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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Hyunjung Kang Jan 03. 2017

개인주의자 선언 - 문유석

나를 지키기 위해, 나는 기꺼이 개인주의자가 되겠다.

* 문유석의 '개인주의자 선언'을 읽고 쓴 글입니다.


‘다름’은 물론 불편하다. 하지만 그 불편함을 가능한 한 참아주는 것, 그것이 톨레랑스다. 차이에 대한 용인이다. 우리 평범한 인간들이 어찌 이웃을 ‘사랑’하기까지 하겠는가. 그저 큰 피해 없으면 참아주기라도 하자는 것이다. “제발 우리 서로 사이좋게 지내요. 어차피 한동안은 이 땅에 다 같이 발붙이고 살아야 하잖아요. 그러니 서로 노력을 해나가자고요.” 평생 청각장애인으로 살아야 될 정도로 백인 경관들에게 무차별 구타를 당한 로드니 킹이 그로 인한 LA 폭동 때 평화를 호소하며 했던 말이다.


2016년의 마지막 날 시작한 책 두 권, 조너던 하이츠의 '바른 마음'과 문유석의 '개인주의자 선언' 두 권 모두 로드니 킹의 일화로 시작하는건 우연일까. 민주사회 정의 구현 그런걸 잘 모르겠고.. 어차피 한 번 살다 한 번 가는건 모두가 똑같으니 사이좋게 행복하게 살았으면 좋겠다. 혼자 사는건 아니니까 여력이 되는 범위에서 남에게도 잘 해주면 서로서로 좋지 않을까.


* 톨레랑스를 잘 보여주는 책으로는 슈테판 츠바이크의 '다른 의견을 가질 권리'가 있다. 자신의 사상을 말하는 것 만으로도 죄가 되던 시대에, 칼뱅에 대항하여 양심의 자유를 목숨걸고 지켰던 카스텔리오에 대한 전기이다. 두 가지 감정이 공존했는데, 하나는 '지금은 우리가 얼마나 자유로운 시대에 살고 있는가' 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나는 목숨까지 걸어야 하는 것도 아니니 다음 세대가 더 좋은 시대를 누리도록 조금이라도 기여하자' 하는 것이다. 많은 수의 국민이 정부에 대해 불신하고 있고, 도대체 어떻게 변해야 더 좋은 세상이 올지 막막하지만, 목숨을 걸거나 생업을 포기하지 않고도 더 나은 세상을 만들기 위해 조금이라도 노력할 수 있는 지금이 얼마나 좋은가.. 하는 생각도 하곤 한다.


나는 그저 이런 생각으로 산다. 가능한 한 남에게 폐나 끼치지 말자. 그런 한도 내에서 한 번 사는 인생 하고 싶은 것 하며 최대한 자유롭고 행복하게 살자. 인생을 즐기되, 이왕이면 내가 할 수 있는 범위 내에서 남에게도 좀 잘해주자. 큰 희생까지는 못하겠고 여력이 있다면 말이다. 굳이 남에게 못되게 굴 필요 있나. 고정되고 획일적인 것보다 변화와 다양성이 좋고, 개인의 선택과 자유를 선호하며, 남에게 피해를 주지 않는 한도 내에서 살아 있는 동안 최대한 다양하고 소소한 즐거움을 느껴보다가 아무것도 남기지 않은 채 조용히 가고 싶은 것이 최대의 야심이다


100% 동의하진 못하겠지만 80% 정도는 공감한다. 다음은 2015년 6월에 트레바리에서 유시민의 '어떻게 살 것인가'를 읽고 쓴 글이다.

'어떻게 살 것인가'는, '어떤 것(what)을 하며 살 것인가'가 아닌, 어떤 마음으로, 그리고 어떤 태도로 살 것인가에 대한 물음이다.나이가 들면서 점점 '나'라는 존재를 다루는 것에 점점 능숙해지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약간의 전조만 있어도 미리 감기약을 먹을 수 있게 되고, 우울한 기분은 어떻게 풀어야 하는지, 누구를 만나면 기분이 좋아질지도 잘 안다.

누구도 인생을 연습해보고 살 수 없으며, 고통과 시련을 이겨내고 깨달음을 얻는다고 해도 다음생을 사는데 도움이 되지 않는다(다음생 자체가 존재하지 않을 가능성이 더 크다). 따라서 '남에게 피해를 주지 않는다는 전제 하에' 순간순간을 소중하게 생각하고 즐기는 것이 최선이다. 다른 누구도 아닌 나 자신이 내 인생 최대의 고객이며 동시에 숙제이기도 하다. 물론, 그 과정에서 남의 행복에도 기여할 수 있다면 금상첨화라고 하겠다.

지금까지의 약 30년이 나를 잘 알아가고, 나에게 익숙해지기 위했던 시간이라면 앞으로의 5~60년은 그것을 활용해서 나의 행복을 극대화하는 과정이 되도록 살자. 이 것이 내가 생각하는 '어떻게 살 것인가'에 대한 마음가짐이다.


