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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푸른향기 Aug 23. 2022

강릉에서 1박 2일


1.

경포 해변에서

발밑에 묻어나는 모래
떨어져 있는 깃털
허공을 향해 하품하는 갈매기
새벽엔 새들도 하품을 하는구나
바다는 치맛단처럼 펄럭펄럭 들썩이고
小 글자 모양 발자국들
작다, 작다, 수없이 작다
물살에 쓸렸다 내려가는 찢긴 물고기 시체
그것을 물었다가 얼른 놓아버리는 갈매기
왜 먹지 않고 놓았니 꾸룩꾸룩
수평선 위 흰 구름, 그 위에 먹구름, 틈 사이로는 푸른 하늘
물에 내려앉아 배처럼 흔들리는 갈매기
그 앞에 쪼그려 앉아 내가 있다
한 점 자국같이
한 점 모래같이
한 점 바람같이

작게, 작게 수없이 작게

호수는 어디 있니?
어디서부터 바다니?

높다란 모래언덕은 한쪽을 허물어 물길을 내고 있었다
옅은 바닷물이 소용돌이치며 호숫가 쪽으로 섞이고 있었다


2.

강릉에 갔다. 발음부터 부드럽다, 강릉, 강릉. 자꾸 말해본다. 얹혀 있는 것들이 부드럽게 흘러내릴 것 같은 느낌! 아, 난 또 그 무엇이 얹혀 있다고 말해버린 걸까. 어쩌면 습관적으로 얹혀 있다고 말해버리는 것은 아닐까. 사실 돌아보면 아무것도 없는데 얹혀 있다고 생각한다. 하긴 일상이 어찌 보면 다 얹힌 것 아닌가? 해야 하는 일들, 기억에 남아 있는 일들, 언짢은 느낌, 부담스러운 느낌, 말이 잘  안 통하는 사람, 웃었으면 좋겠는데 울고 있는 사람, 재미있으면 좋겠는데 재미없는 영화, 시원하면 좋겠는데 덥고 습한 날씨... 내 마음대로 안 되는 일들을 모두 얹힌 일들이라고 말하고 있지는 않는가. 

 어쨌든 강릉은 발음부터 나긋나긋해서 좋다. 부드러운 아들의 손을 애인처럼 잡고 식당을 찾는다. 순두부 식당이 유명하단다. 아들과 함께 다니면 길을 헤매지 않아 좋다. 어디든 척척 알아내고 안내한다. 유명한 맛집이라고 찾아간 그곳은 초당 순두부 동네였다. 순두부 식당이 엄청 많았다. (허균의 아버지 허엽의 호가 초당, 집 앞의 샘물의 맛이 좋아 두부를 만들게 되었다고 했다). 이름부터 부드럽게 다가왔던 강릉이 더 부드러워진 느낌! 순두부라니. 두부도 순한데 게다가 순두부라니. 목구멍부터 순해지는 느낌이다. 할머니가 한다는' 할머니 집'에 들어가 순두부 찌개를 시켰다. 들어간 것은 오직 두부와 느타리버섯. 후추가 살짝 뿌려져 있었는데 맛있었다. 조미료 맛이 약간 나는 듯했지만, 꽤 괜찮았다. 맛집이란 말에 어울리게 식당 입구에 어느새 줄이 기다랗게 늘어서 있다. 밑반찬으로 나왔던 마늘종 무침을 더 달라고 했는데 손님이 너무 많아 정신이 없는 모양이었다. 마늘종 무침을 포기하고 나왔다. 

