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래서 어쩐다고?

-시골살이 13

by 푸른향기

처음에는 무서웠다. 오가는 사람이 별로 없는 길이, 오후 다섯 시가 넘으면 찾아오는 저녁이, 해가 넘어가면 창밖에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어둠이, 산 건너편에서 짖어대는 개 울음과 산짐승 소리가. 무서웠다. 나에게 아무런 해를 가하지 않는데 그냥 무서웠다.

무서움 속에 똬리를 틀고 있는 건 외로움이었다. 그 외로움이란 건 원래 태어날 때부터 한 움큼씩 생겨나는 것인지, 저녁 어스름만 되면 슬금슬금 온몸에 번져오는 것이다. 어쩔 때는 실존에 직면한 듯 정신이 번쩍 날 때도 있지만, 대부분은 신발에 진흙이 묻어나는 것처럼 외롭다는 사실은 사방에 덕지덕지 묻어나곤 했다.

처음 마을로 이삿짐을 끌고 들어올 때부터 그 무서움과 외로움은 예측한 것이었다. 훅 끼치는 거름 냄새와 함께 그것들은 나를 더 작게 만드는 것 같았고, 스스로 선택한 일을 돌아보고 또 돌아보게 만들었다.




'나는 도시형 인간인가?' 그건 아닌 듯하다. 도시에서 학교를 다녔고, 내내 아파트에서 살았지만 도시형이라고 할 만큼 나는 현대적이지도 사교적이지도 않다. 그냥 지나가는 사람들을 보면서 활기를 느끼거나 사람들의 옷차림에서 계절의 변화를 느끼고 위층 아이가 뛰는 소리를 귀찮아했을 뿐이다. 어쩌면 도시에서 그냥 산다는 것은 알게 모르게 사람들 에너지를 몸에 받고 있었던 건 아닌지 모르겠다. 아파트 실내 온도가 아래층 위층에서 돌리는 보일러 기운 때문에 덤으로 유지되는 것처럼.


나는 도시형 인간이 아닌 것만큼 시골형 인간도 아니라고 진단을 내린다. EBS 프로그램 중 날마다 방영되는 '한국기행'을 보면 귀촌한 사람들이 꽃도 가꾸고 동물도 키우면서 마냥 행복해하는 모습이 종종 나온다.

"도시에서 살 때는 몰랐는데 이렇게 들어와서 자연과 함께 사니까 너무 좋아요"


그런가? 식물을 키우고 꽃을 가꾸는 것을 정말 재미있어하는 사람들이 있다. 철마다 꽃을 사다 심고 이웃에 새로운 꽃이 보이면 또 사다 심어 식구를 불린다. 작년에 심은 꽃을 죽이지 않고, 꽃 모양도 아기자기하게 이쁘게 잘 키운다. 꽃뿐만 아니라 꽤 큰 텃밭도 느끈히 가꾼다. 그네들은 부지런하고 열정적이다. 꽃과 야채와 동물을 키우는 데 있어서 그렇다.



그런데 나는 그냥 바라보는 것이 좋을 뿐이다. 맞은편 산을 하염없이 바라보는 것이 좋고 피어있는 꽃을 보는 게 좋다. 꽃을 가꾸고 텃밭의 야채를 키우기보다 잔디밭에 돋아나는 풀을 뽑느라 온 힘을 들였다. 온갖 생명들이 꿈틀대고 살아나고 용솟음치는 기운보다 가지런하고 깨끗한 마당을 원했다. 어떤 사람들은 생명을 가꾸고 키우는데 온 힘을 기울이고 그것에서 행복을 느낀다고 하는데 나는 있는 생명을 없애기 위해서 온 힘을 기울인 셈이다. 물론 텃밭의 식물을 잘 키우기 위해서 잡초를 뽑아야 하는 수고를 늘 해야하지만, 내가 하는 수고란 단지 그놈의 잔디를 위해서 그놈의 깨끗한 마당을 청소하듯 깨끗하게 만들기 위해서였다.


풀과 씨름하면 반드시 진다는 말도 있는데 나는 거의 7년 넘게 풀과 전쟁을 치러왔다. 풀 대문에 팔꿈치 염증이 생기고 말았고 더 이상 해볼 수가 없으니 내가 진 꼴이다. 내가 풀을 못 뽑고 있는 사이, 쑥부쟁이는 무성히 번져서 마당을 침범하고 있고 나무 밑동마다 잡초들이 퍼렇게 우북하니 쌓이고 있다. 꽃을 잘 가꾸고 있는 옆집 K 선생네나 대규모 텃밭을 일구고 있는 J네에 비하면 참 초라하다.


내가 좋아하는 건 책 읽고 음악 듣고 글 쓰는 거. 한가한 베짱이처럼 따뜻한 남쪽 햇빛 아래서 상념에 젖는 거... 그리고 걷는 거. 처음 시골에 들어와서 내 맘대로 걷지 못한다고 불평을 했다.


- 왜? 마을 길을 걸으면 되잖아?

- 무서워서 걸을 수가 없어. 개들은 또 얼마나 짖어댄다고...


그러나 지금은 혼자서도 걷는다. 7년 넘게 살아온 덕이다. 해거름 녘에 집을 나서서 논길을 따라 걷는다. 처음에 무서웠던 길이 인제 하나도 무섭지 않고 산에서 울려오는 짐승 소리도 겁나지 않는다. 누가 해칠까 봐 무서워하던 막연한 느낌이 없어진 것이다. 사실 누가 육십 가까운 이 조그만 여자를 해치려 달려들겠는가. 외로움을 타고나는 것처럼 여자라서 가지는 두려움을 사회적으로 익혔을 뿐이지. 조금 더 있으면 밤에도 플래시를 들고 밤길을 걸을 수 있을 정도가 될는지 모른다.


무엇이든 오래 있어보거나 오래 하다 보면 없던 힘이 생기는 듯하다. 안 쓰는 근육에 힘이 붙는 것처럼!


아침에 일어나서 하루가 시작되는 빛을 느끼고, 새벽에 내린 이슬이 물러나서 햇빛이 시간마다 각도를 달리하면서 집 안으로 들어오는 것을 보고 , 그러다 해가 질 때쯤 마을 한 바퀴를 걷고 들어와 밥을 지어먹고 마당 위로 둥실 떠오르는 달을 본다. 방충망을 뚫고 들어오는 선명한 달빛에 에린 마음을 달래기도 하고,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는 밤의 적막을 편안하게 받아들일 줄도 안다.

힘세고 기운찬 사람들처럼 부지런히 꽃 농사 밭농사를 짓지는 못해도 계절마다 찾아오는 몇 가지 꽃들이 이쁘고 귀하다. 손바닥만 한 텃밭에서 겨우내 죽지 않고 살아있는 몇 포기 쪽파가 대견하고 오지다.

마당 한가운데 이제 제법 커진 매화나무가 꽃을 한창 맺고 있다. 아침이면 꼭 등불을 들고 있는 것처럼 환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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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시골에 와서 좋냐고? 무엇을 잘 가꾸지도 못하고 근사한 정원이나 푸짐한 텃밭도 아니지만 그래도 괜찮다. 도시에 나갈 생각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지금은 이대로가 좋기도 하다. 그리고 참 많이 알고 배웠다. 이웃에 대해, 지치지 않는 생명에 대해, 그리고 변함없는 것들에 대해. 그 변함없는 것들이 주는 깊은 위로에 대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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