잊을만하면 기억에서 놓치지 않기 위해 일부러라도 다시 찾는 영화가 있다. <혐오스런 마츠코의 일생>이 나에게 그런 영화다. 리뷰를 쓰기 위해 여러 번 본 것을 제외하고는 3번을 봤었다.
마츠코와의 첫 번째 만남.
20살 대학신입생 시절 공강 시간에 학교 중앙도서관에서 혼자 청승맞게 울면서 처음 봤다.
영화개봉 당시에 촌스러운 색채와 “마츠코야 울지마라 사랑이 있다”라는 문구의 포스터를 보고 ‘3류 영화일꺼야’ 라는 편견으로 앞으로 살아가면서 이 영화를 보게 될 일은 없을 것이라 생각했었다.
하지만 대학교 입학 후 영화 취향이 비슷해서 친해진 친구의 추천으로 반신반의하며 보게 되었다.
영화를 볼 기회가 몇 번 있었지만 재미없을 것이라는 의심을 놓지 못하고 미루고 미루다 공강 시간에 시간이나 때울 겸 본 이 영화는 사람이 많은 교내 도서관에서 나를 울게 만들었다.
화려한 포스터와 마찬가지로 아름다운 색채를 우울하고 잔혹한 영상에 입혔다.
나카시마 테츠야는 CF감독 출신답게
화려한 영상미와 음악으로 표현하는 연출 방식이 신파기 때문에 진지하고 어둡게 연출해 억지로 울리지 않고 오히려 웃으라고 강요하는 쿨함이 역설적이지만 좋았다.
웃음을 유발하는 장치 중 마츠코의 캐릭터를 1초 만에 보여주는 것이 있다. 바로 눈코입이 모두 모여 붙어버릴 것 같은 우스꽝스러운 표정.
아픈 여동생 때문에 얼굴에 늘 그늘이 드리워진 아버지를 위해 어린 마츠코가 광대의 표정을 따라했더니 아버지가 처음으로 환하게 웃는다. 그때부터 아버지의 웃는 얼굴을 보고 싶을 때마다 마츠코는 그 표정을 짓기 시작했다. 시간이 흐르면서 필요에 의할 때뿐만 아니라 불편하고 당황스러운 상황이 오면 자신도 모르게 그 표정을 짓는 어른으로 자랐다.
살아서 집에 돌아왔을 때 그 흔한
어서 와
라는 말 한 번 들어본 적 없는 여자가 다른 사람을 웃음 짓게 하려 노력한다. 그리고 타인의 웃음을 보며 행복해하는 모습이 지독히도 외로워 보였다. 분명 엄청 웃긴 표정인데 눈물겹게 예쁜 이유로 습관처럼 짓게 된 마츠코의 표정을 보고 있는 나 역시 눈은 울고 입은 웃는 기괴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남자친구에게 피가 나고 멍이 들 정도로 맞는다 해도 외톨이가 되는 것 보다 낫다며 관계를 놓지 못하는 답답한 모습은 사실 20대 중반까지는 이해하지 못했었다. 지금은 그녀의 답답한 행동이 싫지만 그녀의 마음은 그렇게 밖에 할 수 없는 마음이 이해가 된다. 그저 어떤 상처를 받아도 자기가 받은 상처를 똑같이 되돌려 주지 못하고 그저 삭이는 미련함이 나와 닮은 마츠코가 가여웠다. 자신이 웃는 것보다 타인의 웃음을 더 사랑하는 나와 마츠코의 공통점 때문에 마츠코의 비극이 마치 내 일인 것처럼 그 사람 많은 도서관에서 그렇게 울었나보다.
기대가 크면 실망이 크다는 것과 반대로 기대가 없어서 더 큰 감동으로 왔던 <혐오스런 마츠코의 일생>.
(기대를 하고 봐도 실망시키지 않을 것이라 생각한다.)
이 일을 기점으로 영화를 보기 전에 줄거리를 읽지 않고 영화를 보는 습관이 생겼다.
마츠코와의 두 번째 만남.
2년 뒤, 책이 원작인 영화를 원작과 비교하며 보는 재미에 빠졌었다. <혐오스런 마츠코의 일생>이 야마다 무네키의 작품이라는 사실을 알고 설렘 가득 안은채 책을 읽어 보았다.
