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빠와 나
아빠는 이 새벽에 또 일을 나가신다.
잠결에 스며든 밥냄새가 구수하다.
말소리는 없었지만 달그락,
숟가락이 밥그릇에 부딪히는 소리가 고요한 새벽 정적을 깬다.
아빠는 건설업을 하셨다.
아파트 공사장에서 방화문과 새시, 소화전등
철물로 만들어 납품하는 일을 오랫동안 해 오셨다.
아빠는 늘 부지런했고 참 열심히 사셨다.
내가 다섯 살 무렵에 경기도 접경지역으로 이사를 왔다.
그전에는 서울 어딘가에서 셋방 살이를 했다.
할아버지, 아빠, 엄마, 언니, 그리고 내가 함께 살았던 그 집은
겨울이 되면 방안에 물이 꽁꽁 얼고,
벽에서 물이 줄줄 샜던 낡은 집이었다.
내 또래였던 주인집 아이들은 얼마나 못돼 굴었는지
내가 콧물감기가 심했던 어느 날,
기침 한 번에 목구멍으로 가래가 넘어온 것을 알아차리고
"우리 집 마당에 뱉지 말고, 삼켜!"라고 했다.
그 말에 꿀꺽 목구멍 뒤로 가래가 넘어갔다.
새 집으로 이사오던 그날
나는 언니와 함께 동네 어귀 끝에서 집까지 여러 번 뛰어다녔다.
다섯 살짜리 꼬마 아이가 '집을 찾았다'며
스스로 뿌듯해하던 내 모습이 기억 저편에 아련히 남아 있다.
"서울시 은평구 진관내동 한양주택 45호"
아빠는 내가 혹시 집을 못 찾거나 길을 잃어버릴까 봐
집주소를 내내 외우게 했다.
아빠는 그 집에서 30년이 넘도록 사셨고, 재개발이 될 때까지 떠나지 않았다.
아빠가 태어난 시대는 일제강점기였다.
일본이 패망하기 전까지, 우리 땅에서 빠져나가기 전까지
아빠는 일제식 교육을 받았다.
일본어를 배웠고 한국인에 대한 나쁜 인식을 주입받았다.
광복 후에는 또 전쟁이 났다.
개성에서 피난길에 오른 아빠와 고모 그리고 개성에 살았던 아빠의 친척들이
전쟁 통에 뿔뿔이 흩어졌다.
전쟁으로 아빠의 엄마는 돌아가셨고
넘겨진 건 아빠와 고모, 단 둘 뿐이었다.
아빠는 국민학교만 간신히 졸업한 채
구두닦이, 신문팔이 같은 일들을 하며 생계에 뛰어들었다.
아빠의 어린 시절 이야기는 아빠가 얼큰하게 취한 날이면
어김없이 꺼내 들던 레퍼토리였다.
이제와 생각하니 아빠의 삶은
참 고단하고 애달프고 서럽다.
아빠가 묘하게 뒤틀린 구석이 있긴 했지만
아빠는 참으로 열심히 인생을 살아낸 사람이었다.
고물을 주워 내다 판 돈으로 술을 마시고,
당신 자식을 허리띠로 후려치던 모진 할아버지를
아빠는 모시고 살았다.
그 분노가 얼마나 컸을까...
할아버지는 돌아가시기 전 날에도 술을 드셨다.
날마다 술을 드시고 돌아오시는 할아버지를 엄마는 참 힘들어했다.
할아버지 방에는 늘 담배 냄새와 술 냄새가 뒤섞여 있었다.
내가 어쩌다 할아버지 방에 들어가는 날에는
할아버지가 저고리 안쪽 주머니에서 비닐에 싸인 알사탕을 손에 쥐어 주셨다.
나는 그 사탕을 먹지 않았다. 그저 가만히 들고만 있었다.
할아버지와 함께 살았음에도 나는 할아버지와 친하지 않았다.
그날은 할아버지가 집에 돌아오지 않으셨다.
아빠와 엄마는 온 동네를 뒤져 할아버지를 찾아냈다.
집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할아버지는 인사불성이 되어 길에서 주무시고 계셨다고 했다.
새벽녘, 아빠가 할아버지를 둘러업고 집에 들어올 때,
아빠의 무표정한 얼굴과
화가 난 엄마의 얼굴이 또렷이 기억난다.
그날, 나는 학교에서 단소 시험이 있었다.
평소에 잘 불리던 단소였는데
하필 시험시간에 소리가 제대로 나오지 않아 좋지 못한 결과를 받았다.
속상해서 코가 쭉 빠진 채 터덜터덜 집 앞마당에 들어서는데
작은 할머니가 현관 앞에 서 계셨다.
" 아이고 야야 늬 할아버지 돌아가셨다 "
할머니의 울음 섞인 목소리에 순간 나는 머리가 멍해졌다.
할아버지 방문은 닫혀있었다.
오후에 장의사가 와서 할아버지 염을 했다.
집 앞에는 상제 등이 켜졌고,
동네 어른들이 와 천막을 쳤고, 어느 틈에 음식들이 차려졌다.
할아버지는 병풍 뒤에 고요히 누워 계셨다.
방에는 향 냄새가 가득했고, 나지막이 곡소리가 났다.
그날 아빠 얼굴이 기억나지 않는다. 다만 아빠는 울지 않으셨다.
삼일장을 다 치르고 할아버지는 한 줌 재로 산에 뿌려졌다.
사람들은 산소에 모시지 않고 산에 뿌린 아빠를 수군거리며 비난했지만,
아빠는 아무 말도 하지 않으셨다.
그저 삼일 내내
영정 사진 앞에서 한 방울의 눈물 없이 묵묵히 자신의 자리를 지키셨다.
아빠의 눈물은 먼 훗날 아빠가 할아버지만큼 늙으셨을 때 처음 보았다.
아빠의 깊은 고뇌와 아픔, 갈등과 후회, 절망과 낙담의 반복이 아빠를 갉아먹었다.
아빠는 2009년 12월 신년을 열흘 앞두고 간암으로 돌아가셨다.
살아온 인생이 너무 힘든 고난의 시절이어서 안타까웠고
열심히 살아주셔서 감사하다는 인사는 전하지 못한 채,
자주 찾아뵙지도, 연락하지도 못해 미안하다는 말조차 못 건네고
아빠를 하늘로 보내드린 점이 너무나 가슴저리게 미안하고 또 미안했다.
아빠가 울지 않았던 숱한 날들에는 너무 오래 참아온 울음이 있었다.
요즘은 아빠가 참 많이 보고 싶다.
아빠가 유난히 젊음을 부러워했지만
자식들 다 시집 장가보내놓고 여유가 생겼을 무렵부터
암투병을 하시느라 여행도 못 가셨던 우리 아빠.
지금도 그런 아빠가 안타깝고 불쌍하고 속상하다.
'너무 고생만 많으셨던 아빠, 하늘에서 평안하시지요?
살아보니 아빠처럼 살아낸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이었는지,
이제야 조금 알 것 같아요.
그곳에서는 부디 아픔 없이,
영원히 행복한 삶을 살고 계실 거라 믿어요.
아빠의 영혼이 육신로부터 빠져나가던 그 순간,
따뜻했던 아빠의 손길은 여전히 제 손에,
제 마음에 생생히 남아 있어요.
아빠처럼 저도 묵묵히, 열심히 살아 낼게요.
지켜봐 주시고, 응원해 주세요.
존경합니다. 아버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