힘을 빼는 연습
힘을 빼는 연습
나는 열다섯 살 여름, 그날을 아직도 잊지 못한다. 친구들과 바닷가에 나가 놀던 오후였다. 바다는 햇빛을 받아 유리처럼 반짝였고, 갓 올라온 멸치를 털어내던 동네 아주머니들의 손놀림, 방파제 끝에 줄지어 앉은 낚시꾼들의 찌를 바라보는 표정까지, 모든 것이 평화롭고 느긋했다.
친구들은 물개라도 된 듯 바다로 뛰어들어 해수욕을 즐겼다. 헤엄도 곧잘 치고, 소라 껍데기를 줍거나 물장구를 치며 깔깔 웃었다. 나는 그 옆에서 옷과 수건을 챙기는 조용한 도우미였다. 사실 바다는 무섭지 않다고 늘 말했지만, 마음속에는 알 수 없는 두려움이 있었다. 물은 나를 받아주지 않고, 언제든 삼켜버릴 것 같은 검푸른 그림자를 품고 있었으니까.
그런데 그날, 작은오빠의 친구들이 장난을 쳤다. 방파제 끝에서 구경만 하던 내가 심심해 보였는지, “야, 너도 들어가 봐라!” 하며 나를 슬쩍 밀어버린 것이다. 순간 내 몸은 허공을 가르며 곤두박질쳤고, 차갑고 짠 바닷물이 전신을 덮쳤다.
깊이를 알 수 없는 바다는 곧장 나를 끌어내렸다. 허우적대며 발버둥을 쳤지만, 두 팔 두 다리는 제멋대로 꼬였다. 한 모금, 두 모금… 바닷물이 목구멍을 파고들었다. 그 짠맛은 피맛이 나기도 하고 눈물맛 같기도 했다. '이대로 나는 여기서 끝나는구나' 싶었다. 영화 속 장면처럼 머릿속으로 가족 한 사람 한 사람 기억들이 스쳐 지나갔다. 작은 오빠를 약 올려 엄마의 등 뒤에 숨어 있던 기억, 소 몰던 아버지의 '이랴이랴' 구수한 음성, 마당을 뛰어다니던 강아지 메리의 꼬리 침, 고양이 미미의 야옹야옹 얕은 울음까지.
그러다 세 번째, 가슴이 터져 나오듯 물을 들이켰을 때, 이상하게도 몸의 힘이 쭉 빠져나갔다. ‘에라 모르겠다. 그냥 놔버리자.’ 하는 순간이었다. 그런데 놀랍게도, 가라앉던 몸이 천천히 위로 떠오르는 게 아닌가. 마치 바다가 나를 잠시 품었다가 놓아주는 듯한 기묘한 느낌. 물 위에 얼굴이 드러나자 햇빛이 쏟아졌고, 세상이 다시 빛을 되찾았다.
그 순간 어디선가 “어이! 여기 사람 빠졌다!” 하는 외침이 들렸다. 어선 한 척이 방파제 근처를 지나던 참이었다. 선상에 있던 아저씨가 재빨리 몸을 날려 내 팔을 끌어올렸다. 거친 손길이었지만 그보다 따뜻한 것은 없었다. 기침을 하며 바닷물을 토해내던 나를, 아저씨는 마치 어린 조카를 다루듯 등을 두드려주었다.
배 위로 올라왔을 때, 친구들은 창백한 얼굴로 몰려와 울먹였다. 아까 나를 밀던 홍근이 오빠는 어쩔 줄 몰라 고개만 푹 숙이고 있었다. 나는 기침을 뱉어내며 겨우 말했다. “내 옷 다 젖었잖아…” 그러자 모두가 잠시 얼어붙었다가, 웃음과 눈물이 뒤섞여 터져 나왔다.
그날 이후 바다는 내게 단순한 두려움의 대상이 아니었다. 두렵고 무서운 동시에, 내 목숨을 살려준 품이기도 했다. 만약 그때 끝내 발버둥만 치고 있었다면, 아마 바다는 나를 끌어내려 버렸을 것이다. 몸의 힘을 빼고 순응하는 순간, 오히려 길이 열렸다. 바다가 나를 수면 위로 밀어 올려주었다.
나는 종종 그 경험을 떠올리며 살아간다. 삶은 벗어나고 싶고 발버둥 치고 싶을 만큼 힘든 순간이 오기 마련이다. 그런 순간이 오면, 애쓰고 애써봐도 안 되는 때가 오면 힘을 빼고 잠시 몸을 맡겨보는 것이다. '순리대로 되겠지'하고. 그때에 비로소 길이 열리기도 한다. 열다섯의 그 여름, 나는 바다에서 삶의 법칙을 하나 배운 셈이다. 힘을 빼고 기다리는 법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