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는 울림이다
내가 시를 처음 쓰기 시작한 것이 국민학교 3학년 시절이다. 군학예회를 앞두고 있었고 5월 스승의 날을 즈음하여 <전국 학생 편지 쓰기 대회>가 열렸다.
평소 조용하고 수줍음 많던 민주가 대상을 받았다. 선생님께 쓰는 편지에 선생님의 모습을 한눈에 그릴 수 있는 시를 써넣은 독창성을 높이 인정받아 대상의 영광을 안았던 것이다. 나는 최우수상에 그친 게 분하고 억울했다.
작은 섬 칠천도에서 대상과 최우수상이면 신문에 날 일이지만 때는 바야흐로로 1982년. 아쉽지만 신문사가 가까이 없었다.
분명 <편지 쓰기>라고 했으면서 시를 잘 썼다고 대상이라니! 말이 안 된다는 생각에 그때부터 나는 시를 정복하기로 굳은 결심을 한다. 열 살 계집아이는 친구를 이기기위해
일기에도 시, 탐구생활 과제에도 시를 써넣기 시작했다.
(그런데 생각해 보면 진 싸움이다. 민주의 아들은 서울대 공대를 갔다. 비결이 무엇이냐 물었더니 어려서부터 남달랐다 한다. 음... 엄마의 독창성과 고요한 애씀을 닮은 거겠지? 나는 다 좋은데 좀 요란스럽고 또 금방 열정이 딴 데로 옮아가는 편이다.)
"어떤 시가 울림을 주려면 그 안에 애매모호함이 있어야 해요. 울림을 만드는 공간이 있어야 한다는 거죠. 그것은 문장의 단위에서만 가능한데 그에 관한 한 최고의 시인이 백석이 아닐까 합니다. 백석은 서정성이 강하니까요. 백석 시가 가진 울림을 우리는 '매혹'이라고 부르죠."
송재학 시인의 말처럼 시는 무슨 뜻인지 모를 애매함 속에 가슴을 치고 가는 울림과 전율이 있다.
백석의 시 '나와 나타샤와 당나귀'는 나에게 참 애매모호하다. 국어국문학을 전공하고서도 백석의 시는 어렵다.
시가 주는 모호함이라니! 내가 쓴 '호박죽' 시가 유튜브 조회수가 높은 걸 보면 꼭 그런 것도 아닌 듯한데 나는 누구나 공감할 수 있게 쉬운 시어로 감정표현에 집중한다.
다만 공통점이라면 '울림'이란 것인데
어렵든 쉽든 또 애매하거나 모호하더라도 '울림'이 있으면 되는 것이다.
나는 시를 쓰면서 때때로 타인에게 시를 가르치면서 이 '모호함'보다는 '울림'에 더 집중하려 한다. '내 마음이 네 맘'이라고 느낄 정도로 그 시가 나에게로 와서 내 것이 되면 된다. 그때 비로소 심장이 뛰고 가슴이 일렁이는 '울림'이 일어날 테니까.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기 전에는
그는 다만 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았다"-김춘수 <꽃>처럼 말이다.
사랑에 빠지거나 감명받았을 때 비로소 그 이름은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된다. 길가에 흔한 돌멩이도 내가 발견해서 닦아주고 전시하는 순간 수석이 되듯이.
나는 내 마음속 흔한 돌멩이를 시의적절하게 발견하고 싶다. 거기에 좋은 책을 읽고 필사하는 동안 수집한 좋은 문장을 곁들여 수석으로 만들어 독자에게 전하고 싶다.
수려한 문장을 흉내 내는 것이 아니라 재해석을 통해 나의 언어로 시를 쓰고
내 마음속 우물에서 그런 시어를 건져 올리고 싶은 두레박 시인이다.
이런 간절함이 독자에게도 전해지기를 소망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