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와 나
엄마는 원래 성격이 조용했고 소심했지만 차분했다.
학교에서 돌아오면 엄마는 안방에서 낮잠을 주무실 때도 있었고
옆집으로 마실을 갔을 때도 있었다.
하지만 대개는 늘 집에서 집안일을 하며 계셨다.
어린 나에게 엄마는 늘 무표정한 배경처럼 존재했다.
무슨 일이 있어도 엄마는 감정을 쉽게 드러내지 않았다.
화도, 기쁨도, 슬픔도—엄마는 그저 묵묵히 제 일을 할 뿐이었다.
설거지, 밥 짓기, 청소, 빨래...
일상은 조용했고,
엄마도 조용했다.
그 시절 나는, 엄마가 좋았다.
이유는 모르겠다.
늘 그 자리에서 묵묵히 자신의 일을 하는 엄마가 좋았던 것 같다.
엄마가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엄마가 나를 사랑한다고 믿었다.
꼭 안아주지 않아도, "사랑해" 하지 않아도.
엄마가 내 곁에 있다는 것,
그것만으로도 충분했던 시간이었다.
내가 네 살 때 내 위로 세 살 많았던 오빠가 물에 빠져 죽었다.
나는 기억에 없지만 아빠는 나이가 드실수록 그때의 일을 남의 집 일인 듯 얘기했다.
할아버지와 동네 개천으로 수영을 갔던 오빠는 고작 일곱 살이었다.
할아버지는 혼자 돌아와 손자가 물에 빠졌다고 했고
그 소식을 들은 나는 넋이 나간 엄마와 아빠에게 해맑은 얼굴로
"아빠, 오빠 죽었대"라고 연신 말을 했다고 했다.
그때의 부모 마음을 어찌 알 수 있을까...
헤아릴 수 없을 만큼의 깊은 슬픔을,
억장이 무너지고 오장육부가 다 뒤틀리는 것 같은 괴로움을
엄마는 어찌 견디셨을까...
엄마가 된 지금의 나는 엄마가 견디었을 그 고통의 세월을
감히 상상할 수 조차 없다.
그 일 때문일까
이제와 생각해 보니 엄마는 모든 감정을 억누르며 살아 내신 것 같다.
엄마는 동생을 낳은 후부터 살이 찌기 시작했다.
내가 초등 고학년일 때는 작은 키에 뱃살이 뚱뚱한 체형으로 변해갔다.
처녀 적 40킬로대 엄마는 해골같이 뼈 밖에 없는 사람이었다고 아빠가 말해줬다.
신기하게도 네 살 터울의 남동생은 엄마 아빠에게 큰 아들의 환생처럼 느껴졌는지 모르겠다.
동생의 태몽은 오빠의 태몽과 같았고 말하지는 않았지만
오빠의 모습이 부모님 눈에는 보였던 모양이다.
엄마는 내가 서른이 되어 시집을 가는 그 순간까지도
늘 아들 아들 하셨다.
아들이라면 엄마는 뭐든지 해 주셨다.
내가 배우고 싶었던 미술학원도 돈이 없다고 보내지 않았지만
동생은 유아원부터 유치원을 거쳐 미술학원도 보내주었다.
동생을 데리러 미술 학원에 잠깐 들렀던 어느 날
선생님 어깨너머로 보이는 그림에서 사실적으로 표현할 수 있는 기법들을 처음 보았다.
아스팔트의 질감을 어떤 식으로 표현하는지
색을 어떻게 섞어 써야 좀 더 그럴싸한 그림이 되는지
어린 내 눈에 그날이 사진처럼 들어와 박혔다.
나는 국민학교 시절 내내 화가가 꿈이었다.
꿈을 꾸고 그려보라고 했던 그 시절
학교 미술 수업시간에 도화지 속 내 모습은
늘 베레모를 비스듬히 쓰고 한 손에 붓을 다른 한 손에는 팔레트를 들고
캔버스를 바라보고 있는 뒷모습이었다.
하지만 학창 시절 내내 미술에 대한 나의 열망과는 달리
나에 대한 부모님의 지원은 아무것도 없었다.
국민학교 6학년 때 나는 학교 대표로 우리 동네에 처음 생긴 지하철을 타보고
그림으로 그려오는 과제를 받았다.
담임 선생님은 학교에 몇몇 아이들만 자격이 주어진다는 말로
그림을 그려내는 아이들에게 자부심을 심어주셨다.
나는 뽑힌 그 아이들 중에 내가 있다는 사실이 아주 뿌듯했다.
그러나 엄마는 내게 그 어떤 칭찬도 하지 않았다.
내가 뽑힌 것에 대한 별 의미를 두지 않아 보였다.
그때의 엄마 머릿속에는 어떤 생각들이 가득했을까?
엄마는 왜 이렇게도 내게 관심이 없었던 걸까?
나는 그런 엄마가 점점 불만이었다.
