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연의 실을 밟아가자
선거 날이었다.
“쉬는 날이네.”
직장인 친구는 짧은 숨을 내쉬었다. 그래. 모처럼 쉬는 날이었다.
“정말 아무것도 안 할 거야. 정말로 쉴 거야.”
쉬는 날엔 그저 집에 가만히 누워 있는 것이 진정한 휴식이라 느끼는 친구와 다르게 나는 뭐든지 해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아직도 실업자로 딱히 하는 것도 없으면서 아직도 직장인의 관성이 남았는지 토요일이 기다려지고, 일요일 밤은 우울하고 어쩌다 찾아온 휴일은 설렌다. 그동안 가 보려 했지만 가지 못했던 곳들을 휴일을 핑계 삼아 가기로 했다. 어쩌면 친구도 푹 쉬고 있었더라면 모처럼 찾아온 쉬는 날에 재밌는 일을 꾸몄을 지도 모를 일이다. 내 능력의 70%로만 일하고 30%는 새로운 일을 할 수 있도록 남겨 두라는 옛 선배의 말이 무엇인지 조금은 알 것 같다. 물론 능력 100%를 다 쓰고도 어디 남은 것 없는지 쥐여 짜야 하는 것이 요즘 직장 생활이긴 하지만.
아침 일찍 일어나 보문산을 올랐다. 왠지 보리밥이 생각날 땐 보문산을 찾는다. 산 밑엔 보리밥을 파는 집이 많다. 이건 대전 뿐 아니라 어느 지역 산 밑을 가도 그렇다. 예전 보릿고개라는 말이 있을 정도로 가난한 음식이었던 보리밥을 팔 생각은 어떻게 했을까.
산을 내려와 조금 찾아보니 1980년대에 등산 붐이 일었다. 당시 산에 올라가 점심을 지어 먹는 것이 유행이었다고. ‘쓰레기 가져오기 운동’, ‘산악 정화 캠페인’이 활발했던 시기도 이와 비슷한 시기에 이뤄진다. 이는 1977년 우리나라에서 처음으로 에베레스트 등반을 성공하면서부터 인기를 얻기 시작한 문화다. 이에 샘터사에서는 1988년 <매혹의 명산 35>를 펴냈고 1993년엔 12쇄를 펴냈다고 하니 그 인기를 추측해 볼법 하다.
보리밥 집은 이 등산 붐이 일어난 시기에 등장했다고 추측하곤 한다 소화도 잘 되고 찬 음식이기에 더위를 식히며 먹기 좋았을 것이다. 유명한 보리밥집의 영업 시작일이 대부분 1980년대이다. 또는 혼분식 운동 이후 사라진 보리밥집 중 산에 있는 집들만 남은 것일지도 모르겠다. 확실한 한가지는 등산 후엔 보리밥이란 것이다. 가볍게 산책하듯 오르기 좋은 보문산을 오르내린 후 적당히 한산한 보리밥 집을 찾았다. 아무리 유명 맛집이라 한들 보리밥은 야채만 많이 나오면 그것으로 족했다. 다 먹고 나니 12시였다.
산을 등지고 살아야겠다 생각을 했다. 보문산을 내려와 근처 마을을 돌며 든 생각이다. 이제 막 피어난 어린 잎들이 각 색을 뽐내며 산은 물들어가고 있었고 그 아래 터 잡은 마을 길에선 새소리가 들렸다. 경사진 길을 따라 집들도 오르내리며 서로 각자의 위치에서 햇살을 고루 나눠 받고 있었다. 매번 날이 좋아도 햇살 한 줌 들지 않은 오피스텔에 살게 된 지도 일 년이 지났다. 다음 살 집은 산 밑으로 정해야겠다. 한동안은 물을 가까이 하며 살겠다고 갑천 줄기를 따라 살 집을 찾아다녔다. 유성온천에 자리를 잡을 땐 지하철도 가까웠지만 근처에 천이 있었다. 사람은 결국 산과 물을 떠나지 못하는 운명인가 보다. 보문산 자락엔 80년대 지은 양옥집이 죽 늘어 있었다. 이 많은 집 중 한 집 골라 문을 두드리고 집 청소 잘하고, 음식도 해드릴 테니 남는 방 하나 달라고 해서 한 달 살기를 하면 어떨까 하며 산을 내려왔다. 마당에 예쁜 꽃나무가 있는 집이 있었다. 눈에 담아 두었다.
