돈가스에 대한 잡다한 것들
90년대. 아니 2000년대였던가. 가족끼리 기분 내고 싶을 땐 레스토랑을 찾았다. 지금은 경양식 집이라 불리는 곳. 어머니는 꼭 레스토랑에 갈 때마다 테이블 위 나이프와 수저 쓰는 법을 알려주었다. 이윽고 나온 수프와 돈가스 맛은 식당을 나오고도 계속 기억에 남아 몇 번이고 집에서 양송이 스프를 사다 끓여달라 했던 기억이 있다. 그 순간만큼은 우린 어느 부잣집 부럽지 않았다. 그땐 외식으로 기분 내는 것이 어렵지 않았다. 지금에야 돈가스 먹는 것이 그리 특별한 일이 아니지만 그땐 그랬다.
사실 고기를 튀긴다는 것이 특별한 발상은 아니다. 그러나 돈가스의 역사는 욕망의 역사다. 특별하지 않을지 모르는 조리법이지만 그것을 내 식탁에 옮기기까진 어떤 욕망이 있던 걸까.
고기에 빵가루를 묻힌 이유. 황금을 만드는 방법
우리나라 돈가스는 일본에서 넘어온 메뉴다. 일본은 영국의 커틀릿을 따왔다. 영국의 커틀릿 요리는 코톨레타(cotoletta)가 기원이다. 코톨레타는 고어 프랑스어로 뼈가 붙은 고기란 뜻이다. 이 음식의 기원에 대해선 이탈리아와 프랑스 모두 자신이 먼저라 주장하지만 코톨레타와 유사한 요리법이 처음 문헌에 나타난 곳은 이탈리아 밀라노다. 1134년 9월 17일, 밀라노의 산탐브로지오 대성당 원장이 제공한 ‘Lombolos cum panitio’라는 음식이다. 피에트로 베리의 『밀라노의 역사』란 책에선 축젯날에 9코스로 구성된 연회 메뉴 중 ‘빵가루를 입힌 갈비와 튀긴 갈비를 포함한 풍부한 요리를 제공받았다'고 했다.
왜 하필 빵가루를 고기에 묻혀 튀겼을까? 이에 대해선 셰프 월터스 요리 학교 이사인 월터 포텐차가 쓴 밀라노 립, 미식의 걸작 요리의 매혹적인 이야기란 기사에서 단서를 찾을 수 있었다. 그의 주장에 따르면 빵가루를 사용해 튀기는 것은 중세에 귀족들이 음식을 금으로 덮은 걸 모방한 것이다. 고대인부터 음식에 금을 사용하면 특별한 효과가 있을 거라 믿었는데 대표적으로 중세 의사들은 금이 심장병에 대한 최고의 약이라 생각해 금가루를 음식 위에 뿌릴 제안했다. 몇몇 부자들은 금가루를 사용할 수 있었겠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금 대신 금색을 내는 다른 방법을 사용했고 그때 등장한 것이 빵가루다. 코톨레타를 밀라노에서 처음 시작했다 보는 것도 빵가루 활용 유무에 따른다.
이 이야기를 알고 보면 코톨레타 조리법이 이해가 된다. 최초 코톨레타 원형은 그 단어 뜻이 그렇듯 갈빗대가 붙은 고기를 쓴다. 밀가루 없이 계란 물에 고기를 적시고 빵가루를 묻힌 후 버터 녹인 팬에 양면을 번갈아 가며 굽는다. 고기를 구울 땐 약불에 천천히 조리할 것을 요구하는데 그렇게 해야 완벽한 황금색을 얻을 수 있기 때문이다. 이 음식은 오스트리아와 독일어 문화권에선 슈니첼로, 영국으로 넘어가면 커틀릿이 된다. 슈니첼은 축제에 빠지지 않는 음식이었는데 이들은 빵가루와 함께 비교적 쉽게 구할 수 있던 밀가루도 함께 사용했다. 우리가 흔히 돈가스를 튀길 때 사용하는 밀가루-계란-빵가루 공식이 슈니첼에 적용된다. 처음엔 송아지 갈빗대를 그대로 사용한 음식에서 점차 대중들이 쉽게 먹을 수 있게 변형된다. 돼지고기를 사용하고 조리를 간편히 하기 위해 뼈를 빼고 고기는 얇게 피기 시작했다. 슈니첼이란 단어는 ‘얇은 고기’란 뜻이다. 그 모습은 꽤 우리에게 친숙한데 데미그라소스를 붓지 않은 남산 왕돈가스와 비슷하게 생겼다.
일본의 돈가스. 서양인이 되고 싶은 욕망.
잘 알고 있는 이야기지만 우리나라 돈가스는 일본으로부터 유입되었다. 하지만 놀라운 사실. 일본은 꽤 오랜 시간 육식을 하지 않았다. 무려 1,200년. 675년에 덴무 천황이 ‘육식금지령’을 발표한 후 육식은 천한 것으로 여겼다.
