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길 닿는 대로 가는 가나자와 구경
가나자와의 숙소는 아주 깔끔하고 배울 것도 많다 느꼈던 게스트하우스였는데, 재미있는 사람들도 많았다. 그중에 한명은 아마 남미에서 온 듯한 기술자로 보이는 어느 외국인이었는데, 일본에서 잠깐 일하는 도중 짬을 내서 여행을 하는 듯 했다. 근처 여행도 하는지 한국에도 왔다고 했는데, 40대의 괴팍하면서도 유쾌한, 활력적인 아저씨가 쏟아내는 과격한 유머에 놀란 것이 한 두번이 아니었다. 가나자와의 두번 째 아침에도 이 외국인의 아찔한 유머를 들으면서 점심을 넘겨서야 게스트하우스를 나섰다.
사실 나는 여행을 다닐 때 구체적으로 일정을 정하지 않는 편이다. 일상생활에서 대부분은 어느정도의 계획을 가지고 다니지만, 여행에서는 아주 간단한 계획만 짠다. 어디에 어떻게 가서 어디서 자고, 꼭 해봐야 할 것은 어떤 것이 있고 정도이다. 그 외에 세부적인 내용은 가서 정하는 편이다. 내가 게을러서 그런가 싶다가도, 예약해야 할 것은 꼬박꼬박 하는 것을 보면 꼭 그런 것 같지는 않다. 아마 아무리 일정을 잘 짜도, 현지의 날씨나 상황이 크게 바뀔 수 있기에 현지에 도착해서 정하려 하는 것은 아닌가 싶다.
그래서 가나자와에서도 이런 유명한 것이 있다 라는 이야기만 듣고, 아무 생각 없이 걸어다니면서 도시를 구경했다. 보통 구글 지도를 통해 대략적인 지리를 파악한 다음, 이런저런 곳들을 검색하면서 볼 만한 곳들을 찾아보고 다녔다.
맨 처음에 구경했던 곳은 작은 골목길 주위로 전통가옥들이 몰려 있는 곳이었는데, 그 옆으로 꽤 큰 물줄기가 흐르고 있었다. 유속도 꽤 빨라서 물 흘러가는 소리가 크게 들릴 정도였는데, 골목길 안으로 들어가니 좁은 골목길 양 옆으로 옛날 건물이 줄지어 있는 것이 보였다. 그 뒤쪽으로는 높진 않아도 현대적인 건물들이 올라가 있었는데, 나를 포함한 관광객들이 사진을 찍기에 아주 좋았다.
구경을 하고 나서 바로 근처에 있는 쇼핑몰 같은 것으로 들어갔는데, 아빠에게 부탁받은 물건을 사기 위해서였다. 흔히 일본 장난감으로 누구나 한번쯤은 봤을, 켄다마를 찾으려 했다. 갑자기 아빠가 왜 켄다마를 사다 달라고 했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여하튼 나는 큰 마트라면 켄다마가 있을 것 같아 슬쩍 둘러보다 도저히 찾지 못하여 직원에게 물어보았다. 더듬더듬 일본어로 겨우 물어보니 직원은 기다리라고 하고 나서 사라졌고, 나는 근처의 매대에 있는 물건을 구경했다. 왜인진 알 수 없지만, 쥐며느리처럼 생긴 곤충을 닮은 박스가 있었다. 아마 간식 상자가 아니었을까 싶은데, 신기해서 찍어둔 사진은 인터넷에 올리기도 꺼려질 정도였다.
직원을 기다리다가 시간이 조금 걸려 못 찾았나보다 하고 자리를 떠서 근처를 돌아보고 있는데, 아까 봤던 직원과 다른 직원이 나를 찾았는지 근처를 두리번 거리다가 눈이 마주쳤다. 손에는 켄다마가 들려 있었다. 고맙다고 말한 뒤 선물로 가져갈 켄다마를 챙겼다. 그러고 보니, 게스트하우스에서 켄다마를 사러 간다고 했더니 그곳에서 오래 머물고 있는 것 같은 어떤 일본인이 설명을 해 주었다. 켄다마는 칼과 공을 합친 말이라고 했던가. 아마 그 사람은 학교에서 언어 선생님을 하고 있다고 했었던 것 같다. 그 말을 영어로 설명해 준 일본인과 내가 동시에 아 그렇구나~ 하며 들었다.