나는 감히 우리 스스로를 더 불행하게 만드는 굴레가 전근대적인 집단주의 문화이고, 우리에게 부족한 것은 근대적 의미의 합리적 개인주의라고 생각한다. (..) 도대체 우리 사회가 신자유주의 이전에 구자유주의라도 제대로 해본 적이 있는 사회일까? 자본주의 후의 대안을 모색하기 전에 제대로 된 자본주의라도 해본 적이 있나? 근대적 의미의 개인을 존중해본 경험 없이 탈근대 운운하는 것은 시대착오 아닐까? (..) 여기서 말하는 개인주의란 유아적인 이기주의나 사회를 거부하는 고립주의가 아니다. 개인주의는 근대 계몽주의, 합리주의와 함께 발전하며 서구사회의 근간을 형성했다. 합리적 개인주의자는 인간은 필연적으로 사회를 이루어 살 수밖에 없고, 그것이 개인의 행복 추구에 필수적임을 이해한다. 그렇기에 사회에는 공정한 규칙이 필요하고, 자신의 자유가 일정 부분 제약될 수 있음을 수긍하고, 더 나아가 다른 입장의 사람들과 타협할 줄 알며, 개인의 힘만으로는 바꿀 수 없는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타인들과 연대한다. 개인주의, 합리주의, 사회의식이 균형을 이룬 사회가 바로 합리적 개인주의자들의 사회다.


합리적 개인주의는 이기주의와는 다르며, 민주주의에 해를 끼치지 않는다(물론, 집단주의와는 상극일 것이다). 집단을 위해 개인을 희생하는 것이 당연시 되는 문화에서 과연 누가 진정으로 행복할 수 있을까. 지속가능성을 위해서는 단기적 희생을 묵과해서는 안된다. 구성원 하나하나가 행복한 개인으로 자립할 수 있을 때, 행복한 사회가 시작된다. 수단이 되어야 할 집단이 목적이 될 때, 그 목적에 동의하지 않거나 적극적으로 참여하지 개인을 '개인주의자' 또는 '이기주의자'로 매도하고 배신자로 낙인찍을 때, 집단에 속한 개인이 논리나 정의에 따라 행동하기는 어려워진다.



‘성공한 이들은 다 그럴 만한 자격이 있다’는 착각에 빠진 대중은 벌거벗은 임금님 앞에 무릎을 꿇고 모욕을 기쁘게 받아들이는 노예로 전락할 것이다

성공이나 성장은 목표가 될 수는 있으나, 면죄부가 되어서는 안된다. 노력으로 성취한 사람들과 그 결과를 존중하는 것과, 성공만 하면 그 과정까지도 합리적인 것으로 인정해주는 것은 완전히 다른 것이지만, 많은 경우에 그 둘이 혼동되곤 한다.



대단한 철학이 있어서가 아니라 체질이 소시민적이다. 야심도 없고 남들에게 별 관심이 없고, 주변에서 큰 기대를 받는 건 부담스럽고, 싫은 일은 하고 싶지 않고 호감 가지 않는 사람들과 엮이고 싶지 않다. 내 일을 간섭 없이 내 방식으로 창의적으로 해내는 것에 기쁨을 느끼고, 내가 매력을 느끼는 소수의 사람들과 친밀하게 지내는 걸 좋아하고, 심지어 가끔은 가족으로부터도 자유로운 나만의 시간을 갖길 원한다.

시간이 갈수록 나도 이런 경향이 더 생기지 않나 싶다. 야심도 없어지고, 싫은 건 피하게 된다. 좋아하는 소수의 사람들과 만나는 것이 뻑적지근한 모임보다 즐겁고, 새로운 사람을 동시에 많이 만나는 것은 너무 많은 에너지를 필요로 하여 때론 숨어버리게 된다. 가족과 함께 있는 것이 행복하지만, 때로는 혼자이고 싶다.


평생 하루하루를 분노, 절망, 투쟁, 당위만으로 채우는 것을 신성하게 생각하는 이들은 불행하다. 그리고 그들이 이끌고 가는 곳에 행복한 유토피아가 있을 리 없다. 나는 소박하게 그리고 다양하게 일상 속의 작은 행복을 채워가는, 그러면서도 마음이 가는 일에는 주저 없이 자기 힘닿는 범위에서 참여하는 이들이 이끄는 곳으로 가고 싶다. 인류 역사에는 언제나 비극이 가득했지만, 그 어떤 불행한 시대에서도 인간이 행복하고자 하는 것은 죄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사소한 행복을 아는 이들과 만들어가는, 날마다 조금씩 더 행복한 세상이, 투쟁과 혁명으로 쟁취하는 유토피아보다 더 현실적이다.