1872년 1월 24일. 메이지 천황이 처음으로 소고기를 먹었다. 이 일은 꽤 큰 충격이였는지 그로부터 한 달 후, 천황에게 육식 철회 요청을 위해 왕실에 자객 10명이 침입하기도 했다. 여러 반발 속에도 일본은 상류층에서부터 서양 식습관을 그대로 가져오기 위해 노력했다. 메이지 유신. 당시 일본은 서양인이 되고 싶었다.
오카다 데쓰의 『돈가스의 탄생』(뿌리와이파리, 2006년) 책을 참고하면 당시 이런 분위기 속 어떻게 일본에서 일본 스타일 돈가스가 탄생했는지 알 수 있다. 정부는 우마 회사를 설립해 소고기 판매에 힘썼고, 지식인들은 왜 서양식이 건강에 좋은지에 대한 설파를 시작했다. 그 가운데 서양식 음식은 일본만의 독특한 방식으로 변형되었는데 이에 대해 오사카 데스는 이렇게 말한다.
“그러나 서민들이 실제로 고기를 먹기 시작한 것은 일본식으로 변형시킨 쇠고기 전골과 스키야키부터였다. 따라서 서양 음식을 완전히 받아들인 것이 아니라 서양식 재료인 쇠고기에 친숙해진 정도에 불과했다. 그 후 다양한 형태로 서양식 조리법을 습득하고 나서, 서민들은 밥에 어울리는 양식을 만들어내기 시작했다. 양식의 개발은 그야말로 아래서부터 위로 진행된 것이다. 이렇게 해서 육식이 해금되고 60년의 긴 시간이 지난 후에야 겨우 서민들의 손에 의해 '돈가스'가 탄생하게 되었다”(150쪽)
일본이 육식을 장려할 때 돼지고기는 주목하지 않았다. 일본에서도 과거 멧돼지고기는 종종 먹었기에 돼지고기는 서구식과 맞지 않다 생각했다. 돼지고기가 본격적으로 일본에 보급된 것은 1904년, 러일 전쟁 무렵이다. 전쟁으로 소고기 가격은 상승했고, 이에 대체제로 돼지고기가 일본 식탁에 등장한다. 이 수요를 감당하기 위해 농상무부도 미국과 영국으로부터 씨돼지를 수입해 본격적 양돈사업을 시작했다. 이런 배경 속 1895년 문을 연 긴자의 렌가테이에서 ‘포크 카츠레츠’를 선보인다. 이곳은 1899년 대중음식점으론 최초로 영국 커틀릿을 들여온 곳이다. 여러 문헌을 참조해 보면 돼지고기를 활용해 튀김 음식을 만든 시도는 여럿 있었다. 그러나 돈가스를 대중화하고 일본만의 양식 스타일을 확산시킨 곳은 분명 렌가테이다. 여기서 만든 스타일은 현재 경양식 돈가스 원형이 된다. 가장 큰 특징으로 쌀과 장국이 함께 나온다. 빵이 아직 익숙하지 않은 대중을 위해 빵 대신 밥을 준 것이다. 또한 고기에 대한 거부감을 줄이기 위해 고기도 얇게 폈다. 또한 많은 손님이 찾아오자 조리를 간편하게 하기 위해 원래 서양식대로라면 붙어 있어야 할 갈빗대는 빼고, 버터에 황금색을 내듯이 프라이팬에 굽는 방식에서 기름에 넣고 튀기는 방식으로 변경했다. 얇게 핀 고기를 튀김기에 2~3개씩 한꺼번에 넣는 작업은 일손을 크게 줄였다.
여기서 일본은 한 단계 더 나아간다. 바로 두꺼운 돈가스 탄생이다. 돼지 안심은 육질이 연해 요리 재료로 적합하지 않다. 보통은 햄이나 소시지 원료로 쓰이는 부위다. 일본은 이 연한 육질에 주목해 두툼한 돈가스를 선보였는데 이는 돼지고기를 생선처럼 요리한 개념이다. 1929년 우에노 폰치켄이란 가게 시마다 신지로가 고안한 음식이다. 돈가츠라는 이름도 이때 생기게 된다. 일식 돈가스의 탄생이다.
경양식과 일식 돈가스의 차이는 얇은 고기에서 두껍게, 고운 빵가루에서 굵은 빵가루로, 통으로 나오는 것에서 젓가락으로 먹을 수 있게 썰어 나오는 형식으로 일본만의 돈가스 형태를 만들었다. 이것은 유럽에서 볼 수 없었던 형태의 고기 튀김이다.
