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s it over now?
작년 8월을 끝으로 직장생활이 끝났다.
1년여의 육아휴직 후 내린 결정이었다.
한국말이 서툰 남편과 같이 살면서 불편한 마음으로
직장에 나갔던 날이 참 많았다.
갑자기 아픈 아이를 데리고 병원에 가야 하거나 특히 선생님의 메모를 확인하는 일, 주말에 있었던 일을 정리하여 키즈노트에 남기는 사소한 일들까지 모두 혼자감당해내야만 했다.
연차가 늘 남보다 모잘랐다.
15년의 경력이 쌓인 그즈음 삶의 모든 면이 힘에 부쳤다. 더 이상 이렇게 살아내는 것이 불가능하다고 가혹하게만 느껴졌다.
23년 1월, 2월은 스포츠담당 타 팀 디렉터가 업무가 마음에 안 든다고 앞에서나 뒤에서나 불만을 터뜨렸다. 새해는 괴로운 나날의 연속이었다.
그는 공식 회의석상에서도 성이 잔뜩 난 목소리로 서슴없이 인신공격을 했다. 숨죽이고 듣다가 의견이라도 낼라치면 노골적으로 무시했다.
그해 3월 4명뿐인 팀에서 꼴찌를 했다.
어찌 보면 그렇게 바쁘고 정신없는 삶 속에 일하게 해 준 회사에 감사하다는 마음마저 들었다. 평가가 마음에 안 들면 억울하다고 반박해 볼 수도 있는데 마치 처형대 앞에 선 사형수처럼 담담히 받아들였다.
아주 바빴던 5월 회사는 어떻게 안 좋은 평가를 만회할 건지 원래 하던 일을 하면서 추가적으로 상세한 보고서를 제출하라고 했다.
점점 조여드는 업무와 지시 그리고 삶을 살아내는 것이 참 버거웠던 재작년 6월 1년간의 휴직계를 제출했다.
그 후 아이들을 돌보며 외국인 남편의 공부방이 잘 세워지도록 지원했다.
아이들이 30명이 됐을 때 아직 어린 아들 둘은 자주 놀이터를 맴돌아야만 했다. 수업시간에 방해가 될 때가 많아 도서관에 가있을 때도 종종 있었다. 날씨가 궂은날 비 내리는 창밖을 바라보며 미어지는 마음을 조용히훔쳤다.
남편과 의무적으로 두 아이들의 사춘기가 시작되기 전 가정과 일하는 공간을 분리하자고 다짐했다. 1~2달 부지런히 돌아다니며 적당한 곳을 봐두었다. 그리고 7월 말 남편은 1인 원장이 되었다.
가정집 공부방이 학교 앞으로 가니 타겟층이 바뀌었다.덕분에 우린 정말 정신이 없었다.
그렇다고 막 성공적으로 뭐가 되는 것 없이 눈코 뜰 새 없이 바빠서 기운이 빠졌다.
6개월이 흐르고 새해를 맞이한 지금에서야 겨우 한숨을 돌려본다.
24년 꿋꿋이 살아내었고 새로운 도전을 했다.
15년간의 직장생활을 마무리하게 된 것은 한편으로 유감이었지만 엄마와 아내의 때를 살아내고 있다.
강릉으로 해돋이를 보러 오기 전 날, 그러니까 24년의 마지막 날
생애 처음으로 황태해장국과 시금치나물을 만들었다.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우리 집 남자 1호, 2호 , 3호를 바라봤는데 다행히 엄지 척을 보여주며 맛있게 먹어주었다.
맞벌이에서 외벌이로, 대기업 회사원에서 자영업자의 아내로 지위가 바뀌어 생활비를 많이 아끼며 살아내야 하지만
거대 회사로부터 독립된 소상공인으로서의 삶은 그리 나쁘지만은 않다.
올해는 그동안 배웠던 온라인 사업을 기반으로 작은 도전을 해보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