책, 글쓰기, 여행, 인간관계. 모두 내게 중요한 행복의 원천이다. 하지만 내가 맡은 일에 최선을 다하면 누군가에게 작은 도움이라도 줄 수 있다는 것 역시 이에 못지않은 과분한 행운이다. 감사할 따름이다


내 행복의 원천은 책, 여행, 인간관계, 운동. 정도 되려나.. 글쓰기도 추가하고 싶다. 내 일을 하면서 누군가에게 도움이 된다면 그것도 정말 행복할 것 같다.



법관들도 말에 대해 주의하고 반성하기 위해 전문가의 강의를 듣는다. 그때 배운 것이 있다. 데이의 「세 황금문」이다. 누구나 말하기 전에 세 문을 거쳐야 한다. ‘그것이 참말인가?’ ‘그것이 필요한 말인가?’ ‘그것이 친절한 말인가?’


이 중 첫 두 문을 거치는 말만 한다고 해도 많은 것이 달라질 것이다. 거짓을 말해서는 물론 안되겠지만 참말이라고 해서 모두 해서도 안된다. 친절한 말을 하려다보면 참말인지 아닌지의 경계가 모호할 때도 있다. 필요하지 않은 경우였다면 아부나 가식이 될 수 있겠고, 필요한 경우라면 선의의 거짓말이 될 수도 있겠다. 가장 많은 경우는, 말을 해놓고 '이게 필요한 말이였나..' 하고 후회하는 것이다.



이런 시대일수록 집단의 논리에 맹목적으로 순종하는 건 위험하다. 어느 집단도 이 복잡하고 급변하는 세계에 대한 완벽한 해답을 갖고 있지 못하다. 남의 판단으로 자기 판단을 대체하지 말고 각 개인이 눈을 부릅뜨고 세상의 불편한 진실을 있는 그대로 직시해야 한다. 실사구시 정신이 필요하다. 막연한 믿음보다 실증적 근거를 들어 토론하고 최선이 안 되면 차선, 최악보다는 차악을 선택할 수 있어야 한다


어떤 사안에 대해 자세히 알려고 하지도 않고 언론이나 미디어의 자극적인 컨텐츠만 소모하고 불나방처럼 따라다니다보면 아는 것은 갈수록 얄팍해지고, 시야는 점점 협소해진다. Fact와 opinion을 구분하고, 사건의 배경이나 드러나지 않는 역학관계를 읽어내려면 많은 연습이 필요하다. 어느정도 안다고 해서 자만하고 판단하려 뛰어드는 것도 위험하다.



지금 그 사회에서 다수의 의견이라고 항상 옳은 것은 아니다. 만약 다수의 의견이 늘 옳다면 인류는 아직도 천동설을 믿고 잔인한 사적 보복을 허용하며 인종 간 결혼은 금지하고 성적 소수자를 박해하고 있지 않을까. 다수결의 원칙을 중시하는 민주주의에서 다수에 대한 정교한 견제장치도 같이 마련하고 있는 이유다.


인간은 기본적으로 타인의 인정을 받고 싶어하는 욕구를 가지고 있으며, 다수에 속하지 않을 때 불안감을 느낀다. 집단사고(groupthink)가 일어나게 되면 다양한 의견이 나오지 못하고, 다수의 의견에 오류가 있을 때에도 이를 합리화하며 오류가 없다는 환상을 가지게 된다. 다른 의견을 가지거나 가지려고 하는 싹만 보여도 압력을 가하고, 결과적으로는 개개인이 자기 검열을 하기에까지 이르는 것이다. 다른 의견을 가질 수 있음을 인정해야하고, 상대방이 나와 다른 의견을 가지고 있다는 이유로 비난하거나, 나와 같은 의견을 가진 자들을 모아 압력을 가해서는 안된다. 다수가 균일한 사고를 가지고 있는 것 만큼이나 위험한 것도 없다. 이는 자유롭고 행복한 사회에서도 마찬가지이다.



집에 돌아가며 생각했다. 한 개인으로 자기 삶을 행복하게 사는 것만도 전쟁같이 힘든 세상이다. 학교에서 살아남기 위해, 입시경쟁에서 살아남기 위해, 취업 관문에서 살아남기 위해, 결혼시장에서 살아남기 위해, 직장에서 살아남기 위해, 일하며 아이를 키우는 고통에서 살아남기 위해, 그 아이가 다시 이 험한 세상에서 살아남도록 지키기 위해. 그런 개인들이 서로를 보듬어주고 배려해주는 것은 얼마나 힘든 일인가. 또 그렇기에 얼마나 귀한 일인가. 우리 하나하나는 이 험한 세상에서 자기 아이를 지킬 수 있을 만큼 강하지 못하다. 우리는 서로의 아이를 지켜주어야 한다. 내 아이를 지키기 위해서 말이다.


나를 지키기 위해서 남을 지켜주어야 한다. 내가 행복하기 위해서 남이 행복할 수 있는 권리를 존중해야 한다. 행복해지려면 무엇을 해야, 또 하지 않아야 할까, 끊임없이 고민해봐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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