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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혁재 Mar 07. 2019

서울 의료원의 한 간호사는 그렇게 타들어갔다

[이기사]로 편입하는 글

서울 의료원의 한 간호사는 그렇게 타들어갔다

응급실에서 애타게 기다려 본 적이 있으신가요?


 누나가 급성 위염으로 구토를 심하게 할 때가 있었다. 처음엔 별 일 아니겠거니 싶었다. 누나가 응급차를 불러달라 다급하게 부탁해서 새벽 1시가 넘은 시간에 응급차를 타고 서울의 한 대학 병원으로 갔다. 새벽 1시를 넘긴 시간에도 응급실 대기 줄은 길었다. 누나가 유일하게 할 수 있었던 일은 비닐봉투를 부여잡고 자기 순서를 기다리는 것 뿐이었다. 누나의 간곡한 부탁에 안 되는 줄 알면서도 진찰 순서를 당길 수 있는지 의료진에 물어보았다. 그 순간에 내 눈에 비친 응급실 간호사와 의사의 표정은 (물론 내 마음이 급해서 그런 것이었겠지만) 냉정했고 돌아온 대답 역시 무미 건조한 "안 돼요"였다. 순간 그들이 미워졌다. 지금이야 새벽 시간 피곤할 그들의 사정이 보이고 그 질문이 정말 말도 안되는 질문이었음을 알 수 있다. 하지만 그 순간 만큼은 '조금 따뜻하게 환자에게, 보호자에게 안심시켜줄 수 없었을까'하는 생각이 들었고 그들이 참 미웠다. 보호자인 내가 봐도 매정해 보인 그들의 모습이 봉투 하나에 의지하던 누나에겐 어땠을까.


 그 일이 있고나서 한 동안 ‘의료진’에 대한 인식이 그닥 곱지만은 않았다. 그들의 노고를 머리론 이해하지만, 누나의 안쓰러웠던 경험은 진정으로 그들에게 환자의 아픔을 공감하는 마음이 남아있을까 하는 의구심을 들게 했다. 이런 생각을 바꾸게 해준 글을 한 편 읽었다. 최근 경향신문 토요판에서 간호사 태움 문화에 대한 분석 기사를 썼다. 다시 한 번 간호사의 '태움 문화'에 대해 사회의 경각심을 불러일으킨 서울 의료원 간호사 투신 자살 사건을 토대로 작성된 기사였다. 태움 문화에 대한 언론 보도는 과거에도 분명 있었다. 하지만 여느 뉴스 소재처럼 대중들에게 잊혀졌다. 그렇게 깊게 들여다보지 못했던 태움에 대한 이야기를 자세히 다룬 경향신문의 글을 읽어보니 매정했던 응급실 공기가 사뭇 다르게 느껴졌다. 아마 하얗게 태워진 공기가 짓누르는 힘이 느껴져서 일수도 있겠다.




- 한국의 환자대비 간호사 수와 업무량


한 간호사가 담당해야 하는 환자가 얼마나 될까. 나만 치료해주었음 하는 급한 마음에 볼 수 없었던 그들의 삶은 어떨까. 일러스트 : 최장원


 사실 진료를 보는 의사보다 환자들과 더 많은 대화를 하고, 환자의 생활과 맞닿아 있는 사람은 ‘간호사’다. 병원에서 어디든 보여야 하는 당연한 존재로 여겨지는 그들의 삶이 어떤지 보아야 병원과 환자 사이 관계가 보이는 법이다. 앞서 소개한 경향 신문의 기사에 따르면, 한국 간호사들의 과도한 업무량을 가늠할 수 있다. 간호사의 업무는 크게 보면 액팅과 차팅으로 나눌 수 있는데, "액팅은 대화를 통해 환자 상태를 파악하고 약을 투여하는 행위다. 차팅은 환자의 특이사항이나 투여한 약물 등을 기록으로 남기는 일"이다. 만일 "신규 입원 환자를 대해야 할 경우 새로운 환자가 어떤 약을 먹는지, 왜 먹는지, 가족력은 있는 지 등 맡아야 할 업무가 더욱 늘어난다." 서울 소재의 대학 병원에서 일하는 간호사 '하씨'가 16명에서 18명의 환자를 다룬다고 하니, 이 간호사의 하루가 감히 그려지지도 않는다.


