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달한 호박죽을 끓이며
창원시청 로터리가 훤히 보이고 구름을 머리에 인 정병산이 시야에 들어오는 사무실을 쓰고 있어 화장실 가는 시간이 가장 즐겁다는 말이 나올 정도로 뷰가 멋진 건물에서 오후 네시까지 일을 한다.
소화가 잘 안돼서 앉아서 하는 일이 몸을 더 피곤하고 퇴근시간이면 아침에 신고 온 구두에 발이 들어가지 않아 슬리퍼를 신고 집으로 간 적이 자주 있다. '산 좋고 물 좋고 정자 좋은 데 없다'는 옛말처럼 원하는 모든 것을 갖춘 직장이 몇이나 되겠는가. 부기를 가라앉힐 방법을 찾기로 했다.
'호박이 부기 빼는 데는 최고지.' 친구의 말에 엄마가 끓여주던 호박죽 생각이 났다. 새 집을 짓고도 잔디밭 한 귀퉁이에 가마솥을 걸어 오래 뭉근하게 끓인 호박죽은 달고 달고 다디단 깊은 맛이 났다. 가벼운 단맛이 아니라 겨울 조청처럼 오래 정성을 들인 인생 최고의 단맛이 난다. 혀 끝에 오래오래 남는 단맛 말이다.
엄마가 파킨슨으로 10년 세월을 보내고 나니 평소에 해주던 음식들이 자주 생각이 나서 기억을 더듬어 따라 해 보지만 그 맛이 날 리가 없지 않은가. 엄마 손맛을 닮은 딸이라지만 내가 엄마의 레시피를 모두 기억하는 것도 아닌 데다 집에서 쓰는 인덕션으로 아궁이표 가마솥 호박죽맛을 재현하기란 쉽지 않은 일이다. 재료부터 손수 농사지으신 동부콩, 찹쌀, 귀리, 보리쌀, 강낭콩 등등 구할 수 없는 것 천지여서 그나마 (자연드림) (한살림)등을 뒤져 국산 유기농으로 재료를 사 모아 아버지가 주신 늙은 호박을 갈라 믹서기에 갈고 동부콩이랑 삶고 이래저래 흉내를 내 본다.
엄마가 끓여주는 것만 넙죽넙죽 받아먹다 보니 호박죽 한 그릇에 들어가는 정성을 헤아리지 못했다. 찹쌀가루 뒤집어쓰고 콩이 부엌 바닥에 돌돌돌 굴러가고 죽이 폭폭폭 소리를 내며 끓어오를 때 주걱으로 잘 저어야 한다는 소리가 기억이 나서 젓다가 팔꿈치를 데어 '앗 뜨거워' 소리를 지르다가 깨달았다. 오이무침 계란말이는 금방 따라 하지만 죽을 끓인다는 것은 정성이고 시간을 들여 기도하는 마음을 담는 것이란 것을. 이 죽 한 그릇 먹고 우리 딸 소화 잘되게 해 주시고 이 죽 한 그릇 먹고 우리 아들 빈속을 든든하게 채워 어깨피고 출근하게 해 주시고......
엄마는 그런 마음으로 장작불을 지피고 오래오래 불 앞에서 아픈 손목을 아끼지 않고 주걱을 들었다는 걸 깨닫는다.
엄마가 봤으면 "으이그, 우리 정아 저거 또 털푸이 짓 하네 " 하고 면박을 했을 부엌을 만들어 놓고 나서야 호박죽이 완성 되었다. 내가 기대했던 달고 달고 다디단 호박죽은 뭔가 익숙한 단맛이 났다. '뭘까? 뭐지?' 하는데 번쩍 '아 바로 그거다 '바로 아버지가 좋아하는 양갱맛이 났다. 뭐랄까 달긴 한데 구수한 맛은 없는 달달하기만 한 호박죽이 된 것이다.
오늘도 통퉁 부은 내 발등을 내려다보다가 호박죽을 끓여 파는 시장에 가볼까 쿠팡에서 호박가루를 사 먹을까 생각을 한다. 엄마의 손맛을 재현하기로 했던 야심 찬 계획은 물거품이 되었으니 완전한 실패다. 장마철이 시작되어 며칠째 구름모자 쓴 정병산을 바라보며 또 궁리를 한다. 달고 다디단 호박죽을 어떻게 완성해 볼까? 그나저나 호박이 부기 빼는 데 효과는 있는 거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