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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질문하는 임정아 Aug 14. 2022

심리상담 10차시를 시작하다

나는 존재하지 말았어야

나는 존재하지 말았어야 했다.

나는 결코 행복하면 안 되는 아이다.

나는 원래 불안해야 해.

더 나아지는 건 나답지 않아.

더 좋은 건 내 것이 아니야.


나의 무의식 속에는 흰 늑대와 검은 늑대가 살고 있다고 한다. 둘 중 누가 진짜 나일까? 누가 더 자주 등장할까?

정답은 '먹이 많이 준' 놈이다. 의식이 깨어 있으면 나는 '임정아'다. 일상생활 속에서 나는 얼마나 깨어있는가? 나로 의식하는 정보와  주변 환경은 얼마나 긴밀히 연결되는가?


자~~ 다행인 건 그녀(심리상담전문가)가 나에게 긍정의 언어를 사용하고 설명 하나도  성의껏 해 준다는 데 있다. 우선 어린 시절을 떠올려보고 기억에 남는 장면을 떠올려보란다.

가장 오래된 기억은, 기억이 아니라 엄마의 이야기 속에서 각인된 젖먹이 시절 말이다. 마을 가꾸기를 위해 공공근로를 나가던 엄마가 어린 아기인 나를 길가에 풀어놓고 다음 동네까지 일을 갔다 오면 그 긴 시간 나는 울지도 않고 그 자리에 있더란다.


나는 정말 울지 않았을까?

나는 아무렇지도 않았을까?

나는 아무것도 몰랐을까?


물어보고 싶다.  왜 그랬느냐고. 왜 유기했냐고 왜 방임했냐고. "그때 나는 배가 고팠다고. 무서웠다고. 버려진 기분이었다"라고 소리치고 싶다.

어디 그뿐일까?  내가 학교에서 반장이 되건 수학시험 100점을 받건, 집 청소를 다해놓건

나는 엄마에게 태어나지 말았어야 할  골칫거리였다.

(이 썰도 길고 아파서 천천히 풀고자 한다. 그렇다고 불쌍히 여기진 마시라. 현재  지금 여기 나는 충분히 행복하니까)


내가 더 나아지려고 할 때마다 누가?/ 엄마가,

왜?/그냥 밉다고 꼴 보기 싫다고, 어떻게?/욕하거나 때려서

"하지 마 니는 안된다"를 강조했다.

나는 물었다.  처절한 몸짓으로


"그럼 엄마 나는 뭐할까?"

"니 알아서 해라. 나는 모르겠다."

참 쉽더라. 참 잔인하더라. 엄마라는 사람이 자기가 낳은 딸에게.


나이 쉰이 된  지금도

-혼자 하는 여행은 무섭고

-혼자 밥 먹기 부끄럽고

-혼자 병원 가기도 두렵고

-혼자 장보기도 망설이고


이런 나를 다름 아닌 엄마가 완성시킨 게다.

엄마를 원망하냐고? 그렇다.

(독이 되는 부모)에 보면 자식을 보호한다는 핑계로 자식의 삶을 송두리째 뒤흔들고 자식의 자존감을 짓밟는 부모가 있다. 아니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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