썰이 아닌 감정이 중요한 썰예능
나는 티비를 잘 보지 않지만 엄마는 티비를 잘 본다. 작업용 컴퓨터가 거실에 있기 때문에, 내가 컴퓨터를 이용해 작업을 하면 엄마는 티비를 보곤 한다. 티비에서 뭐가 나오던 간에 나는 잘 보는 편이 아니지만 작업에 신경써야 하는 정신력이 흐려질 때가 많다. 티비에서 무언가를 말하면 좌우지간 신경을 쓰게 되기 때문인 것 같다.
그래서 자의반 타의반 엄마가 보는 티비를 같이 보게된다. 엄마는 사극이나 여행 프로를 자주 보지만, 가끔은 예능을 보기도 한다. 옛날에 있었던 범죄나 역사적인 대형 사건들을 예능인데, 범죄나 사건이 나오는 것이 어떻게 예능이 될 수 있을까 싶지만 요새는 조금 특별한 예능들이 있어 가능하다. 바로 썰 예능이다.
옛날엔 역사다큐멘터리의 웅장한 음악과 함께 혹은 범죄수사 프로그램의 음산한 배경음악과 함께 전달받을 수 있었던 다양한 이야기들이, 조금 다른 방식으로 예능에 포함된다. 특정 사건이 있고, 특정 사건에 대해 해설하는 전문가가 있다. 그 전문가의 이야기를 듣고 맞장구 치거나 사견을 덧붙이고 분위기를 주도하는 연예인 청중들이 있다. 종종 이야기에 대해 증언하는 경험자가 나오기도 한다.
전문가는 없을 수도 있지만, 반드시 등장하는 것은 바로 이야기를 듣고 다양한 반응을 보이는 연예인 청중들이다. 보통 청중을 대상으로 하던 예능이, 청중의 반응까지 내부에 포함시켜 컨텐츠로 만드는 것이다. 이른바 썰 예능이다.
요새는 썰 예능의 종류가 다양해서, 연예인 청중이 특정 썰을 가지고 자기들끼리 이야기 하는 것도 있고, 전문가가 해설해 주는 썰을 듣고 연예인 청중이 의견을 더하는 것도 있다. 썰예능 이라기보다는 강의에 가깝긴 하지만, 아예 강의의 형식을 채택하고 대신 연예인 청중의 의견과 리액션을 좀 더 풍부하게 더하는 형태도 있다.
썰예능의 특징은 청중인 연예인들이 보여주는 폭 넓은 리액션과 소감이다. 너무했다, 나빴다, 좋았다, 통쾌하다 등의 감정적인 표출이 예능의 주제가 되는 썰을 받아들이기 쉽게 만들어 준다. 웅장한 역사의 대서사시나, 소름끼치는 살인자의 이야기가 가지는 무게감을 이빨로 잘근잘근 씹어 받아들이기 쉽게 해 주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게다가 청중의 반응이 포함된 썰의 이야기는 단순히 썰이 직접적으로 전달될 때에 비해서 솔직하고 진실되게 느껴진다. 시청자 입장에서 썰을 다큐멘터리로 보나 시사고발 프로그램으로 보나 썰예능으로 보나 객관적인 진실은 같겠지만, 썰예능의 청중들이 다양한 리액션을 보여주면서 자기들끼리 이야기 하는 것을 몰래 지켜본다는 느낌이 들면, 그 이야기가 더 진실되게 느껴지게 된다.
결국 썰예능은 기존 예상한 시청자들을 프로그램 구조 안에 끼워넣으면서, 청중들의 다양한 감정이 적극적으로 드러나도록 유도한다. 다루고 있는 이야기가 더 받아들여지기 쉽도록 하고, 더 솔직하게 느껴지도록 한다. 시청자는 썰예능을 보며 내가 느끼는 감정이 썰예능 안의 청중들이 느끼는 감정과 같구나, 하면서 동질감을 느끼며 더 이야기에 몰입하게 된다.
하지만 나는 묘하게 썰예능이 불편했다. 썰예능이 전달하는 이야기는 객관적 사실일 뿐 그 사실에는 감정이 포함되어 있지 않을 터였다. 그런데 썰예능에서 다루는 이야기에는 감정이 포함되어 있는 것 같았다. 그 썰예능을 기획한 사람이 의도했을 감정. 어느 시점에서 어떻게 화를 내고, 어떻게 답답해하고, 어떻게 통쾌함을 느껴야 하는지. 썰예능을 보고 있는 시청자가 감정적으로 몰입하도록 자 이쯤 되면 너도 화나지? 빨리 우리 프로가 보여주는 사람들처럼 너도 화내, 하고 이야기 하고 있는 것 같아서.
전달하고 있는 이야기의 사실성이나 해석 방향에 대한 것은 별개로, 썰을 푼다고 하지만 사실 보고 있는 사람들의 감정을 뽑아내는 것에만 집중하고 사실 그게 중요한 것은 아닐까 싶어서. 그 감정을 자극하는데에, 썰예능에서 다루고 있는 역사적 사실이나 범죄들은 그저 자극제에 불과한 것이 아닐까 싶어서.
레몬이라곤 하나도 들어가지 않은 합성레몬음료를 먹이면서, 유기농 레몬만을 이용한 레모네이드 맛이 어떠냐고, 맛있지 않냐고, 빨리 맛있다고 말하라고 채근하는 것 같은 느낌. 짜여진 무대 위에서 연기해야만 하는 것 같은 이상한 느낌이, 내가 썰예능을 볼 때마다 느끼는 것이었다. 사람들이 감정적으로 동요하도록 요구하고 그러기 위한 이야기를 세팅하는 프로그램.
낮은 부담감으로, 마치 진짜같이 받아들여지게 하면서. 하지만 짜여진 무대 위에서 특정 감정을 추출당하는 것과 같이. 내가 중요하게 생각하는 이야기의 사실 자체가, 사람들에게서 특정 감정을 고양시키는 목적으로 이용되는 것 같은 느낌. 그것이, 내가 썰예능이 기묘하다고 느낀 이유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