보통은 영화가 원작을 따라잡지 못해 실망하는 경우가 많았는데 그것을 깨버린 작품이 몇 가지 있다. 장아이링의 소설, 커피 한잔과 여유롭게 읽어도 한 시간 안에 다 읽어질 짧은 이야기 <색, 계>를 2시간 반이 훨씬 넘게 연출해도 지루하지 않은 리안 감독의 <색,계>를 비롯한 그의 작품 대부분. 이사카 고타로 작가의 <집오리와 들오리의 코인로커>를 밥 딜런의 음악을 들려주며 원작을 해치지 않은 나카무라 요시히로의 <집오리와 들오리의 코인로커>. 그리고 나카시마 테츠야 감독의 <혐오스런 마츠코의 일생>.
야마다 무네키의 <혐오스런 마츠코의 일생>은 2001년 7월 11일 자 신문기사 발췌 글을 실어 시작부터 각박한 현실 분위기를 보여준다. 영화와는 또 다른 긴장감을 준다. 짧게 비교하자면 원작은 제목처럼 혐오스러움을 극대화하려 매우 차가운 현실과 비극을 두드러지게 표현했다. 반면 영화는 노래와 화면 곳곳에 꽃을 걸어두는 등 따뜻함을 곳곳에 배치해뒀다.
(사진을 찾으면서 교탁 위, 테이블 위, 벽지 등등에 화병이나 꽃을 배치한 세심한 미장센에 감탄)
같은 비극적인 결말이지만 하나는 씁쓸한 불쾌함만
다른 하나는 유쾌한 씁쓸함이 남았다.
씁쓸하지만 유쾌함을 동시에 줄 수 있었던 것은
"이 영화에서 추구한 CG가 '객관적'인 세계의 재현이 아닌 주인공 마츠코의 감정에 따라 변화하는 '주관적'인 세계를 표현하는 것이었다"
고 말하는 나카시마 테츠야 감독의 노력 덕분이다.
책을 읽을 땐 그저 인물이 하는 말과 행동에만 집중할 수밖에 없지만, 영화의 강점은 글로 표현되지 않았던 단순한 집에 벽지와 장판 색깔, 가구 하나로 따뜻함을 채워 넣거나 삭막함을 드러내기도 한다. 나는 마츠코가 사는 집에 주목했다.
시작은 어린 마츠코와 가족이 함께 살던 집.
몸이 아파서 아버지의 관심을 독차지하는 여동생의 방은 예쁜 꽃과 모빌로 사랑스럽게 꾸몄다.
하지만 동생의 방으로 이어지는 계단은 아버지와 마츠코 사이의 보이지 않는 거리를 보여주듯 지나치게 높고 멀다. (사진의 계단은 영화 초반부에 나오는 집안의 계단이 아니다. 하지만 엔딩에서도 계단이 나오는 것을 보면 그 집의 계단과 같다고 봐도 될 것 같다)
마츠코가 집을 나온 뒤 사랑이 바뀔 때마다 집이 바뀐다. 마츠코의 첫사랑인 작가가 마츠코에 대한 사랑보다 글에 대한 사랑이 더 큰 남자임을 보여주기 위해 집안을 종이로 가득 채웠다.
첫 사랑이 자살하고 6개월 후 끝나버린 줄 알았던 마츠코의 인생에 새로운 사랑이 다시 찾아옴을 알리며 꽃 벽지와 아기자기한 색상으로 생명력을 불어넣었다.
두 번째 남자에게도 이용만 당하다 버림받고 술집을 전전하다 기둥서방을 살해하는 호텔에선 붉은 피가 돋보이도록 파란 커튼과 파란 바닥, 파란색 소품들을 이용했다.
살인 후 이발사와 새로운 사랑을 시작하는데 살인을 덮어두고 하는 찝찝한 사랑을 얘기하듯 새초롬한 핑크빛을 억지로 톤다운 시켜 탁하게 연출한 것이 인상적이다.
짧은 사랑을 뒤로하고 감옥생활을 할 땐 매일 똑같은 일상을 반복한다는 영화 속 노랫말처럼 차갑게 파란 죄수복과 어두운 색이 화면을 도배한다.
출소 후 다시 이발사를 찾아갈 때는 죗값을 치르고 나오기만을 기다렸다는 듯 억눌려둔 핑크빛을 봉인 해제하고 화사함을 한껏 머금은 벚꽃이 흩날린다.