 근처에 있는 허난설헌 생가에 들렀다. 월요일이어서 휴관이었다. 대신 생가 뒤편에 소나무 숲이 있어 걸었다. 생각하지도 않았던 것이 나타났을 때는 그것이 더욱 반가운 법. 꽤 널찍한 소나무 숲을 걸을 수 있었다. 게다가 어떤 부분은 맨발로 걸을 수 있었다. 이제 막 맨발 걷기를 시작한 터라 어디를 가기만 하면 걸을 수 있는 흙길부터 찾게 된다. 강릉, 이 먼 곳까지 와서 예상치 못한 곳에서 맨발로 걸을 수 있을 줄이야. 솔잎 가지를 밟는 느낌이 좋다. 은은히 풍겨오는 냄새는 무엇일까? 피톤치드? 솔잎향? 피톤치드나 솔잎향이라고 하기에는 좀 강한 냄새였다. 이제 막 풀을 벤 모양이라고 아들이 일러준다. 맞다. 풀이 잘리고 난 냄새였다. 아마 예초기로 소나무 밑의 풀을 정리한 모양이다. 푸른 생즙이 나올 것 같은 냄새!

 

 흐린 날이라 냄새는 더 낮게 깔리고 있는 듯했다. 좀 앉았다 가기로 했다. 생가 앞쪽으로 나갔다. 수국과 배롱나무와 백일홍 꽃이 피어 있었다. 젊은 엄마와 대학생쯤으로 보이는 딸이 나란히 사랑채 툇마루에 앉아 있는 것을 무연하게 보았다. 둘은 비 내리는 작은 정원을 한참 바라보다 일어났다. 우리도 그 자리에 가서 앉아 본다. 그들이 보았던 것은 무엇이었을까. 나는 그저 맨 흙바닥과 그 위에 소리 없이 내리는 비를 본다. 좋다. '지금'을 보고 싶다. 어디 가나 있는 지금을, 지금의 고요를. 고요는 쉽사리 눈에 띄지 않는다. 번쩍 눈에 보이다가 어느새 날아가버린다. 한 마리 새처럼. 앉을라 하면 어느새 가버리고 없다. 어느새 어제가 따라와 상념이 일고 어느새 훼방꾼이 나타나 흩트려놓고 만다. 머릿속은 흙탕물처럼 뿌애진다.  

 마침 새 한 마리가 푸드덕 일어난다. 우리도 따라 일어났다. 그냥 한 바퀴 돌아볼까? 정원은 단정하게 가꾸어져 있었다. 허초희가 살아생전에 이루어내지 못한 것을 죽어서 보고 있구나 싶었다. 허초희는 어떤 사람이었어? 허균의 누이라고, 허균은 홍길동전을 쓴 사람이라고, 아들에게 짧게 말해준다. 집안은 이런 터를 잡고 살았을 만큼 대단한 양반가였음에도, 허균은 서자를 주인공으로 한 한글소설을 쓴 사람이라고 말했다. 남들이 하지 않은 일을 앞서서 한 사람들 이야기를 할 때면 늘 가슴이 뭉클해진다. 남들이 모두 하고 있는 일을 따라가지 않는 사람, 남들이 하고 있는 일을 하지 않거나 남들이 아니라고 말하는 일을 서슴없이 하는 사람들의 일생을 얘기할 때는 마음이 아파온다. 

 

허난설헌, 허초희. 그녀는 무엇을 썼지? 얼른 떠오르지 않는 다. 허균의 누나라는 말이 먼저 떠오른다. 두 아이를 잃었다는 그녀의 생애에서 멈칫한다. 저렇게 단정하게 앉아 있었을 여인의 아픔이 어미의 아픔이었구나. 아픔이 시가 되고 아픔이 동상이 되었다. 

 커피 향이 뛰어나기로 유명하다는 카페에 들렀다. 카페는 천장까지 책 표지로 장식되어 있었다. 모자까지 깔끔하게 쓴 종업원이 주문을 받는다. 책으로 장식된 벽면이 사람을 편안하게 해 준다. 건너편으로 보이는 작은 호수도 그 편안함을 더해주는 듯했다. 때마침 높다란 좌석에 노부부가 앉아 있다. 이런 카페에서 나이 먹은 부부를 보게 되니 반갑다. 이름난 카페가 젊은이들만의 장소가 아니라는 점이 마음 놓이게 한다. 

