각성;정신을 차리고 주의 깊게 살피어 경계하는 태도
주일예배가 끝나면 교회 근처에 있는 친정에 들르곤 한다. 출가외인이 된 후로 장녀라는 역할을 잠시 잊고 있었는데 친정엄마가 의자를 끌어당겨 가깝게 앉으셨다. "올해 4월이 아빠의 칠순인데, 네가 장녀니까 뭔가를 주도해서 준비해야하지 않겠니?" 상상했던 것 보다 불쾌한 요청이었다.
K장녀 그리고 칠순
잊고 있었는데 5년 전 우리 4남매는 일흔이 되실 때를 기념해 여행이라도 보내드리자며 곗돈을 붓기 시작했다. 마침 주식시장이 고공행진 하던 때라 의기투합하여 주식계좌로 곗돈을 옮겼고 몇 달 만에 거진 70%의 짭잘한 수익을 올리고 있었다. 강남에 살아서 정말 좋다고 매번 말씀하셨지만 한편으로 재산세와 대출금을 갚느라 힘겹게 집을 이고 지고 살고 계셨다. 부모님이 이해가 잘 안되면서도 안쓰러웠다. 기분 좋으시라고 그동안 모은 곗돈과 수익률을 보여드렸었다. 숫자가 점점 커지는 것을 보며 5년 뒤 함께 가족여행하는 걸 즐겁게 상상하며 하루하루 살아내자는 의도였다.
그런데 하필 재산세를 내야 할 시기가 다가오고 있었다. 친정아버지는 남동생을 통해 곗돈을 깨서 재산세에 보태주길 희망하셨다. 다른 건 다 필요없고 그해 재산세를 해결해주면 정말 마음이 가벼울 것 같다고 하셨다.
실은 우린 늘 그렇게 전시상황처럼 각성된 채로 삶을 꾸역꾸역 살아왔었다. 잠시 카페에 난 큰창을 바라보며 따뜻한 커피한잔 즐길여유가 없는 사람처럼 종종걸음으로 다녔다. 우리에게 먼 곳을 바라볼 여유는 사치였다.
부모님의 그 열심으로 안산에서 시작됐던 유아기는 과천으로 옮겨져 송파로 마침내 그들의 60대가 돼서야 바라고 원하던 강남 땅에 입성됐다. 그러나 그의 바램은 강남 사람의 것이 아니었다. 아버지의 한탄, 바램을 듣고 있자면 강남 방구석에 앉아있긴 하지만 그 시공간이 불협화음 처럼 느껴졌다.
K장녀로서 보다 탄탄하게 부모님의 행복을 바랐던 마음은 사뿐히 즈려밟아져 버렸다. 아빠는 그해의 재산세를 가뿐히 해결하고 갓난아기처럼 해맑게 미소지으셨다. 진심으로 고마워하셨으나 잔고가 0이 찍혔던 그계좌를 바로보는 마음 한켠에 찬바람이 스며든 것 처럼 시렸다. 실은 그당시 동생들은 회사에서 안정된 상태가 아니었다. 전보다 약간 나아진 지금도 여전히 그렇다. 곗돈을 깬 이후로 서너번 다시 시작해보자고 단체톡방에 얘기하다 실패했다. 나름 호기롭게 시작했던 마음은 친정집의 재산세 대용으로 끝나 한 귀퉁이에 버려진 헌신짝 같은 기분이 들었다. 아마 동생들도 그랬나보다. 세월이흘러 그리 반갑지 않은 일흔번째 생일이 몇개월 앞으로 다가왔다.
좁아터진 5평 오피스텔에서 신혼살림을 시작할 때도 청약에 당첨돼 입주시기가 된 동생이 LTV, DTI규제로 대출이 어려워 시댁살이를 하러 들어가는 마당에도 도움의 손길 한번 내밀지 않던 엄마는 아빠의 칠순잔치를 앞두고 "남들 보는 눈도있고, 기본적으로 괜찮은 곳 예약해서 식사하고 현금 백만원 모아서 주면 어떻겠니? 네가 장녀니까 주도해서 준비해봐" 라고 남의 시선을 운운했다.
암묵적으로 각자도생하기로 했던 것 아니었나?
칠순이란 단어를 듣자마자 얼굴이 구겨졌다. 지금 이 시기에 현금 백만원이라니?
엄마는 눈치가 없는 걸까? "아빠가 마뜩잖아 하셨어, 그래도 그건 아니잖아. 4남매끼리 의논해봐" 라고 덧붙이곤 안방으로 들어가 누우셨다.
첫 아이가 태어나고 육아휴직 후 막 복귀했을 무렵 부모님의 환갑이 있었다. 대기업에 근무했기 때문에 인센티브가 나오고 연말정산 환급금이 지급되는 연초가 상대적으로 여유로웠다. 당시 부모님께서 막 복귀한 날 위해 큰 아이 육아에 도움을 주셨기 때문에 고생하신 부모님을 위해 무리해서라도 해외여행을 꼭 보내드리고 싶었다. 사실 그렇게 무리가 되지도 않았다. 몇달 열심히 일하면 다 해결할 수 있었으니까
그런데 소상공인이 된 지금은 얘기가 다르다.
20대가 되고 난 후부터였다. 혹여라도 돈이 궁해 아침에 만원을 부탁하게되면 그녀가 얼마나 괴롭게 삶을 살아내고 있는지 지갑은 탈탈 털어도 먼지밖에 나오지 않는다는 등, 영혼을 끌어모은 푸념들을 힘없이 다 맞고나서야 현관문을 겨우 나설 수 있었다. 그래서 웬만하면 과외를 하거나 인형눈알붙이는 것 같은 소소한 일거리들을 찾아 용돈을 해결했다. 굴욕적인 감정을 느끼지 않기위해서였다.
작년 7월 누구의 도움도 없이 열게 된 교습소는 운좋게도 동네에서 나름 좋게 소문이 났다. 알음알음 학생들이 끊기지 않고 찾아 왔다. 그러나 월세, 전기세, 전자책 구독료같은 고정비용을 제외하고 나니 대기업에서 일할때보다 허리띠를 졸라매야 한달을 살아낼 수 있게 되었다. 12월이었다. 카드값이 생각보다 많이 나왔다. 정말 기가막힌 상황이라 여러번 카톡을 들락날락하다 겨우 용기를 내어 엄마에게 카톡을 보냈다. 돈을 좀 꿔줄 수 있냐는 말이었다. 동물적인 본능으로 굴욕적인 감정을 느낄 태세를 온몸으로 준비했는데 톡옆으로 숫자 1이 사라졌지만 그대로 씹혔다. 그 어떤 때보다 더 굴욕적이었다.
한달정도였나 챙피해서 친정을 일부러 피했다. 그러다 외할머니 외할아버지가 보고싶다는 첫째아이의 성화로 가게된 친정에서 친정아버지는 이제 나이가 몇인데 서로 어색한 일을 만드냐고 꾸지람을 들었다. 아버지의 기지로 어떤 응답도 하지 않으신거라고...
그래 우린 서로 그렇게 살아왔다. 그런데 칠순잔치 준비해야하네?
뭔가 약이오르고 심통이 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