출소 후 찾아간 이발사와의 사랑도 이루어지지 않고 마지막으로 만난 그녀가 죽기 직전까지 사랑한 남자와 함께한 집은 파스텔 색조다. 충분히 따뜻한 색이지만 온전치 않은 둘의 관계를 보여주듯 쓸쓸한 카메라 워킹이 따뜻함과는 거리가 멀게 느껴지도록 했다.
마츠코는 마지막 사랑에게도 버림받고 가족에게도 철저하게 버림받은 이후 고향의 강을 닮은 아파트에서 홀로 산다. 지쳐버리고 피폐해진 그녀의 심신을 대변하듯 집안은 더러운 쓰레기더미가 쌓여있다. 나중에 까만 봉지들이 그녀가 죽고 검은 까마귀로 변신해 날아갈 때는 잔혹 동화의 한 장면을 보는 것 같았다.
인도의 마살라 영화처럼 뮤지컬적인 요소들과 밝고 선명한 색감, 화려한 CG, 발랄한 율동은 심혈을 기울여 선곡한 음악들과 어우러져 비극을 더욱 돋보이게 만드는 장치로 쓰였다. 그는 또한 마츠코가 등장하는 거의 모든 씬에 장식된 다채로운 꽃들이 비참한 현실 속에서도 '언젠가 왕자님을 만날 것'이라는 꿈을 잃지 않고 살아가는 마츠코의 판타지를 형상화한 것이라고 전한다. 동화같은 그림에 끔찍한 이야기를 얹은 불균형이 <혐오스런 마츠코의 일생>을 2번 봤을 때 찾아낸 매력이었다.
마츠코와의 세 번째 만남.
“꿈을 꾸는 건 자유다”
라는 노래를 시작으로
오후 3시에 어떤 장소에선 꿈을 찾는 자,
또 다른 장소에선 좌절하는 자,
대낮에 어둠 속에서 술에 찌든 자,
집에서 이별을 통보받고 실성한 자들을 쉴 틈 없이 보여준다.
오프닝이 이랬었나...?
3번째 보지만 처음보는 장면처럼 낯설었다.
같은 시간에 일어난 이 모든 에피소드와 정신없는 음악이 결합한 오프닝이 나의 지난 날을 보는 것 같았다.
3년 전, 이별을 통보받고 술에 찌들어도 봤고 설상가상으로 직업을 잃고, 꿈도 잃어 좌절도 해봤다. 모든 행복과 이별한 절망 속에서 버틸 수 있게 하는 건 다시 꿈을 꾸는 일밖에 없다는 것을 깨닫는데 시간이 꽤 걸렸다. 그러나 다시 꿈을 이루려 발버둥을 쳐봐도 내게 쉬이 허락해주지 않는 현실에 이 악물고 버티며 지냈었다.
어릴 때 무심코 흘려보냈던 장면을 조금 성숙해지고 나니 집중해서 볼 수 있게 되었다. 덕분에 마츠코와의 3번째 만남은 오프닝부터 몰입하며 봤다.
기억에서 희미했던 오프닝과 마찬가지로 엔딩은 마츠코가 그저 어이없는 살해를 당한다고만 어렴풋이 기억하고 있었다. 꿈을 다시 이루려고 결심한 마츠코가 물 위의 지푸라기와도 같은 친구의 명함을 손에 쥐는 순간 세상은 꿈을 이뤄주는 선물을 주지 않고 어이없는 죽음으로 배신했다. 오랜 시간이 걸려 잃어버린 꿈을 다시 이루려 발버둥을 쳐봐도 내게 쉬이 허락해주지 않는 현실을 이 악물고 버티고 있는 나의 지금과 닮아서 울컥했다. 오랫동안 그저 허무맹랑한 죽음으로 기억하고 있었는데 3번째로 본 <혐오스런 마츠코의 일생>의 엔딩은 이보다 더 비극적인 죽음은 없을 것이란 생각과 내 상황을 오버랩하며 원망스러웠다.
살아있을 때 텅 빈 집에 돌아와 언제나 “다녀왔습니다”를 그토록 외쳐도 들을 수 없었던 “어서 와”라는 대답을 죽어서야 동생을 만나 듣게 되는 너무나도 가여운 한 여자의 일생. 죽는 순간까지 비극의 연속이었지만 고생스러운 삶이 끝나고 나서야 소원이 이루어진 타인의 인생을 보며 공감하고 나의 인생에 대해 위로를 하며 다음에 또 그녀의 일생을 다녀오고 싶게 만드는 영화다.
계단을 오른 그곳에서는 타인들이 그녀를 웃게해줬으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