 2018  OECD 보건통계에 따르면 2016년 주요국가 인구 1000명 당 임상 간호사 수가 한국은 6.8명으로 16위를 기록하였는데 이는 옆 나라 일본(8위) 11.3명 보다도 약 4명이나 적은 수치이며 1위 노르웨이 (17.5명)보다 약 10명 적은 수치이다. OECD 평균이 9.5명이니 한국에서 간호사가 겪어야 하는 과도한 업무량을 추측할 수 있다. 실제로 열악한 근무 환경으로 잦은 이, 퇴직이 많은 실정인데, 보건복지부에 따르면 (2018) 간호사 평균 근무연수는 5.4년이고 전체 이직률은 12.4%이나 신규 간호사 1년 내 이직률이 33.9%로 숙련된 장기 근속 인력이 매우 부족한 실정이다. 옆나라 일본과 비교해 보아도 이는 상당히 높은 수치인데, 일본의 간호사 이직률은 10.9%이며 신규간호사 이직률은 7.5%이다.

 신규 간호사의 이직 비율이 상당히 높다는 점은 신규 간호사가 업무에 적응하는데 심각한 문제가 있음을 알게한다. 문제가 발생하는 다양한 원인들 중 중요한 한 가지는 간호사 사이의 문화, '태움'이 있다. 이는 간호사가 처해있는 과도한 업무량과 무관하지 않다. 간호사는 ‘사람을 살리는 직업’이라는 사명감이 주는 직업 특성적 압박감을 받는다. 이에 더해진 고강도의 과도한 업무량은 간호사 '개인'을 정서적 낭떠러지에 몰기 충분하다. 즉 환자 이외의 사람들을 대하는데 여유가 부족하다는 뜻이다. 이와같은 상황에서 간호사는 후배 간호사 교육까지 맡는다. 태움은 그렇게 시작된다.


보건복지부. "간호사 근무환경 및 처우개선 대책" .2018 참고


- 돌봄에 대한 사회의 편견과 저평가


돌봄이란 단어는 지금까지도 생소하다. 여전히 우리 교육은 돌봄에 대해 자세히 가르치지 않는다. 돌봄을 사랑으로만 설명하는 것이 괜찮을까 [출처 : 대학신문]


  태움 문화를 ‘병원 문화’로 한정지어 이해할 수도 있지만 이 문화에 스며든 사회적 원인들을 살펴보자. 보다 거시적인 시선에서 간호사의 태움을 들여다보고 왜 일어나는지 보겠다는 의지다. ‘간호사’라는 직업은 필연적으로 ‘돌봄’이라는 개념과 맞닿아있다. 돌봄의 사전적 정의는 "관심을 가지고 보살피다"이다. '환자'라는 일상 생활의 다양한 부분에 타인의 도움이 필요한 사람을 '관심을 가지고 보살피는' 사람이 '간호사'다. 따라서 간호사라는 직업은 필연적으로 돌봄으로 구성되어 있다. 그렇다면 우리 사회가 ‘돌봄’을 대하는데 보이는 몇 가지 특징적 태도들을 분석함으로써 간호사라는 직군에서 발견되는 태움 문화를 이해할 수 있지 않을까.

 우리사회가 돌봄을 대하는 첫 번째 특징은 여전히 돌봄을 ‘여성의 일’로 전가하는 경향이 강하다는 것이다. 물론 현대에 가부장적 문화나 잘못 고정된 남성성, 여성성이 과거에 비해(; 조선시대) 많이 희석된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여전히 유아나 노인에 대한 돌봄이 여성이 상당 부분 부담하는 모습 또한 실재한다. 간호사 직군의 성비는 '남성 간호사에 대해 다룬 뉴스1의 기사'에 따르면, 여성이 차지하는 비율이 약 96%에 달한다(2018). 환자의 하루를 세세히 살펴보고 쾌차를 위해 돌봐야하는 직업인 간호사 직종에 여성 비중이 많은 것은 돌봄이 특정 성별에 전가된 현상에 기인하는 것은 아닐까 고민이 필요하다.


- 이원준, 차오름. 뉴스 1. "남자간호사도 '태움' 피해자....'군대 폭력보다 더 심해'" . (2018년 2월 26일) 참고


 문제는 첫 번째 특징에서 이어지는 부분, 두 번째 특징에서 드러난다. 돌봄이 여성에게 편중되어 있는 사회도 문젠데 이에 더해서 돌봄의 가치가 제대로 인정받지 못하고 있다. 돌봄이 여성에게 편중되어 있다는 사실은 돌봄의 가치가 저평가 되었다는 사실을 방증함과 동시에 저평가 시키는 요소로 작동하기 때문이다. Romero & Perez의 연구에 따르면 (2016) "돌봄은 여성이 집안에서 수행하는 '사랑의 행위'라는 인식" 이라 정의 했는데, 안숙영은 (2018) "돌봄의 제공자는 여성, 돌봄의 수행공간은 집안, 돌봄의 성격은 사랑이라는 인식이 지배적이었기 때문"이라 정리했다.

