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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문현준 Jun 30. 2024

주임아 공기청정기 조심해라

나중에 되어서야 이해할 수 있었던 그 말

옛날에 잠실 쪽의 작은 무역회사에서 일을 했었다. 물론 내가 알고 있는 회사는 그런 것이 아니었는데, 사원증 있고 엘레베이터 있고 구내식당 있고, 익명 커뮤니티 게시판에서 회사 이름 들먹이면서 활동할 수 있는 흔히 말하는 회사 라고 하기에는 매우 작은 소규모의 조직이었다. 내가 일을 시작했을 때 인원이 전체 4명이었으니, 흔히 회사라고 말하는 회사라고 하기엔 좀 애매한 느낌이었다. 




무역 회사에서 다루는 아이템은 먼지가 많이 발생하는 것이었는데, 그래서인지 사무실 구석에 공기청정기가 있었다. 일렬로 쭉 나열되어 있는 자리 맞은편 구석에 공기청정기가 항상 돌아갔는데, 이게 정말 돌아가는 것인지 안 돌아가는 것인지는 알 수 없었다. 무역 샘플이 여기저기 산처럼 쌓여 있고 정리를 하기보다는 적재를 해 두는 것에 가까웠던 어수선한 사무실 한 구석에 공기청정기는 항상 있었다.




사장은 항상 나에게 주임아 공기청정기 조심해라 라고 말했다. 지나가면서 발로 건드리거나 하는 일이 없게 하라는 것 같았다. 근데 공기청정기 위치가 샘플을 옮기거나 혹은 사무실 내부를 왔다갔다 할때 발로 건드리기 딱 좋은 위치에 있어서, 지나가면서 발로 툭툭 건드리기에 좋은 위치에 있었다. 나는 공기청정기를 발로 건드리는 일이 많지 않았지만, 생각해 보면 공기청정기를 발로 건드린다고 해서 공기청정기가 망가지는 것도 아니고, 그저 발 끝에 조금 닿는 정도인데 몇 번씩이나 이야기 하는 것이 조금은 유별나고, 예민하고, 이해가 되지 않았다.




시간이 많이 지났다. 을지로 쪽에서 시작한 공간에는 내가 의도한 중문이 있었는데, 외부 공간과 내부 공간을 가로막으면서 베이킹 하는 공간을 구분해 주는 문이었다. 디자인이 아주 중요하다고 생각해서, 내가 생각한 것과 맞는 디자인으로 시공업체에 의뢰하여 진행 가능한 것으로 주문 제작을 한 것이었다. 비록 완전히 내가 원하는 수준의 디자인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내가 할 수 있는 선택에서는 최선의 선택으로 진행했던 문이었다. 




그런데 공간 오픈 초기에 친구들이 놀러왔을 때, 친구중에 한 명이 문을 발로 밀어서 열었다. 사실 문에는 도어스토퍼도 설치되어 있어서 문이 빠르게 열리거나 닫혀서 파손되는 것을 막아 주긴 하지만, 나는 항상 문을 열고 닫을 때 손으로 조심히 열고 닫았기에 문을 발로 밀어서 열려고 하는 친구를 보니 갑자기 매우 불편해졌다. 다들 술을 좀 먹은 상태이기에 와서 그럴 수도 있겠다 싶었지만, 그래도 그걸 보고 나서 거기서 문 발로 열지 말라고 바로 이야기를 해야 하나 조금 고민했다.




그러고 나서 나중에 내가 고민했던, 문을 발로 열지 말라고 이야기 하려고 했던 것이 다시 생각해 보니 그때 사장이 나에게 말 했던 공기청정기 조심하라는 이야기와 비슷하게 느껴졌다. 거기까지 생각하고 나니, 왜 그때 사장이 나에게 그렇게 말을 했는지 알 것 같았다. 물론 공기청정기는 발로 조금 건드린다고 해도 정상 작동하고, 을지로에 있는 중문은 나무 안쪽에 유리가 있어서 발로 충격을 줬다가는 파손이 될 수도 있다는 차이가 있긴 해도 말이다. 




문득 시간이 한참 지나서, 나중에 다른 입장에서 그 말을 생각할 때가 되어서야, 옛날에 들었던 말들이 이해가 되고 있었다. 




이상하고 예민하고 까탈스럽다고 느껴졌던 말들이, 이해가 되는 때가 있었다. 2024 03, 서울 종각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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