없다. 

남은 건 돈, 내게 돈을 줄 명확한 것들, 재산들. 혼자 있는 동안 즐기는 문화들. 그런 것들.

내가 너무 삭막하고 외로운 사람이 되었다는 생각을 하다가도. 나는 결코 진실되게 타인과 결합된 적이 없으니 지금이 오히려 낫다, 같은 생각도 하고.

정말 마음이 맞는 사람들과만 어울려야지, 생각하지만 그런 사람들이 어디있겠냐는 생각, 애당초 마음을 닫고 살면 어디에서 그런 사람을 만나겠냐는 생각 같은 걸 하다가.

문득. 나에 대해 알지 못한다면. 내가 나를 통제하지 못한다면. 내가 내게 약속된 보상을 주지 않는다면. 그 세상 무엇도 즐겁고 온전하지 않을 것이라고. 

개개인이 불행한 관계는 결코 온전할 수도 결코 오래 갈 수도 없다는 생각을 했다. 그래. 결국 구원은 어디에도 없고, 다만 날 꺼내줄 수 있는 건 그저 나 뿐이다.

진흙탕에 쳐박힌 수레바퀴는 내 스스로 꺼내야만 한다. 신의 도움도, 인간이나 사상, 개념과 습관, 술과 담배에서도 찾을 수 없는 진실한 실효적인 대상은.

결국 나 자신 뿐이다. 어린 시절 보았던 그리스 로마 신화의 이야기에서 나는, 수레바퀴가 진흙에 빠진 마차를 이끄는 마부의 기도를 아폴론이 "네가 직접 들거라!"라고 윽박질렀다는 말에서 신을 찾지 말고 스스로 해결하라는, 신이라는 허상된 것을 믿지 말고 현실을 직시하란 말로만 이해했었다. 하지만 이제 보니 그것은 신 뿐이 아니라, 타인, 개념, 사상, 그 모든 외부적인 것들에 기댈 수 없고 그런 것에 기대서도 안된다는 말이었다. 결국 나는 내 인생을 진흙에 쳐박아 둔 것이 무엇이든 간에 스스로 진흙탕에 들어가 팔을 걷어부치고 더러워지고 땀을 뻘뻘 흘리면서 나를 구원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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