 같은 연구에서 "OECD 회원국의 경우 여성이 남성보다 훨씬 더 많은 시간을 돌봄노동에 투여하며 맞벌이 부모의 경우 평균 가사분담률은 여성이 66.4%인 반면 남성은 33.6%에 불과하다"고 전한다. (OECD, 2016; 고용노동부, 2017). 내가 살아왔고 살고 있는 한국 가정에서 (부끄럽지만) 돌봄 역시 이러한 추세와 유사하게 ‘사랑’ 이나 ‘희생’이라는 이름으로 설명됐고 여성에게 전가되었다. 돌봄은 하나의 노동으로 인정받기 보다 당연한 일과로 여겨졌다. 돌봄이 당연스럽게 요구되는 일인 만큼 돌봄 업무를 거부하거나 불평하는 것은 비난의 대상이 되었다. 정신, 육체적으로 힘들지만 노동으로 인정받지 못한 것이다.

 한국의 전통적인 가부장적 문화를 정치학적으로 살펴보면 '돌봄'이 여성에게 전가된 것을 다른 시각에서 이해할 수 있다. 유교적 가치관(남성중심적, 가부장적)이 강력하게 규제하는 사회에서 가정의 권력 관계를 보면 가장 약한 위치에 여성(어머니)이 있다. 따라서 가정 내에서 힘들지만 반드시 필요한 '돌봄'이 '사랑'의 이름으로 여성에게 전가된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돌봄에 대해 조선시대부터 노동으로써 그 가치를 높게 평가하고 비싼 보상을 주었다고 가정해보자. 아마 돌봄의 주체는 다른 성별을 띄지 않았을까. 하지만 이미 오래 전 저평가된 돌봄의 가치는 특정 성별에 전가 되었다. 세월이 지나면서 이러한 구조는 정당화 되면서 견고해졌다. 돌봄의 재평가가 필요함을 사회 구성원 모두가 힘을 합쳐 주장해도 단단해진 구조를 녹일까 말까 한데, 반 쪽짜리 주장이 얼마나 힘이 있을까.

 

 돌봄 저평가의 '사회적 방치'는 병원에서 간호사가 겪는 고통에도 영향을 미친 것으로 보인다. 가정에서 돌봄의 주체를 옥죄이는 유교적 악습은 병원에서 환자를 살려야 한다는 직업적 사명감으로 대체되었을 뿐 전체적인 틀은 다르지 않다. 따라서 ‘환자를 돌본다’는 간호사의 노동은 돌봄에 대한 한국 사회의 특수적 저평가가 영향을 미친다. 간호사의 노동은 다른 노동에 비해 그 고초가 당연하게 여겨지고 깊은 관심을 받지 못하기 쉬운 구조에 놓인다. 즉 간호사들은 자신의 '힘듦'에 대해 강력하게 외부에 요구할 수 없는 구조에 놓여있다. 구조 속 개인은 피폐해지며 예민해진다. 과도한 업무량에 개인들은 셀 수 없는 소모적 전쟁들을 치른다. 하지만 사용 주체인 병원은 비용-이익 관점에서 개선의 의지가 없다. '여성'이 '마땅히' 해내야 하는 돌봄 문화가 견고하다면 간호사의 업무에 대한 사회의 경각심은 낮아지기 마련이다. 따라서 적은 간호 인력으로도 병원을 운영하는데 여론의 눈치를 적게 보게 된다. 병원 경영의 생리가 그렇다.


안숙영. "돌봄노동의 여성화에 대한 비판적 고찰" . 한국여성학회. 2018. 참고


- 비용 부담을 추가로 하지 않으려는 병원... 정부의 마땅한 역할은 무엇일까?


병원도 수익이 있어야 질 좋은 의료서비스를 지속적으로 제공할 수 있다. 무작정 인력 확충을 요구할 수 없다면, 정부가 해야하는 일은 무엇일까. [출처 : 데일리한국, 스톡 벡터]


 병원을 비난하고 있지만, 병원이 지속적으로 겪고 있는 적자의 아픔을 외면하고 싶은 것은 아니다. 적은 수의 간호 인력은 다양한 이유로 적자를 겪고 있는 병원의 어쩔 수 없는 선택일 수 있다. 병원 수익이 흑자냐 적자냐의 논쟁을 할 것이 아니라면, 정부의 보조에 대한 논의를 해야 하지 않을까. 조선비즈의 기사에서도, 2017년 이제 막 세상과 마주한 신생아의 생명을 앗아간 이대목동병원의 사고를 다루면서 '신생아 중환자실에 5명이 근무해야 할 일을 2명이 근무하고 있었다'며 병원의 인력부족 문제를 짚었다.


