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래도 그냥 산다

-시골살이 11

by 푸른향기

아파트 생활을 청산하고 시골에 들어와 산 지 8년째다. 같이 집을 지었던 J네와 개똥 때문에, 수탉 울음 때문에 관계가 틀어지고 말았지만 어느새 7년을 훌쩍 넘게 살고 있다. 시간이 빠르기도 하지만, 그럭저럭 시골살이가 주는 매력이 있으니, 떨치고 나가지 못했던 것 같다.


아침에 일어나 바라보는 풍경은 늘 어제와 다르고 시간마다 다르고 계절마다 다르다. 하루를 시작하는 색깔이 날마다 다르다는 것이, 그것을 바라볼 수 있고 느낄 수 있다는 것이 참 좋다. 우리 집 바로 앞은 논, 또 그 앞은 야트막한 산이다. 지금은 겨울이라 듬성듬성한 가지가 많이 보이지만, 봄이 되면 연한 나뭇잎이 가득 차 오르면서 산벚꽃도 잔잔하게 피어오른다. 마루에 걸터앉아 산을 바라보고 있으면 변화무쌍한 화면을 보는 것 같은 느낌이 든다.

아직 파리나 모기가 등장하지 않은 따뜻한 봄날 이른 아침이면, 마루에 앉아서 맞은편 산과 마당으로 들어서는 아침 기운을 바라보며 사과 하나를 깎아먹는 것으로 하루를 시작하곤 한다. 돌담으로 둘러싸인 마당이 서서히 어둠에서 깨어나고, 산 아래 햇빛이 천천히 집 둘레로 번져 오르면, 내 위장과 뇌도 행복하게 깨어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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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루에 앉아 빛을 바라보는 것이 좋다는 것, 그것은 해거름 녘도 마찬가지다. 아침이 시작하는 빛이라면 해거름 녘의 빛은 있던 것을 거두어 가는 빛이다. 마당에 들어찼던 밝은 기운이 시나브로 가셔지면서 연한 어둠이 점점 진하게 다가오는 것을 마음 놓고 보는 즐거움이 있다. 하루의 일과를 끝내고 밀려오는 노곤함에 빠져있다 보면 하루해도 그렇게 어둠에 젖어드는 것을 느낄 수 있다. 넉넉히 30분 이상을 아무것도 하지 않고 그냥 바라보는 것으로 시간이 훌쩍 지날 때가 많다.


밭일을 끝내고 돌아가는 뒷집 할매가 지나가다 돌담 너머로 말을 걸기도 한다.

"뭐 하요? " "이거 하나 주까" !

그러면서 캐 가지고 가던 시금치나 양파 이런 것을 한 무더기 대문 앞에 놓고 가기도 한다.


시골 인심은 별로 살갑지는 않지만 그럭저럭 살아있다. 뒷집 할매도 그렇지만, 그 너머 늙은 총각도 심심찮게 자기가 키운 호박이나, 감, 무, 배추 같은 것을 철마다 주곤 한다. 물론 우리가 명절 때가 되면 가벼운 선물을 하지만 꼭 선물을 받아서가 아닌 듯하다. 건네주는 폼이 흔연스럽고 자연스럽기 때문이다.




우리 집은 가운뎃 집이다. 양 옆으로 새로 지은 집이 나란히 있다. 왼쪽은 우리와 같이 집을 지은 J네, 오른쪽은 퇴직하고 가끔 서울에서 내려오는 K선생네. 우리가 이사 왔을 때 오른쪽 집은 비어있었는데, K선생이 이사 온 후로는 어라, J와 K선생이 무척 가까워졌다. 둘 다 퇴직하고 나이가 비슷하기도 하지만 우선 성격이 잘 맞는듯했다. 물론 오지랖 넓은 J가 시골생활이 낯선 K선생을 많이 도와준 탓도 있다. 둘은 같이 식당을 다녀오기도 하고 무엇을 서로 주고받는지 우리 집을 가운데 두고 부산나게 오고 가기도 한다. K선생은 J네로 가서 "달래야~~"하면서 그 집 딸아이를 부르는 것처럼 들어서서 마당에서 이거 저거 둘러보며 얘기를 나누고, 또 J는 달래를 어깨에 들쳐 메고 "언니~~"하면서 K집을 들어서기도 한다.

둘이 오가는 것을 돌담 너머로 보고 있으면 내가 꼭 왕따가 되는 듯한 느낌도 들어서 가슴 한편이 싸늘해진다. 학교에서도 안 당해본 왕따를 시골에 와서 느낀다는 것이 참 어리석고 스스로 모자라다는 생각이 들지만 할 수 없다. 영낙없이 그런 느낌이 드는 걸...

그래도 할 수 없다, 그냥 산다


나랑 친했던 J가 그동안의 불편했던 관계 때문에 K선생과 친해지고 나는 외톨이가 되는 듯한 기분이 들지만 그것을 돌담 너머로 지나다니는 동네 사람으로 여기는 연습을 자꾸 하다 보니 안 좋은 느낌도 많이 덤덤해졌다. 두 사람의 왕래가 뒷집 할매나 늙은 총각이 주고 가는 농작물같이 고맙고 감사한 느낌은 아니지만, 그냥 동네 골목길에서 들려오는 사람 사는 소리로 들리기도 하니까.




뒷집 할매가, 뒷집 할매의 나이 먹은 딸이 머릿수건을 하고 지나가고, 늙은 총각이 경운기를 가져와 앞 논을 갈거나 뒷짐 지고 논가를 둘러 다니고, J와 K선생이 몇 번 왔다 갔다 하는 사이에 하루해는 꼬박 넘어가곤 한다.

그러면 마당은 어둠에 까맣게 잠기고 집 앞 가로등에 불이 들어온다. 개들이 왕왕 짖어대기도 하고, 옆산에서 키우고 있는 듯한 염소가 메에메에 울고, 어쩌다 목이 콱콱 막히는 소리를 가진 산짐승이 울기도 한다.


어둠이 대문을 잠그는 것처럼 마을을 단단히 잠근다. 그러면 나는 제자리로 돌아가듯, 집 안으로 들어와 밥을 한다. 밥을 하다 창밖을 내다본다. 그러면 창은 더 이상 밖을 보여주지 않고 이제는 내 얼굴을 보여준다. 까만 창으로 동그랗게 떠오르는 내 얼굴의 실루엣. 이제 그만 밖을 내다보고 니 안을 들여다보라는 신호이다.

이렇게 진한 어둠이 있어 가능한 나의 실루엣이다. 그러니, 고맙고 다행이다. 이 시골에 와서 확실한 나의 실루엣을 볼 수 있으니까 말이다.



<계 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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