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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푸른향기 Mar 27. 2023

답을 훔쳐 가는 아이

두 놈이 출입문 앞과 뒤에서 몸을 반쯤 내밀고 있다. ('놈"이라고 하면 안 된다. 누구는 우리 집을 방문하려고 상가 과일가게에 갔다가 사과를 보고 이쁜 놈으로 골라주세요, 했는데 과일가게 주인으로부터 못된 말을 얻어들었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다. 하지만 내가 쓰는 '놈'은 욕이라기 보다도 비하하려는 말이라기 보다도 은근한 애정을 함축해서 지칭하는 말이다) 둘 다 위아래 회색추리닝을 입었다. 가장 말을 안 듣는 놈들이다. 내가 다가가자 몸을 교실 쪽으로 쏙 집어넣는다. 중학교 1학년. 천방지축이다. 등치는 다 커서 나보다 두 배는 넘을 것 같은 아이들이지만 잠시도 가만있지를 못한다. 수업 시간에도 갑자기 벌떡 일어나 쓰레기통으로 가고, 사물함을 뒤지기도 하고, 지랑 친한 친구한테 몇 마디 건네고 오기도 한다. 그럴 때마다 여기는 초등학교가 아니라고 매번 꾸짖지만 마음대로 교실 안을 활보하는 버릇을 쉽게 고칠 수는 없다. 행동만 그런 것이 아니라 말도 천방지축이다. 

 어제, 그놈들이 나의 화를 돋웠다. 이오덕의 '꿩'을 배우고 줄거리를 정리해 보는 활동 중이었다. 줄거리를 다섯 칸 만화로 제시하고 내용을 한 문장으로 정리하는 거였다. 한 문장이라고 해야 이미 주어진 형식에 빈칸만 채우면 되는 거였다. 어떤 아이는 금방 알아서 쓰기도 하고 또 어떤 아이는 책장을 뒤적이며 알맞은 말을 찾아내기도 하고, 또 어떤 아이는 머리를 싸매며 다른 아이한테 물어보기도 하는 중이었다. 그런데 한 놈( 그 한 놈은 회색추리닝 놈 중의 한 명)이 벌떡 일어나더니 교탁 앞으로 와서 내 책을 넘겨본다. 내 책은 교사용 책이라서 답이 다 써져 있는 책. 힐끗 보더니, 

" 야 야, '당당하게 맞선다' 다" 

라고 하더니 지 자리로 돌아가서 얼른 지 책에다 적는다.

 그것이 한 번이 아니었다. 또 한 번 그와 같은 동작을 되풀이한다.

"어, '순이를 데리고 오겠다'~구나"

마침 지 자리는 맨 앞자리라, 얼른 나와서 넘겨보기 딱 알맞기도 했다.

아니 아니, 이놈이... 여태 이런 놈은 없었다. 감히 선생님의 책을 넘겨보고 답을 훔쳐가다니...

답을 허술하게 내놓고 있는 내가 잘못인가? 아니면 아이들과 똑같은 책을 들고 다니지 않고 교사용이라고 답이 다 적힌 책을 들고 다니는 것이 문제였나?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지들보고 해결하라는 문제를 냉큼 나와서 선생님 답을 훔쳐보다니, 그러고도 모자라서 지만 알고 가는 게 아니라 아이들에게 큰 목소리로 외치고 가다니. 완전 수업 훼방이다. 물론 다른 아이들은 그러거나 말거나 지네 할 일에 열중하고 있는 것이 대부분이었지만. 나는 속으로 '아니, 아니, 이 놈이'를 연방 해대고 있었지만, 겉으로는 크게 나무라지 못했다. 너무 어이가 없어서이기도 했고, 그렇게라도 해서 빈칸을 채우고 있으니 다행이다 싶었기 때문이다. 

 

오늘도 막 수업을 막 시작하려는데 그 회색추리닝 한 놈이 또 앞으로 나오더니 컴퓨터를 탁 켠다. 뭘 하려나 싶었는데 그러고 들어간다. 마침 컴퓨터로 노래를 틀어줄 일이 있었는데 컴퓨터가 켜져 있으니 쉽게 시작할 수 있었다. 그 아이가 낼름 말한다.

 "어때요? 제가 잘했지요?"

그래그래, 잘했다, 잘했어. 네가 아니면 비번을 찾아봐야 했을 텐데... 아이는 의기양양해서 헤벌레 웃는다. 어찌 보면 미워할 수가 없다. 공부를 안 한다고, 수업시간에 얌전하게 앉아 있지를 못한다고, 선생님 말에 따꿍따꿍 허튼 대답을 해댄다고 뭐라고 할 수가 없다. 여기 이곳에서는 학교에 나와주는 것만도 고마운 아이들이 여럿 있으니까.  

 "소설 '꿩'과 노래 '버터플라이'의 공통점이 뭐지? "

 "날아오르는 거요~" 아이들 여럿이서 큰 목소리로 답한다. 소설 '꿩'은 남의 책가방을 들고 산길을 넘어 학교에 가야 했던 아이가 꿩이 날아오르는 것을 보고 괴롭히는 아이들에게 당당하게 맞선다는 내용이었다. 

"그래 너희들도 누가 찐따로 만들라고 하면 당당하게 날아올라야돼애~~너희를 누가 왕따시키거나 바보처럼 만들면 가만히 있으면 안 되애~ 알았어?"

"네예~~~"

아이들이 왁자하게 웃는다.  아이들은 내 억양이 웃겨서 선생님이 찐따라는 표현을 써서 웃는지도 모르지만, 하여튼 아이들을 미워할 수는 없다. 회색 추리닝 두 놈이 앞 뒤에서 수업 훼방을 놓기도 하지만 몇 번 눈총을 줄 뿐, 미워할 수는 없다. 미리 나와서 망을 보고, 선생 답을 훔쳐가고, 컴퓨터로 장난 치고 그러면서도 다 배우는 게 있고 속으로는 자라고 있는 중인 걸 알고 있다. 목련꽃이 활짝 피어서 2층 교실 높이만큼 올라와 있다. 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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