- 허지윤. 조선비즈. "의료계 '환자 살릴수록 병원 적자, 의료수가 인상해야 제 2 이대병원 사태 막을 수 있어" (2018년 1월 12일) 참고


 정부는 어떻게 병원의 인력 문제를 도와줄 수 있을까. 이 글 앞 부분에 인용했던 보건복지부 자료에서는 다음과 같은 인력 확충 대책을 내놓고 있다.


신규인력 배출 확대

간호사 근무환경 개선 등을 통한 의료기관 활동률 제고

유휴인력 재취업 확대


 동시에 '간호 수가'를 개선(간호 서비스에 대한 보상을 강화)함으로써 재정적으로 병원에게 숨통을 트이게 하는 정책도 있다. 현재 병원의 '병상 수' 대비 간호사 수를 토대로 간호수가가 결정되는데 이를 '환자 수' 대비로 전환함으로써 간호사 인력을 확충하는 병원에 더 많은 수익이 가도록 만드는 것이다. 추가 수입분은 70% 이상 간호사 처우 개선 사용에 사용하도록 권장하고 분기별 모니터링을 시행한다.


*건강보험 수가란 정부가 정해놓은 의료비로서 환자 본인 부담금과 국민건강보험공단 지불금을 합한 총액을 뜻한다. 건강보험정책심의 위원회에서 결정한다.

출처 : 경향신문. 김민아. "의료수가 '원가+a' 보장 안 하면 병원 문재인케어 둘 다 망해". (2018년 4월 10일)


 '신규 간호사 교육 체계'에 대한 정책 구상도 눈여겨 볼 만 하다. 300 병상 이상의 종합 병원, 상급 종합 병원에 '간호교육 관리팀'을 운영하도록 하고 신규 간호사 및 간호대학 실습학생들에 대한 교육 관리 업무만 전담하는 '교육 전담 간호사 배치'를 구상 중이다. 나아가 신규 간호사의 교육 기간을 '3개월 이상' 확보하도록 계획 중이다. 정부의 정책 구상은 표면적으로 태움 문화가 발생하는 원인들의 해결책을 잘 제시하고 있는 듯 하다. 하지만 어딘지 모르게 실현 가능성이 떨어져 보이고 개선된 결과가 예상되지 않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럼에도 여전히 찜찜한 마음을 감출 수가 없다.


일러스트 : 최장원


 정책적 보완은 간호 노동에 대한 사회적 존중과 간호 인력 확충에 대한 사회적 필요성이 꾸준하게 뒷받침 될 때 빛을 발할 수 있다. 현재 간호 노동을 대하는 우리 사회의 단면은 어떠한가. 내가 아플 때 충분한 의료 서비스를 사회에 기대하는 것은 당연하다. 건강 보험료를 내고 있고 추가적인 진료비용을 부담하는 환자와 보호자는 마땅히 그들이 원하는 의료서비스를 요구할 명분이 있다. 하지만 그 당연함이 의료 서비스를 제공하는 사람들의 노동의 가치 마저 부정할 수는 없다. 이 글에서 살펴보았듯이 더욱 깊게 이 문제를 들여다보면 한국 사회에서 '돌봄'에 대한 인식은 어떠했고 이의 연장선 상에 위치한 '간호'에 대한 인식은 어떠했는가.

 돌봄에 대한 인식이 '돌봄 노동'으로 전환되지 않고, 여전히 '사랑과 희생'으로 인식한다면 돌봄과 관련된 많은 일들이 무관심 속에 자리할 여지가 많다. 돌봄을 노동으로 인지함과 동시에 '돌봄 노동의 주체는 여성이어야만 한다는 생각' 역시 뿌리 뽑아야 한다. 가정에서 먼저 돌봄에 대한 인식의 변화를 이룬다면 자연스럽게 돌봄 노동을 행하는 직업에 대한 편견들을 없앨 것이다. 재평가되고 정상화된 돌봄 노동은 비로소 그 가치의 존중을 사회로부터 받을 수 있다. 비단 경제적인 보수로 돌봄의 가치를 정산하자는 뜻은 아니다. 돌봄 노동이 시민들에게 주는 혜택에 맞는, 마땅히 받아야 할 사회적 관심을 주면서 그 가치를 존중하자는 뜻이다.  

 사회의 여러 문제가 그렇듯, 무관심은 불평등을 심화시키고 문제를 악화시킨다. 지속적인 사회적 관심이 닿는 분야에서는 꾸준한 문제제기와 적절한 해결책이 만들어진다. '태움 문화'라는 사회적 문제가 결합된 독특하고 쓰라린 병원 문화를 대할 때 정책적 접근이 보다 공허하게 느껴지는 이유도 다르지 않다. 우선은 사회적 관심이 부여될 수 있는 환경을 만드는, 보다 큰 작업이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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