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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찬영 Sep 16. 2016

[체험과 저급한 신앙비즈니스]

고린도후서 12:1-13

[체험과 저급한 신앙비즈니스]

여러 계시를 받은 것이 지극히 크므로 너무 자만하지 않게 하시려고 내 육체에 가시 곧 사탄의 사자를 주셨으니 이는 나를 쳐서 너무 자만하지 않게 하려 하심이라_고린도후서 12:1-13중 7절


[묵상]

기독교의 믿음은 말과 이론으로 미처 다 설명할 수 없는 거대한 신비다. 

2000년 전의 예수라 불린 한 사람의 십자가 사건이 나의 죄를 위한 대속의 죽음이라고 믿는 것부터 엄청난 신비 아닌가.

또한 그 일이 시간의 벽을 넘어 믿는 자의 삶을 송두리째 뒤흔들고 삶의 방향과 양식을 완전히 뒤바꾸니 성도의 삶은 신비 그 자체다.


뿐만 아니라 내주 하시는 성령님과의 동행은 성도들 마다 숱한 신비한 체험을 하게 한다.

바울이 잠깐 언급하는 체험은 고린도후서를 저작(AD55-56)하기 14년 전(AD41-42)으로

다메섹 도상에서 신비한 일을 체험한 이후 고향 다소에 가서 은거하며 말씀 묵상 중에 겪은 일이다.


의식이 있는 상황에서 셋째 하늘(하나님과 천사들이 있는 천상)에 이끌려 가 말로 다 형용할 수 없는 계시를 받은 일이다. (2-4절)

*바울의 경험은 무속인이나 일부 신비주의자들의 입신과는 구별된다. 

 세상의 입신은 인간 자신의 노력에 의한 것이나 바울의 그것은 전적으로 하나님 편에서 주도한 것이다. 

 세상의 입신은 의도적이고 계획적이며 따르는 자들의 이목을 끄는 주요한 수단이 되지만 바울의 그것은 단회적이며 부차적인 것이다. 


이 체험으로 말하자면 만약 바울이 세상의 주목을 끌고 인기를 얻고자 한다면 엄청난 레퍼런스가 될 만한 것이다.

인간적인 면에서 보면 효과적인 사역을 위해 적극 활용해야 할 필요가 있어 보이기도 하지만 바울은 단호히 거부한다.


요즘엔 이단적 요소를 갖고 있는 목회자들이 이를 적절히 악용한다.

자신의 신비한 체험을 침소봉대하면서 적극 강조하여 성도들의 마음을 자신에게로 집중시키고 마침내 장악한다.

성도들이 하는 간증도 교묘하게 자신이 영광을 취하는 방식으로 이용될 수 있다.

체험신앙이 교만의 재료로 활용될 수도 있는 것이다.  


바울은 자신이 체험한 일에 대해 계시의 내용 등과 같은 더이상의 자세한 언급을 하지 않고 그만둔다.

그 이유는 누가 자신을 보는 바와 자신에게 듣는 바에 지나치게 생각할까 두려워했기 때문이다. (6절)

그러면서 그는 자신을 위해서는 약한 것들 외에 자랑하지 않겠다고 말한다. (5절)


이어 그가 언급하는 바는 자신의 연약함이다.

이미 외모의 빈약함과 말의 어눌함에 대해서는 수차 언급하였고,

이번엔 자신을 괴롭히고 있는 육신의 연약함에 대해 말한다.

'육체에 가시 곧 사탄의 사자'(7절)로 표현한 그의 육신의 문제는 간질이나 두통, 안질 등으로 추측된다.

아무튼 바울은 이 문제의 해결을 위해 하나님께 정식으로 세 번이나 매달렸던 듯하다. (8절)

그때 들려주신 하나님의 음성,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이는 내 능력이 약한 데서 온전하여짐이라" (9절)


하나님이 바울의 간구에도 불구하고 육신의 가시 문제를 해결해 주지 않은 이유는 다음과 같다.

-바울이 너무 자만하지 않게 하기 위해. (7절)

-바울의 약함 속에 그리스도의 강함이 드러나기 위해. (9절)

사람마다 약점을 갖고 산다. 

약점 중에 내 잘못으로 인한 약점, 고칠 수 있는 단점, 타인에게 해를 줄 수 있는 문제들은 빨리 해결해야 한다. 

그러나 이런 문제가 아닌 애매한 육신의 가시가 있을 수 있다. 

하나님께 그 문제의 해결을 위해 수차례 기도했음에도 여전히 해결되지 않는 문제가 있다.

이런 경우는 바울이 그랬던 것처럼 '도리어 크게 기뻐하며 나의 약한 것들에 대해 자랑'(9절)해야 할 것들이다.

이로 인해 그리스도의 능력이 내게 머물 수 있기 때문이다. (9절b)

이렇게 보면 그리스도의 능력과 대비된 성도의 약함,

그리고 성도가 복음을 위해 받는 능욕, 궁핍, 박해, 곤고는 내가 약한 그 때에 그가 강해지는 것이니 기뻐해야 할 일들이다. (10절)  


육적 삶의 완전한 조건을 위해 기도해야 할 문제가 아니라, 

하나님의 뜻이 나를 통해 온전히 드러나고 있는지 살펴야 할 문제다. 


육신의 조건은 완벽해 보이지만 영혼이 텅 빈 채 생활한 다면 영적인 좀비 아닌가.

타인(성도)을 통제하기 위해 자신의 신비한 체험에 대해 떠벌리는 것은 저급한 비즈니스 아닌가.

바울의 경우에 의하면 불치병도 큰 복이 될 수 있지 않은가.

<같은 본문 다른 묵상 : http://blog.naver.com/zanrong/185646374 (넘어짐의 앞잡이)>


[기도]

주님! 제 연약함이 그리스도의 능력이 될 수 있도록 축복하소서. 

육신의 자랑으로 그리스도의 능력이 제한되지 않도록 도우소서. 

부족한 자의 삶이 오직 구원하신 하나님께만 영광이 되게 하소서. 


[오늘-하루]

*오늘도 나의 약함을 통해 하나님의 강함이 드러나는 하루!

*모든 일이 구원하신 하나님께만 영광이 되는 하루!!


*************

To keep me from becoming conceited because of these surpassingly great revelations, there was given me a thorn in my flesh, a messenger of Satan, to torment me.

又恐怕我因所得的启示甚大,就过於自高,所以有一根刺加在我肉体上,就是撒但的差役要攻击我,免得我过於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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