온라인 마케터의 시작
L사에 인턴으로 채용되게 해 준 깐깐 라이브 코너가 인턴 계약을 6개월 남기고 폐지됐다.
외주제작사 루팡 픽쳐스와 여기저기 뛰어다니며 한계점에 다다를 때마다 선배에게 우는 소리를 했다. 하지만 선배는 서늘한 태도로 코너가 사라지면 너도 어떻게 될지 모르니 열심히 해야 한다고 겁을 줬다. 버버리에서 몸이 부서져라 일했지만 칼같이 계약해지를 당했던 터라 사실 놀랍지도 않았다.
난 온라인 마케팅이 뭔지도 몰랐고 선배들이 쓰는 용어조차 생소했다. 감히 내 주제에 할 수 있을까? 라며 의기소침했고 아버지 말데로 난 그냥 9급 공무원이 제일 잘 맞는 듯싶었다. 사실 밑으로 동생이 3명이나 버티고 있고 외벌이 공무원이신 부모님께 뭘 어떻게 더 공부하겠다고 손을 벌릴 수 있겠나. 선택지는 없었다. 고시생으로서 필요한 최소한의 자금만 준비해서 나가자며 스스로를 위로했다.
그런데 2차 면접 때 도움을 주셨던 팀장님께서 내게 다시 한번 기회를 주셨다. 그때도 한편으로 감사했지만 한편으로 마케팅 전공자가 아니라, 공채가 아니라 힘듬을 나눌 동기도 없고 무엇보다 나는 자신이 없었다.
하지만 팀장님께서 나의 가능성에 배팅해주셨으니까 나의 결핍을 노력으로 덮으며 보답하자 각오를 다졌다.
그러기엔 난 결핍이 참 많았다.
SKY 대학을 나오지도 않았고, 흔한 경영학 전공자가 아니었다. 영어는 좋아하지만 잘하는 수준은 아니었고
흔한 어학연수, 워킹홀리데이도 돈이 없어 나가보지 못했다.
집안 식구 중에 대기업을 다니는 사람도 선배 동기 중에도 없었다.
결핍을 다 적었더니 자존감이 말할 수 없게 낮아졌다. 그래서 거꾸로 내가 잘할 수 있는 것을 적어보고
올해 노력으로 메꿀 수 있는 결핍 한 가지만 떠올려보는 것으로 마음가짐을 고쳐 먹었다.
아... 사회생활을 누구에게 물어야 할까? 잘 모를 때면 남자 선배들이 담배를 피우러 올라가는 옥상에 갔다.
남산타워를 멍하니 바라보다 내려온 날이 수도 없다.
정직원으로 계약서에 도장을 찍고 어깨너머로 지켜봐 오던 ‘온라인 마케터의 일’을 시작했다.
그날부터 마케팅 미팅에도 참석할 수 있는 기회를 얻게 됐다. 팀장님이 일이라는 이름으로 던져주신 하나하나가 나와 동갑인, 공채들에겐 당연한 일이었고 부담이었을지 모르겠지만 나에겐 감격이고 기적이었다.
하지만 시작이 마음처럼 쉬웠던 것은 아니다.
당시 팀에는 파견직으로 이미 2년씩 된 나보다 한두 살 어린 친구들이 있었는데 난 그 친구들보다도 온라인을 어떻게 대해야 하는지 잘 몰랐다. 그 친구들이 보기에 난 뒤쳐졌고 느렸고 한심했다. 인턴으로 굴러들어 와 정직원이 됐으니 그들의 시기 질투와 무시를 받았다. 그중 제일 손이 빠르고 영리했던 3살이나 어린아이가 나에게 눈을 동그랗게 뜨고 말했다.
'일할 때 착한 사람 필요 없어요. 못돼도 일 두 번 시키지 않는 사람이 좋더라'
어떻게든 그 친구에게 배우려고 잘 보이려고 애쓰고 노력했는데 내 모습이 그렇게 멍청해 보였구나 마음에 비수가 꽂혔다. 하지만 난 지금껏 그 말을 잊은 적이 없다. 착하게 굴려고 하기보다 스마트하게 일해야 한다는 원칙을 세우는 계기가 됐다.
한편으로는 나와 비슷한 기간에 입사했던 공채들은 날 견제를 넘어 눈엣가시로 생각했다.
어차피 공채로 당당하게 입사한 그들에 비해 수시채용은 처우가 다소 떨어지는데 나에게 예의 없이 수시로 연봉에 대한 질문을 했다. 왜 그런 민감한 질문을 아무렇지 않게 했을까?