물건을 모두 사고 나서 밖에 나와 조금 걸으니 아까에 비해 현대적인 골목을 지나게 되었다. 낮 시간대라 그런지 대부분의 가게가 문을 닫았지만 간판과 골목 구경을 하는 것에는 큰 문제가 없었다. 아침에는 조금 흐렸던 날씨가 점점 맑아지며 하늘에 큰 구름이 지나갔다. 좁은 골목길 사이로 보이는 구름과 다양한 간판을 구경하며 걸어가다 보니 다리가 나왔다. 길은 다리를 건너는 길이 아니었지만, 다리 위에서 멋진 광경을 볼 수 있을 것 같아 일부러 건너갔다 왔었다. 다리에서는 가나자와 주위의 산과 구름이 잘 보였다.
이날 점심은 게스트하우스 직원에게 물어봐서 추천받은 디저트 가게에서 간단하게 먹을 생각이었다. 어떤 디저트냐고 했더니 일본 전통 느낌의 디저트라고 해서 화과자 같은 것을 예상하고 간 그곳에는, 의외로 대기 인원이 있었다. 대기 명부에 이름을 적어야 하는데 일본어로 적을 줄을 모르니, 간단하게 내 성을 영어로 적었다. 정말 간단한 영어단어이고 천체와 같기 때문에 쉽게 부를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러고 보니 옛날 내가 여행을 다닐 때 겪은 일이 생각났다. 나는 여행을 다닐 때 내 이름을 보통 내 성을 따서 소개하는데, 옛날 외국에서 그 이름으로 체크인을 했더니 게스트하우스 직원이 '오, 네 이름이 Moon(달)이니? 반가워 내 이름은 Sun(해)야' 라고 농담을 던진 적이 있었다. 그땐 농담이라는 것을 알지 못해서 웃지 못해 아쉬웠지만.
잠시 기다렸다가 다행히도 내 이름을 잘 읽은 직원의 부름을 받아 들어가니, 내가 알던 케이크나 달달한 과자류 같은 디저트 가게가 아닌 처음 보는 메뉴가 있었다. 지금 생각하면 아마 한국에서도 물방울떡이라는 이름으로 유명한 와라비모찌였던 것 같다. 이곳은 고급 차와 와라비모찌를 내는 것이 주력 메뉴였는데, 빙수도 유명한 듯 했다. 빙수 같은 경우는 얼음을 얇게 갈아 종잇장처럼 쌓아 나왔는데, 다른 테이블에서 먹는 것을 힐끔힐끔 보다 보니 맛이 궁금해졌지만 먹을 수가 없어 아쉬웠다. 2시가 넘은 시간 방문해서 그런지 매진된 메뉴가 굉장히 많아서, 스테디셀러인 듯 한 와라비모찌를 주문했다.
잠시 시간이 지나자 주문한 와라비모찌가 나왔다. 젤리에 가까운 물렁한 식감의 떡과 콩가루, 그것을 찍어 먹을 시럽이 나오는데 시럽은 흑당 시럽 같았다. 같이 먹는 차가 나오는데, 나는 차를 잘 몰라서 차가 맛있는지 어떤지는 잘 몰랐다. 떡을 콩가루에 찍은 뒤 시럽에 찍어 한입 먹어 보니, 맨 처음엔 이게 뭔가 싶은 생각이다가도 생각해 보니 맛이 괜찮았다. 떡 자체는 특별한 맛이 없는 것 같아도, 고소한 콩가루와 짙은 흑당시럽의 맛에 조화가 잘 어울린다. 먹다 보면 남을 수 있는 맛은 차로 깔끔하게 정리된다.
나는 떡을 한 점씩 찍어 먹었지만, 주위 사람들을 또 조금씩 보니 한번에 섞어서 먹는 경우가 일반적인 것 같았다. 나중에는 나도 조금 섞어 먹어 봤지만, 아마 그 중에 한 점씩 찍어 먹은 사람은 아마 나밖에 없었을 것 같다.
신기한 음식을 먹어본 뒤, 또 아무 생각 없이 가 보기로 한다. 가나자와에 유명한 정원이 있다는 말을 듣고 한번 가 보기로 했다. 원래는 날씨가 좋지 않을 것 같아 별로 볼 것이 없을 듯 해 흥미가 없었는데, 그래도 날씨가 조금 좋아져 한번 가 봐도 좋겠다는 생각이 든 것이다. 정원까진 별로 멀지 않아 금방 도착해 입장료를 내고 들어가 보니, 연못과 나무가 군데군데 배치된 정원이 나온다.