먹지도 못하는 커피 향을 물씬 맡고 숙소로 향한다. 숙소는 바로 경포 해수욕장 앞. 차를 따로 가져오지 않아 해수욕장 근처로 숙소를 정했다. 숙소 입구에 들어오자마자 확 트여 있는 바다를 볼 수 있었다. 강릉이 그 부드러운 가슴을 열고 한꺼번에 다가오고 있었다. 


3. 

새벽 다섯 시. 내가 일어나는 시각이다. 불면증에 시달리다 어느 유튜브에서 들었던 말, '일어나는 시간을 일정하게 해라'는 말을 충실히 따르고 있다. 그 말을 들은 이후로 한 번도 다섯 시를 넘긴 적이 없다. 알람이 울리면 그대로 발딱 일어난다. 나에게 불면증은 그만큼 지독한 것이었다. 불면증에 좋다면 그 무슨 일이라도 한다. 하루 만보도 그래서 시작한 일. 만보를 시작한 후로 하루도 거르지 않고 만보를 채우고 있다. 집착이라고 해도 좋다. 하루 만보 걷기가 맨발로 만보 걷기가 되었다. 이제는 맨발로 만보쯤 걷는다. 힘들면 팔천보 쯤은 맨발로, 나머지는 신발로 채운다. 

 새벽 다섯 시에 해변으로 나섰다. 해변가에 나 혼자 있다. 아직 아무도 나오지 않았다. 오늘은 새벽에 만보를 걷자. 어차피 오늘 기차를 타고 집에 가야 하니 걸을 시간이 따로 없을 듯했다. 운동화를 벗어두고 걷는다. 모래밭에 앉아 있던 갈매기 떼가 후루룩 날아오른다. 날아갔던 갈매기가 다시 내려와 앉는다. 갈매기도 비둘기처럼 이제 사람을 별로 무서워하지 않는 모양이다. 한 갈매기가 하품을 한다. 아, 갈매기도 하품을 하는구나,  새들도 하품을 하는구나. 갈매기는 목젖이라도 보여 줄듯이 입을 크게 벌렸다 다문다. 아마 지금이 겨울이라면 그 입에서 입김이 나올 것만 같았다. 갈매기도 이제 막 잠에서 깨어났나 보다. 갈매기들이 한 방향으로 앉아 있다. 모두 한결같이 수평선 쪽을 향해 있다. 일직선으로 쭉 뻗은 수평선이다. 서해에서는 볼 수 없는 풍경이다. 뻘밭과 양식하는 물건들이 둥둥 떠 있는 서해와는 다르다. 단순 명쾌하다. 수평선과 바다와 모래. 그것뿐이다. 아니 그 위에 하늘만 추가한다. 

 

단순 명쾌한 바다 앞에서 내 삶이 단순 명쾌해지는 것처럼 속이 다 시원하다. 걸림이 없는 새벽 바다에서 나도 걸림 없는 마음이 된다. 

 그런데 발밑을 보니 꼭 단순 명쾌하지만은 않았다. 거기에는 새들이 찍어놓은 수없는 발자국이 있었다. 그리고 그것을 떠받치고 있는 한 알 한 알의 모래들, 모래 속에 반쯤 파묻혀 있는 찢긴 물고기 시체. 무엇이든 내 식대로 볼 일은 아니다. 있는 그대로 봐야 한다. 있는 그대로 보면 거기에는 수없는 존재들이 숨어 있다. 수없는 비밀이 숨겨 있는 것처럼. 모래알의 숫자와 별들의 숫자는 비슷할까? 나도 그 수없는 존재의 작은 알갱이이거나 작은 발자국이거나 작은 먼지일 것이다. 파도가 휙 몰아쳐오면 순식간에 날아갈 작은 존재... 순식간에 없어질 존재...

   갈매기의 하품처럼, 갈매기가 내뿜는 입 속의 공기처럼, 밖으로 나오면 잘 보이지 않거나 금방 사라질...그런 존재 아니겠는가. 


4.

 아직 자고 있는 아들을 깨웠다. 갈매기의 하품을 보았다고 말하지 않았다. 대신 따뜻한 아침으로 무엇을 먹을까를 이야기했다. 돌아오는 내내는 조용하고 평화로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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