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견맞추기는 참 힘들다

시골살이 12

by 푸른향기

매화꽃이 피었다. 한두 송이가 팝콘처럼 톡톡 끝이 부풀어 오르더니 엊그제부터는 활짝 피었다. 코 끝을 꽃잎에 가까이 대본다. 어쩜 향기가 이렇게 좋은가! 새큼한 향 끝으로 달콤한 기운이 깊게 묻어 나온다. 숨을 길게 들이마신다. 매화향기가 뱃속에 이르도록. 향기가 꾸굴꾸굴한 내장을 싸악 어루만져주도록.

큼큼 향기를 맡다가 뒷마당으로 가서 흰빛 매화에게로 가서 또 코를 들이민다. 흠 여기도 좋군... 그 옆에 천리향은 아직 잎을 준비 중이다. 살구나무도 꽃몽오리를 꽤 많이 맺고 있다. 수선화는 진즉 피어서 노란 고개를 흔들흔들거리고 있다. 좀 키가 작은 수선화도 군데군데 피었다. 그 옆에 할미꽃이 어느새 올라와서 하얀 솜털 속에 고급스런 자줏빛 꽃잎을 내밀고 있다. 작약 싹이 많이 올라왔다. 목련도 곧 피려고 꽃봉오리를 햇빛 쪽으로 모으고 있고. 사방에서 봄이 시작되고 있다. 꽃이 핀 것은 꽃으로, 아직 꽃이 아닌 것들은 싹으로 봄이 시작되었음을 보여주고 있다. 한 걸음 디뎌 봄을 확인하고 또 한 걸음 내디뎌 봄을 본다. 좋다!

" 오늘은 집에 있으까?"

"응 해야 할 일도 있고, 집에 있자"

"으응 해야 할 일이 뭔데?"

" 쑥부쟁이 싹도 잘라야 하고, 나무도 옮겨 심어야 하고?"

"무슨 나무를 또 옮겨 심어?"

한참을 얘기하다 남편이 저번에 뒤뜰로 옮겨 심은 나무가 라일락 나무란 걸 알았다. 아니, 저번에 옮겨 심은 게 라일락이었다고? 가지만 있는 거라서 미처 라일락인 줄 몰랐다. 라일락! 그 이름이 이뻐서 또 그 꽃잎 색깔이 이뻐서 열 그루 정도 사다 앞마당 한쪽에 나란히 심었던 건데, 너무 빽빽하다고 옮겨 심었단다. 아이고!!


"꽃은 모여 있어야 이쁘다고! 라일락은 가지가 가늘고 꽃도 크지 않다고! 한 군데 있어야 볼만하지이~~"

나의 볼멘소리에 남편은 나무는 띄엄띄엄 있어야 자유롭게 크는 거라고 반박한다.

당장 뒷마당으로 나가서 그놈들을 다시 확인했다. 자세히 보니 라일락 나무를 세 그루 옮겨 심어놓았다. 내가 다시 옮겨 심을 수는 없다. 못마땅해도 지켜보는 수밖에 없다. 나한테 묻지도 않고 옮겨 심어버린 처사에 분노하면서도 어쩔 수 없다는 체념이 막아선다. 옆집 여자는 힘이 센지 혼자서 개집도 짓는데, 나는 힘을 쓸 수가 없으니 입만 살아서 이래라저래라 할 뿐이다. 억울하지만 힘을 쓰는 사람이 더 힘들겠지 하고 마음을 누그려뜨려 본다.

작년 겨울부터 시작된 팔꿈치 염증은 봄이 와도 낫지를 않아서 무엇을 제대로 할 수가 없다. 작년 이맘때는 밥만 먹고 나면 마당에 앉아서 풀을 뽑고 가지를 치고 했는데... 지금은 또 아플까봐 손을 아예 주머니에 넣고 꺼내지 않으려고 노력한다. 먹고 싶은 음식을 놓아두고 참고 있는 것처럼, 눈 앞에 잡초를 보고 손이 근질거리는 것을 참고 있다. 저것을 콱 뽑아버려야 하는데... 이것도 콱 뽑아내야 하는데... 아이고, 좀 있으면 잔디밭이 풀밭이 되겠구나...

내가 힘을 쓸 수 없으니 나무를 제자리로 다시 옮겨 심을 수도 없고, 돋아나는 잡초를 보는 것도 어쩔 수 없는 일이다.


" 텃밭에 상추 심기 전에 제초제 하자고, 엉?"

남편은 대답이 없다. 내가 팔이 아파서 풀을 뽑지 못하자, 제초제를 뿌리자고 암묵적인 합의를 해왔던 터였다. 남편은 풀을 죽이는 거라고 완강하게 반대해왔지만, 몇 번 쪼그려 앉아서 풀을 뽑아 보더니 그 싫어하던 제초제에 동의하는 눈치이다. 사방에 싹이 돋아나고 누렇기만 하던 잔디밭도 조금씩 푸른빛이 돌기 시작한다. 저 잔디 잎이 나오기 전에 제초제를 뿌려야 하는데... 또 마음이 급해진다.

실랑이를 하는 사이 봄날 하루가 절반을 지나고 있다. 아깝다. 이렇게 지나가버리는 봄날 하루가 아깝다. 어디 가서 봄빛을 마냥 쐬고 싶다. 가까운 산이라도 가볼까. 가면 진달래가 많이 피었을 텐데... 집에 있겠다고 한 남편을 놔두고 혼자 가볼까... 그러나 지난주 피곤이 덜 풀려서인지 혼자 운전하고 가기가 내키지가 않는다. 게다가 머릿속은 새로 옮긴 학교 아이들이 바글바글 거리고 있다. 섬마을 네 명을 가르치다가 스무 명을 가르쳐야 하니, 서른 명 가르치던 옛날은 다 잊고 당장 스무 명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 허덕대고 있다.

라디오에서 정오를 알려주고 프로그램이 바뀐다. 아, 그래 집에 있자. 집에도 봄이 사방에 있으니, 복잡한 머리도 놓아두고 마당에 나가서 햇빛이나 쏘이자. 미세먼지인지 안개인지 공기가 뿌옇지만. 논 가운데 뚝뚝 박혀있는 전봇대가 시커멓고, 건너편 비닐하우스 검은 천막이 반은 뜯겨 나가 있다. 시커먼 비닐봉지가 군데군데 보이는 누추하고 궁벽진 시골마을의 봄이다. 깨끗하게 정돈된 햇빛을 보고 싶었다. 그러나 내가 있는 곳은 지금 여기! 욕심 내지 말고 그냥 여기서 봄을 만끽하기로 한다. 봄이 마당 안쪽까지 다가와 막 뒹굴기 시작했으니...마침 화단에도 진달래가 막 피기 시작했으니...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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