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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황훈주 Dec 09. 2024

그럼에도 책이 존재해야 하는가

책을 싫어하는 손님에게 책을 팔기_모리미 도미히코

고백한다.

나 또한 다시 10대로 돌아간다면

펜 대신 카메라를 잡았을 거다.

글 보단 영상이 돈이 되는 세상이다.


'그럼에도 책이 존재해야 하는가'


나로서도 궁금한 일이다.

기묘한 그의 책방에서 책 레시피를 훔쳐온(?) 이유기도 하다.

나 또한 그 답을 듣고 싶었다.







날이 고요하다. 사람들은 나이가 들수록 두려움이 많아지는데, 두려움 크기에 비례해 기념일은 늘어나고 있다.

명절을 지키는 마음도 그와 다르지 않을 것이다. 묘한 흥분감과 차분함이 뒤섞인 겨울바람이 부는 명절 전날이다.


저녁이 되고 어두움이 푸르스름하게 거리를 덮는 중이었다.

책방을 마감하려던 찰나, 덩치 큰 사내가 서점 문을 열었다. 

두꺼운 옷을 입고 있는 그의 목소리는 무거웠고, 음울했다.


"책을 추천해 준다 들었습니다."

"어떤 책을 원하십니까?"

"저는 책을 좋아하지 않습니다."


그는 더 이상 말을 하지 않았다. 그에게 따뜻한 차 한 잔을 건네고 더 이상 나도 말을 묻지 않았다.

그는 책방 의자를 찾아 앉았는데 그대로 마치 돌이 되어버린 듯 꼼짝하지 않고 오직 시선은 나를 흘겨보고 있었다. 책을 싫어하면서 책을 추천하는 책방에 오다니. 보통 손님은 아니다.


기념일로 거리에 즐거움이 가득할수록 어두운 자들은 그 빛을 피해 골목 이곳저곳으로 숨곤 하는데 그들 중 한 명이 분명했다. 즐거움에 끼지 못하는 자들이다. 소외된 자들이라고도 하는, 어둠을 먹는 자들은 두려움 끝에 분노를 찾곤 했다. 책방 문 앞에 둔 램프에 불빛이 약해졌다 싶었는데 다시 고쳐야겠다. 

어둠을 먹는 자들에겐 좋은 약을 입에 물려 돌려보내야 한 해 복이 들어온다 한다. 필시 마음에 드는 책을 찾아줘야 할 것이다.


서고에 들어가 여러 책을 만지다 몇 권을 꺼내 카운터로 가져갔다. 덩치 큰 사내는 의자에 아까 모습 그대로 앉아 있었다. 설마 정말 벌써 돌이 돼버린 건 아닐까. 다행히도(?) 그는 서고에서 나온 내 모습을 보고 조금 자세를 고쳐 앉았다.


"가져온 책은 모리미 토미히코 책들입니다."

"명절날에 일본 책이군."

"애석하게도 그리 되었군요."





모리미 토미히코. 그는 정말로 다른 차원의 문을 수없이 만들어내는 재주가 있는 자다. 그가 스스로도 말했다.


우리 집 근처에 다른 세상으로 통하는 통로가 있을지도 모른다는 감각, 어떤 계기 하나로 문득 내가 다른 세상에 떨어지게 될지도 모른다는 감각, 부지불식의 행방불명이 내게도 일어날지 모른다는 감각만이 나의 ‘판타지’인 것이다.   《사람이 귀엽게 보이는 높이》 중에서


그는 인간이 이해할 수 있는 영역과 인간이 이해할 수 없는 영역 경계선을 그려보는 작자다. 고약한 노인의 취미라고 생각할 법 하지만 그의 나이가 아직 젊다는 것을 생각할 때, 책 수집가인 나로선 반가운 일이다. 아직 그가 열지 않은 수많은 차원의 문이 기대되기 때문이다.


책을 싫어하는 이들은 있어도 이야기를 싫어하는 이들은 없다. 


이런 시대에 책방이 왜 존재해야 하냐 묻는 질문에 내 대답은 언제나 동일하다. 글 읽기를 싫어하는 거지 재밌는 이야기 싫어할 사람은 없다고.


"이 작가의 책은 대부분 영화화가 아닌 애니메이션으로 만들어졌답니다."

"네?"

"작품 이야기는 너무 재밌는데 영화로는 표현할 수 없는 환상적 요소가 많다고나 할까요. 그러니 애니메이션을 만드는 겁니다. 혹시 그거 아십니까. 콜라병을 던지면 펭귄이 된다는 그런 이야기."

"알고 싶진 않네요."

"그것도 이 작가가 쓴 이야기입니다. <펭귄 하이웨이>죠. 일단 재밌습니다. 그리고 책만 할 수 있는 기법들이 많이 담겨 있죠."

"그렇군요."


어른의 두려움은 새로운 문을 더 이상 열 힘이 없다는 것이다. 

어릴 적 동네 어딘가에 숨겨져 있는 차원의 문이라던지, 마법사들의 비밀통로가 어딘가에 있을 거라 믿는 그런 힘이 사라진, 다른 차원의 문을 열지 못하니 내 세계에 있는 이들과 연결되길 원한다.

혹 그런 두려움이 있다면 모리미 토미히코가 가장 적절한 처방이다. 어른이 되어서도 새로운 차원의 문을 계속 열고, 또 수많은 이야기가 쏟아져 나올 수 있다는 걸 알려줄 수 있는 가장 좋은 책들이다. 




"헌책방의 신이란 존재를 아십니까?"

"처음 듣습니다."

"책은 서로 이어져 있습니다. 만날 책은 반드시 만난다고 하지요. 그걸 인연이라고도 하기도 하고요. 예를 들어보자면 이렇습니다.


<셜록홈스> 작가는 코난 도일. 그는 프랑스 작가 '쥘 베른'의 영향을 받아 <잃어버린 세계>라는 SF 소설을 쓴다. 쥘 베른은 알렉산더 뒤마를 존경했다. 그래서 <아드리아 해의 복수>를 썼다. 뒤마의 소설 <몬테크리스토 백작>은 <암굴왕>이라는 이름으로도 알려져 있는데 이것을 일본에서 처음 번역한 작가는 구로이와 루이코. 그는 <메이지 바벨탑>이라는 소설에 작중 인물로도 등장한다. 그 소설 작가는 야마다 후타로로 그는 <전중파암시장 일기>라는 소설에서 <귀화>라는 소설을 '우작'이라는 한마디로 참수시킨다. 그것을 쓴 것이 요코미조 세이시. 그는 젊은 날 '신청년'이라는 잡지의 편집장이었는데, 그와 함께 편집 일을 한 사람이 <안드로규노스의 후예>를 쓴 와타나베 온. 그 와타나베 온의 교통사고를 '춘한'이라는 글로 추도한 것이 다니자키 준이치로.... 책은 결국 다 이어집니다. 


아. 이 이야기는 <밤은 짧아 걸어 아가씨야>에 나오는 대목이니 한 번 읽어보시죠."


덩치 큰 사내는 멍하니 있다 모리미 토미히코 책 몇 권을 사갔다. 

아마 마음에 들었을 것이다.

책 처방엔 실패한 적도 없지만

모리미 토미히코 책은 실패한 적이 더욱이 없이 때문이다.



이야기는 여기서 끝났다.

과연 그 덩치 큰 사내는 책에 만족했는지에 대한 후기가 없어 아쉽지만

본디 처방전이 주는 사람 이야긴 있어도 받는 이에 대한 이야기가 없으니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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