한국 돈가스는 경양식 VS 일식
한국에 돈가스가 들어온 것은 일제 강점기다. 1925년, 서울역 역사 내에 개점한 ‘더 그릴’이 한국 최초 경양식집으로 알려져 있다. 이때 돈가스도 들어온다. 당시 서울역엔 더 그릴 뿐 아니라 1층 대합실엔 티룸이 있었는데 모던 보이들이 많이 찾던 공간으로 소설가 이상도 이에 대한 인상을 남겼다.
"나는 메뉴에 적힌 몇 가지 안 되는 음식 이름을 치읽고 내리읽고 여러 번 읽었다. 그것들은 아물아물하는 것이 어딘가 내 어렸을 때 동무들 이름과 비슷한 데가 있었다." 이상의 소설 『날개』 중
당시 경양식집은 비싼 식당이었다. 그릴 외에도 한국에 살고 있는 일본인 마을엔 여럿 경양식집이 있었으나 접근하긴 어려운 식당 중 하나였다. 더 그릴이 문을 열었을 때 정찬 가격은 설렁탕 가격의 21배였다. 해방 이후에도 외식할 수 있는 음식점 종류가 적은 80년대까진 경양식이 오늘날 패밀리 레스트랑의 위치를 담당했다. 지금도 오래된 경양식당에 대한 추억을 물으면 어릴 적 친구들 생일파티, 졸업식 때 함께 가던 곳으로 기억하는 이들이 많다.
이러한 경양식당의 대표 메뉴였던 돈가스는 양돈산업이 활성화된 1970년대가 되어서야 대중적인 메뉴가 되었다. 많은 사람들이 쉽게 접하고 돼지고기 소비량이 늘면서 우리나라도 우리나라만의 돈가스를 만들기 시작했다. 우리나라 돈가스는 고급화보단 대중화를 선택했다.
우리나라 외식문화는 80년대를 지나야 성장했다. 가계 소득이 높아지면서 외식 문화가 발달했는데 80년대 말부터 투모로우 타이거, 코코스, 쇼비즈 등 패밀리 레스토랑을 시작으로 90년대엔 TGI 프라이데이, 베니건스, 빕스 등 패밀리 레스토랑이 문을 연다. 또한 김밥천국과 같은 분식집도 하나 둘 생기기 시작했는데 돈가스는 패밀리 레스토랑이 아닌 분식집 메뉴에 자리 잡았다. 빠르게 조리해서 나가야 하는 분식집에서 냉동 돈가스는 재고 관리와 조리에 있어 매우 효과적이였다. 또한 새롭게 들어온 패밀리 레스토랑 프렌차이즈들은 이탈리안 레스토랑 스타일로 소비자들도 경양식에서 본격적인 양식을 찾기 시작했기에 경양식당은 점차 인기를 잃었다. 그 여파인지 최초 경양식집이었던 ‘더 그릴’은 21년 11월에 문을 닫았다. 코로나 여파라고 하였지만 1895년에 문을 연 일본 돈가스집이 건재함과 비교해 볼 때 아쉬움이 남는 건 어쩔 수 없다.
경양식의 몰락과 대조적으로 일식 돈가스는 계속 인기몰이 중이다. 한동안 <백종원의 골목식당>에서 나왔던 연돈 돈가스가 유행이었다. 연돈 돈가스는 일식 돈가스다. 밥과 장국이 나오고 생양배추가 함께 나온다. 고기는 두툼하고 생 빵가루로 바삭함을 더한다. 인기엔 여러 이유가 있겠지만 가장 대표적인 이유를 뽑자면 가성비다. 처음 방송에 나왔을 때 가격은 등심 돈가스 기준 7천 원. 현재는 등심 돈가스 가격이 1만 1천 원이다. 방송에 나온 수고스러운 과정을 보았을 때 꽤나 저렴한 가격이다. 많은 사람이 연돈을 찾는 이유는 상대적으로 싼 가격에 자신이 대접받는 느낌을 받기 때문일 것이다.
남의 식탁을 엿본 욕망
음식은 욕망을 닮았다. 남처럼 되고 싶다는 욕망, 그 빠른 실천이 남의 식탁을 내 앞으로 가져오는 것이 아닐까. 돈가스 이야기를 따라가면 여러 욕망을 발견하게 된다. 귀족들이 금가루 뿌려 먹는 문화를 닮고 싶어 빵가루로 고기를 구운 코톨레타. 서양인을 닮고 싶어 만든 포크 카츠레츠. 부요한 삶을 동경하며 찾았던 경양식집. 그리고 지금 우리는 가성비라는 이름으로 또 다시 남의 식탁을 욕망하고 탐하고 있다. 아직 내가 얻지 못한 것을 꿈꿀 때 음식은 가장 값싼 사치가 아닐까.
음식에 대한 단상은 매달 대전 월간 잡지 <월간토마토>에 연재 중이다.
<월간토마토>는 대전을 너머 대안적 삶에 대한 고민과 다양한 이야기를 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