또래 친구들과 어울려 다니는 것도 엄마는 말렸다.
나쁜 친구들과 어울려 공부를 안 한다며 밖에 나가는 것도 못하게 했고
내 친구들에 대한 험담도 아무렇지 않게 했다.
그때는 애써 내 안의 감정을 모른 척하며 조용히 지나간 나 자신이
이제 와서 생각해 보니 참 안쓰럽지만 대견한 것 같다.
나의 사춘기는 부모에게 '악' 소리 한번 질러보지 않은 채
아주 조용히 지나갔다.
고1 미술시간에 선생님은 나의 데생 그림과 친구의 데생 그림을 칠판에 붙여두고
빛이 들어오는 방향과 그림자, 선의 표현과 그러데이션에 대해 비교 설명을 하셨다.
나는 잘 한 그림에 친구는 잘 못한 그림에 예시가 되었다.
내 그림에 대한 칭찬에 나는 어깨가 으쓱했다.
선생님은 내게 미대를 준비해 보라 권하셨다.
나도 미대에 가고 싶었다.
엄마는 그런 내게 돈이 없다며 그냥 공부나 하라고 했다.
나의 재능을 그때의 엄마는 알아봐 주지 않았다.
학교 운동장 옆 작은 공원 벤치에서 수업시간에 그린 풍경화도
역시 선생님의 칭찬을 듬뿍 받았다.
싱그러운 초록 잎들을 어떻게 표현할지 몰라 서성대던 내 눈에
미대 입시를 준비하던 지원이의 그림은 망설이던 내 붓에 갈피를 잡아 주었다.
멀리서 그 친구의 붓터치를 보았고 색의 사용을 보았다.
집에 돌아와 거실에 앉아 이젤대신 종이박스를 뜯어 세우고 내 4절 스케치북을 놓았다.
수채화 기법도 잘 모른 채 붓질하던 내가 처음 점묘법을 깨닫고 채워간 나뭇잎들은
내가 봐도 살아있는 나무 같아 보였다.
집에 마실온 동네 아주머니가 내 그림을 보고는 감탄을 해 주었다.
그런데도 엄마는 별 감흥이 없었는지 말이 없었다.
내게 잘 그렸다 애썼다 말 한마디 없는 우리 엄마였다.
나는 그런 엄마가 그냥 그런 사람인 줄 알았다.
표현하지 않는 엄마가 그냥 그런가 보다 했다.
고1 때 나는 미술시간이 제일 신났었다.
선생님은 내 그림과 내 작품에 늘 애정을 갖고 계셨다.
어떤 걸 그리고 만들어도 늘 만점을 주셨다.
친구에게 빌려줬던 내 그림을 단번에 알아보셨고
판화가 되었든 조각이 되었든
선생님은 늘 내편인 것처럼 후한 점수를 주셨다.
그럼에도 나는 선생님과 단 한 번도 얘기를 나 눈적이 없었다.
나는 소심하고 부끄럼이 많은 그저 조용한 여학생일 뿐이었다.
엄마는 가끔 말했다.
"나는 똥지게를 져도 서울로 시집갈 거야 "
처녀 적 엄마는 시골에서 아빠와 중매로 만나,
그토록 바라던 서울로 시집을 왔다고 했다.
생각해 보면,
나도 엄마에게 참 무관심했다.
엄마가 학교는 어디까지 나왔는지,
어릴 적 엄마의 꿈이 무엇이었는지,
사회에서 무슨 일을 했었고,
무엇을 좋아했는지...
나는 아무것도 알지 못했다.
엄마를 이해하지 못해 속상했던 숱한 날 중에는,
엄마를 제대로 알려고조차 하지 않았던 내가 있었다.
엄마는 아빠를 만나 행복했을까?
오빠의 죽음이 얼마나 큰 고통과 상처로 남았을까.
엄마를 이해하지 못하고 떠나온 나를
엄마는 어떻게 생각할까....
엄마에 대한 애증이 미련으로 남고,
엄마에 대한 갈증이 그리움으로 남았다.
엄마의 원가족에 대해 궁금해하지 않았던 어린 나는
이기적이라고 볼 수 있을까?
어른이 된 지금에야 비로소 깨달은 엄마에 대한 생각은
여전히 내가 자기중심적인 사람이라는 반증 같아 씁쓸하기만 하다.
문득 바라본 거울 속에
오십 대의 엄마가 서 있었다.
나는 엄마를 닮지 않았다고 생각했는데
거울 속 내 얼굴은 이미 엄마의 얼굴이었다.
기억 속 오십 대의 엄마얼굴이 흐릿하다
지금은 팔순을 바라보고 계실 엄마
엄마 얼굴이 얼마나 변했을까.
엄마를 만나러 가지 않은지 벌써 15년이 다 되어간다.
죽어서도 만나지 않겠다고 다짐했지만
엄마에 대한 나의 어리석은 다짐은
나이 듦에 무너져 내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