그건 C 홈쇼핑사에 이직한 후 막 대리를 달았을 때 우연히 깨닫게 됐다. 공채로 입사한 후배가 어느 날 속상하다며 속마음을 털어놨다.
그녀는 수시가 아닌 정시 공개채용을 통해 인턴을 수료하고 막 신입이 됐다.
'저는 대기업에서 일하고 싶어서 12년 내내 열심히 공부했어요. 그래서 이름 있는 대학에 갔고 경영학까지 어렵게 복수 전공했어요. 어렵게 스터디해가며 공채 합격해 들어온 곳인데, 계약직 파견직으로 2년 있다가 쉽게 정직원으로 전환돼 같은 선상에서 일하는 것 불공평해요. 못마땅해요.'
그 후배와 길게 얘기할 시간은 마땅찮아 이렇게 되물었다.
'그래서 너와 게는 천만 원의 연봉 차이가 나잖아. 그리고 정직원이 되기 위해 2년이란 시간을 흘려보냈어 그럼 공평하지 않니?'
그렇게 파견직에서 어렵게 정직원이 된 친구들은 승진도 잘 되지 않은데 굳이 그걸 그렇게 따질 필요가 있나? 20대라 어렸고 젊어서 그랬던 걸까 그 사람의 성향인 걸까 아직도 그건 잘 모르겠다. 심지어 그 질문을 했던 그녀는 타 플랫폼 회사에 가서도 여전히 같은 마음을 품고 있다고 했다.
L사에서도 내 또래 중 일부는 선을 지키지 않는 부류였다. 그들은 늘 진부하고 찌르는 말을 아무렇지 않게 내뱉었다. 내가 어떻게 어떤 각오로 마케터로서 임하고 있는지 알지도 못하면서
넌 얼마 받아? 어떻게 입사한 거야?
‘네가 나보다 처우가 더 좋아, 이제 기분 좋니? 네 시간과 노력이 보상받은 것 같아?’라고 되받아치고 싶은 걸 꾸역꾸역 참아냈다.
다만 그 결핍 덕에 난 겸손한 사람, 속 깊은 사람을 가려낼 수 있었다. 그들은 전자와 다르게 선을 지켰고 날을 세우지도 예민하게 굴지도 않았다.
또 한편으로 결핍이 너무 많았던 나는 그걸 극복하기 위해 나를 믿어준 팀장님께 폐 끼치지 않기 위해 , 그들보다 뒤떨어지지 않다는 걸 증명하기 위해 더 고민하고 공채보다 몇 시간을 더 일했다.
순수했던 20대였기 때문에 날것의 속마음을 자주 쉽게 들을 수 있었다. 그들은 어떻게 하면 일을 잘할 수 있을까 봐 후배보다 얼마를 더 받는지 승진은 언제 하는지, 공채로서 혜택은 어떤지 등등 처우에 대해 관심이 늘 지대했다.
난 그들보다 숫자로 보이는 처우는 당연히 다소 떨어졌지만 그걸 불만 삼아 본 적이 없다. 나에게 있는 많은 결핍 덕에 감사하게도 겸허히 담담히 받아들였다. 오히려 기회를 준 회사를 위해 열심히 배우고 일 욕심을 냈다. 팀장님께서 준 일을 일이 아닌 기회, 공부라고 여겼고 MBA경영대학원에 공짜로 심지어 돈까지 받으며 장학생으로 다닌다고 바꿔 생각했다. 그러고 나니 세상 행복한 회사원이 됐다. 그 당시 일터는 내겐 학교였고 마케팅 실장님과 팀장님은 인자한 교수님이었다.
L사는 현재 롯데월드타워로 이전했지만 10년 전에는 백화점 상품이 메인이었기 때문에 백화점 MD들과의 빈번한 미팅을 위해 을지로 3가 역에 있었다. 덕분에 기획안을 쓰다 아이디어가 잘 떠오르지 않으면 늘 청계천으로 향했다. 그곳은 나의 기획안 시뮬레이터 역할을 했다. 을지로 3가 역에서 시작해 걷고 걷다 청계천의 끝인 광화문을 찍고 다시 돌아올 때면 발은 부르텄지만 늘 아이디어 하나두 개를 얻어 돌아왔다.
결국 결핍은 역설적이게도 날 넘어뜨리지 못하고 온라인 마케터로서 견고하게 자라도록 만들어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