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3월 봄비가 부슬부슬 내리던 날 큰 딸의 검사결과를 확인하기 위해 한마음 병원으로 갔다.
“뇌하수체 선종입니다. 1.8cm네요”
의사 선생님은 흔들리는 내 눈을 가만히 보며 최대한 부드러운 목소리로 다시 말씀하셨다.
“당장은 수술을 해야 할 정도는 아니지만 시신경을 누르고 있는 것으로 보여 안과 협진이 필요합니다. 안과진료 보시고 다시 내려오세요.”
의자에 앉은 큰딸은 어떤 마음일까 뒷모습만으로는 알 수가 없었다. 항상 바른 자세를 유지하는 아이는 그날도 허리를 꼿꼿이 세운 채 의사 선생님의 말을 한마디 한마디 귀 기울여 들으며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다행히 시야검사는 이상이 없어 호르몬 수치를 떨어뜨리기 위해 주 2회 약을 복용하고 있다. 양성 뇌종양. 드라마에서나 보던 뇌종양이 우리 딸에게, 그것도 이제 겨우 스물 한 살인 아이에게 생기다니!. 처음에는 내가 뭘 잘못했을까 되짚어 보느라 머리가 멍해지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 택시를 기다리는 동안 으슬으슬 온몸이 떨렸다.
같은 병을 앓고 있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듣고 싶어 카페에 가입했다. 처음 일주일 간은 매일 틈만 나면 카페에 들어가 새로 올라온 글을 검색하고 댓글까지 꼼꼼히 읽어 보았다. 큰 병원에 가서 mri 판독을 다시 해보고자 예약을 했다. 아이들을 가르치는 시간 외에는 온통 ‘뇌하수체 선종’ ‘수술’ ‘후유증’ 병에 관한 생각으로 머릿속이 가득 차서 다시 일주일이 지나고 나니 나의 일상에 조금씩 균열이 생기기 시작했다. 아이는 담담히 받아들이고 학교에도 가고 주말 아르바이트도 가는데 엄마인 내가 흔들리고 있었다. 냉장고를 열었는데 내가 뭘 하려고 했지? 하다가 전화를 걸어놓고는 할 말이 생각이 안나는 날들이 이어졌다. 자식이 아프다는 건 이런 거구나 이제야 엄마를 조금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
내가 겨우 일곱 살 일 때 서른아홉 살의 엄마는 아픈 아들을 고쳐보겠다며 통영 견내량을 시작으로 대구 동산 병원 부산의 유명한 한의원까지 용하다는 병원을 찾아다녔다. 일 년 넘게 오빠의 병원 생활은 계속되어서 나는 아홉 살이 되어서야 학교에 입학할 수 있었고 오빠도 3학년을 다시 시작해야 했다. 세 밤 자고 온다고 간 엄마가 오지 않아서 수많은 밤을 큰집에서 자기도 하고 윗집 할머니와 보내기도 했다. 아버지 배가 들어온 날이면 군불을 지피는 아버지 옆에 앉아 있다가 졸리면 안방으로 가서는 엄마가 벗어놓은 일바지에 가만히 얼굴을 묻어보기도 했는데 점점 엄마 냄새가 옅어져서 더 큰 소리로 울었던 기억이 있다. 부산에서 오는 마지막 배가 지나가면 오지 않는 엄마를 원망하며 울다 지쳐 잠이 들기도 했다. 왜 엄마는 오빠 생각만 하느냐고 소리치고 싶었다. 자라면서 오빠가 밉고 작은 오빠와 싸우면 몇 배로 더 혼나던 기억에 매일매일 엄마를 미워했다.
얼마 전 막내가 말했다. 요즘 엄마의 자리에 엄마가 없어서 이모한테 중요한 이야기를 하게 된다고. 막내 앞에서는 그런 게 어딨냐고 화를 냈지만 하루 종일 체기가 가시질 않았다.
“언니가 아픈데 엄마를 좀 이해해 주면 안 되겠니?”
“엄마도 그럼 작은 삼촌 아플 때 외할머니가 엄마 안 챙겼다고 지금까지 말하면 안 되지.”
속으로 뜨끔했다. 큰 딸이 아프니 온통 거기에 마음이 쏠려 있긴 해도 그렇다고 나머지 두 딸을 덜 챙기는 건 아닌데. 조금 억울한 생각도 들었다. 이제는 알 것 같다. 아픈 오빠를 간호하는 엄마의 마음 안에 엄마가 오기만을 기다리는 일곱 살 나도 같이 있었다는 걸, 그때 아픈 손가락을 가진 엄마의 마음을 조금이나마 헤아렸더라면 힘들어하는 엄마를 꼬옥 안아줄 수 있었을 텐데. 지금의 나보다 어렸던 그 시절 엄마에게 말해주고 싶다.
“엄마, 엄마 잘못이 아니야. 오빠가 열이 나서 소아마비 접종을 못 시킨 거잖아. 큰 집 밭 일 하느라 오빠를 어쩔 수 없이 할머니한테 맡긴 거잖아. 그때는 병원도 멀고 섬 밖을 나갈 배 편도 없었으니까 엄마는 최선을 다했어. 괜찮아. 엄마 탓이 아니야. 그리고 고마워. ‘머리 깎고 절에나 들어가야지’ 하면서도 우리 안 버리고 잘 키워준 거. 정말 고마워”
6월 22일 큰 딸을 데리고 서울 아산병원에 가야 한다. 두렵고 또 두렵지만 괜찮아질 거라고 믿고 싶다. 나보다 어렸던 엄마도 그 시절을 이겨냈는데 나도 할 수 있다고 다짐해 본다. 행여 비바람이 불어와도 두 발바닥에 힘주고 땅을 꾸욱 밟고 앞으로 나아가리라. 엄마가 그랬듯이 나도 엄마니까. 엄마는 강하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