벚꽃은 지고 있었다. 이번 년도엔 꼭 수도산에 가겠단 결심은 이번 년도도 지고 있었다. 그래도 조금이나마 남은 벚꽃을 보러 타슈를 빌렸다가 핸들을 돌렸다. 회사에 두고 온 내 흔적은 마치 수억 광년에 떨어진 행성의 빛이 지구에 닿듯 이따금 다시 회사를 추억하게 했다. 과거 인터뷰했던, 순 우리말 사전을 만들고 있다는 선생님이 보낸 선물이 회사로 갔다. 편집장님은 회사에선 근처 책방에 두겠다 했었는데 길이 좀 멀단 이유로 미룬 지가 벌써 한 달이 되어갔다.
옛 회사 팀장님이 차린 작은 책방이다. 아니 상점이라 해야 하려나. 자전거를 타고 네이버 지도를 따라갔다. 이어진 길을 가다 보니 오래된 마을 거리가 나타났다. 길게 뻗은 도로 양 옆으로 작은 건물들이 이어져 있었다. 그 건물들 중 하나가 ‘그래도 상점’이다. 문 여는 시간까진 30분 정도가 남았다. 적당한 장소를 찾지 못해 가게 문 앞에 앉아 노트북을 켰다. 최근에 작은 소설들을 쓰고 있다. 언젠가 기회가 된다면 누군가에게 보이고 싶은 그런 글들을 쓰고 있다. 그렇게 몇 줄을 적다 보니 반가운 얼굴들을 만날 수 있었다.
“출근하다 왠지 너 인거 같았는데 맞았나 보다.”
웃으며 안부를 물으며 문을 열어준다.
“이제야 오다니 너무하네. 온 김에 차 한 잔 할래?”
책방 한 켠에 보관하고 있던 내 우편물을 꺼내 준다. 상점 안엔 익숙한 물건들이 많았다. 한때 내 회사였고 꿈을 키웠던 곳들에 있던 소품들, 인쇄 기기들, 책상이 어디론가 사라지지 않고 이곳에 머물렀다. 다니던 잡지사는 다시 회사 장소를 옮겼다. 그러면서 남은 물건들이 다 이곳으로 돌아왔나 보다. 돌고 돌아 다시 만나는 인연이 있다.
지역 출판사 책들을 모아 팔고 여러 작은 프로젝트를 진행하는 그래도 상점이다. 정말 그럼에도 상점으로 존재하는 곳이다. 이번엔 실크 프린팅을 하고 손으로 책 제본을 해서 노트 굿즈를 만들 셈인가 보다. 그렇게 해서 생계유지를 할 수 있는지 물을까 하다가 이미 가게 이름이 그럼에도 상점을 운영하겠다는 굳건한 의지가 느껴지니 생계를 묻는 것은 실례란 생각이 들었다.
가게를 나와 다시 자전거 바퀴를 굴렸다. 누구는 선거 날을 위해 뛰어다녔겠지만 나는 그들 덕분인지 선거 날에 열심히 가지 못했던 곳들을 갔다. 하고 싶었던 것을 하고 만나야 할 사람을 만났다. 내게 보낸 소포를 뜯어보니 소포의 주인은 내가 아님이 밝혀졌다. 순 우리말 사전 선생님이 잡지 필진 모두에게 보낸 선물이었다. 하얀 캔버스마다 한 사람 한 사람 이름을 적고 시를 한 편 씩 써서 보내주었다. 소포는 4월 10일 선거 하자는 독려 문구가 적힌 테이프로 묶어 동봉했는데 딱 선거날에 물품을 열어보았으니 이것도 어떤 인연인가 싶다. 이번 새롭게 옮긴 편집실은 잡지사 편집장님 집이다. 옥계동. 조만간 다시 순 우리말 사전 선생님 선물을 가지고 방문해야겠다. 사람을 만나고 다니다보면 인연이 이어지게 된다. 그 인연의 실을 따라가는 것을 즐길 수 있으니 그것으로 좋은 휴무일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