문득 구경을 하다 보니 나는 잘 조성된 자연을 보는 것에는 크게 흥미가 없나 하는 생각도 들었다. 큰 기대를 하지 않고 왔지만 정원을 둘러봐도 나에게는 크게 매력적이지 않았다. 그렇다고 해서 내가 또 자연경관을 좋아하지 않는가 하면 그것도 아니었다. 그런데 이때 정원을 구경하던 나는 너무 지루해서, 최대한 빨리 한 바퀴를 돌고 나가고 싶다는 생각뿐이었다.
어쩌면 날이 아주 좋지는 않아서 약간 흐린 상태의 정원을 봐서인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정원을 구경하던 도중에, 잠깐 빛이 쨍쨍하게 든 순간이 있었는데 그때 정원의 나무 사이를 구경하다가 마음에 드는 사진을 하나 찍을 수 있었다. 그래도 마음에 드는 사진을 하나 남겼으니, 정원을 방문한 성과는 충분했던 것 같다.
정원 구경을 마치고 조금 걸어가면 갈 수 있는 곳에 가 보기로 했다. 옛날 건물이 몰려 있는 곳인데 분위기가 좋다고 해서 알아봐 둔 곳이었다. 버스를 타고 갈까 했는데 버스를 타기에도 애매한 거리라, 그냥 마음 편하게 주위 구경을 하며 걸어가 보기로 했다. 목적지에 가다 보니 아까 낮에 봤던 것 같은 강을 건넜는데, 해가 질 때 쯤 되니 하늘에 노을이 조금씩 생기고 있었다.
그렇게 조금 더 걸어서 도착한 곳이 히가시차야 라는 곳이었다. 찻집들이 몰려 있는 곳으로 유명한데, 가나자와의 기념품을 파는 가게와 찻집들이 몰려 있다고 했다. 골목은 작았지만 천천히 돌아보기 좋았는데, 가장 큰 골목 뒤쪽으로 언덕이 있고 그 옆으로 낮은 전톡 목조건물이 있는 광경이 인상적이었다. 보통 그 곳에서 사람들이 많이 사진을 찍곤 했는데, 어떻게 된 것인지 나는 사람이 한 명도 없는 사진을 운 좋게 찍을 수 있었다.
그런데 내가 인터넷으로 봤던 가나자와의 사진은 낮은 목조건물 뒤로 높은 빌딩이 올라가 있는 것이었는데, 자세히 보니 히가시차야 뒤쪽의 언덕 위에 올라가면 그 풍경을 볼 수 있을 것 같았다. 골목을 천천히 지나 언덕을 올라가니, 중간에 아주 멋진 풍경이 보였지만 각도가 좋지 않아 사진을 찍을 수 없었다. 부득이 하게 언덕 끝까지 올라가야만 했는데, 언덕 끝까지 올라가니 내가 인터넷에서 봤던 그 모습을 볼 수 있었다.
해가 천천히 저물어 가는 모습이 예뻤지만, 언덕 주위는 작은 숲으로 둘러싸여 있었고 모기의 천국이었다. 나는 사진을 한 번 찍을 때마다 쓰고 있던 모자를 몇 번 씩 휘둘러 가면서 모기를 쫒아내야 했다. 마음 편히 구경을 하고 싶었지만 쉽지 않았기에, 사진만 찍고 바로 내려와야만 했다.
언덕에서 내려오니 아까보다 조금 더 어두워져 있어서, 히카시차야의 건물들에는 불이 들어왔다. 주황색 빛을 밝히는 건물들을 구경하며 사진을 찍다가, 좀전에 건너왔던 다리를 건너니 아까보다 풍경이 조금 더 예뻐 보였다. 여전히 물결 없는 강의 수면에는 아까보다 좀 더 노을이 든 하늘이 비쳤다. 이때 사진은 찍지 못했지만, 까마귀들이 까악까악 거리면서 서울의 비둘기마냥 무리지어 나는 것을 볼 수 있었다.
나는 무계획이라고 생각했지만, 어떻게 보면 계획있는 것 아니었나 싶은, 가나자와의 하루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