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 한국방문 일정은 확실하게 세 시기로 구분됐다. 남편과 아이들 없이 나 혼자만의 첫 주, 남편 없이 아이들과 함께 하는 둘째 주, 그리고 온 가족이 함께하는 셋째, 네쨰주로 구성되었다. 여행일정을 짜기 시작할 때 나는 나 혼자만의 시간이 필요하다고 남편에게 얘기했다. 남편은 내 요구를 순순히 들어주더니 자기도 자기만의 시간을 갖고 싶다고 했다. 그렇게 해서 나와 남편은 각자 첫째 주, 둘째 주 한국, 미국에서 혼자만의 시간을 갖은 후 한국에서 다시 재회하기로 했다. 내가 엄마의 역할에서 벗어나 오롯이 나만을 위한 시간이 필요했던 것만큼 남편도 자기만의 시간이 필요했던 것이다. 같이 살면 살수록 느끼는 것이 부부란 동등한 파트너 관계라는 것이다. 좋은 관계유지를 위해서는 서로 간의 끊임없는 논의와 협상이 필요하다.
나는 결혼하고 엄마가 되면서 새로운 다른 역할들과 마주하게 됐다. 그전에는 내 앞가림만 잘하면 됐었는데, 이제는 아내라는 역할, 엄마라는 역할들도 함께 수행해야 했다. 그리고 이런 다른 역할들이 충돌해서 문제가 생길 수 있다는 것도 알게 됐다. 내 안에 있는 각각의 역할들을 이해하고 역할들 사이에서 균형 있게 중심을 잡기까지는 꽤 오랜 시간이 걸렸다. 이런 내 인생의 여정을 따라서 내 한국방문의 모습도 바뀌어 왔다.
시간을 거슬러 올라 8년 전에 나는 멋모르고 남편도 없이 8살 5살 개구쟁이 사내 녀석 둘을 데리고 친정에서 무려 2달이나 묵었었다. 회사를 오래 다녔었던 나는 겨우 2주 감질나게 한국을 방문하는 게 늘 못마땅했었다. 그래서 애들 육아를 위해 과감하게 사표를 던진 후 제일 먼저 저지른 일이 한국행 비행기표를 예약한 거였다. 더 이상 회사 눈치 볼 필요가 없으니 방문일정을 최대한으로 늘려 여름방학 첫날부터 마지막날까지로 잡았다. 나는 아주 단순하게 아이들이 부모님과 두 달 동안 살부대 끼면서 지내다 보면 가까워질 거라고, 그리고 두 달 동안 한국에서 지내면 한국말도 그냥 자동으로 늘 거라는 엄청난 착각을 했었다.
결과는 폭망이었다. 부모님과 아이들이 소통하기에 장벽들이 너무 많았다. 일단 말이 통하지 않으니 오해가 생기기 쉬었고, 한번 생긴 오해는 또 말이 안 통하니 풀기가 힘들었다. 거기에다 세대차이는 말할 것도 없고 너무나 다른 문화차이에서 오는 충돌들이 만만치 않았다. 첫날부터 자기주장이 강한 큰 애와 엄마가 부딪혔다. 그날 엄마는 큰 애한테 소리 지르는 사람으로, 고로 자기를 싫어하는 사람으로 분류됐다. 큰 애도 첫날부터 엄마한테 말 안 듣는 애로 찍혔다. 첫날 바로 나는 앞으로 두 달의 여정이 순탄치 않음을 예감했고, 그 예감은 틀리지 않았다. 모두에게 참 힘든 두 달이었다.
그때 나는 엄마라는 역할에 너무 몰두해서 딸의 역할에 소홀했다. 사랑은 내리사랑이라고 했던가? 혼자서 꾸중을 독차지하는 큰 애만 눈에 들어왔고, 큰 애만 책망하시는 엄마가 야속했다. 사실 엄마는 혼자서 개구진 두 녀석들 감당하느라 쩔쩔매는 내가 불쌍했던 것인데. 엄마의 자식인 나를 힘들게 하면 손주라도 다 소용없었던 건데. 내가 내 자식이 불쌍했던 것처럼 엄마도 엄마자식인 내가 불쌍했던 것이다. 그런데 그런 엄마의 마음을 한참 지나서야 이해하게 됐다. 친정을 두 달 동안이나 방문했지만, 정작 부모님과 시간을 함께 보내지 못했다. 그 힘들었던 방문은 내게 많은 것들을 가르쳐줬다. 엄마라는 역할과 딸이라는 역할이 충돌해서 문제가 생길 수 있다는 것, 그리고 딸로서 엄마로서 두 역할을 동시에 수행하기에는 내 능력이 부족하다는 사실도. 그 건 마치 내가 갓난아기를 회사로 데리고 가서 애도 보면서 일도 처리하려는 욕심과도 같은 것이었다. 엄마의 역할과 커리어우먼의 역할을 동시에 수행하려는 엄청난 멀티태스킹의 시도말이다. 그리고 앞으로 다시는 이렇게 감당 안 되는 멀티태스킹 상황을 만들지 말자라고 다짐했다.
시간이 흘러 코로나가 한창이던 3년 전 겨울에 나는 한국에 혼자 왔었다. 아버지의 팔순을 맞이해서, 나는 부모님 뵈러 혼자 가고 싶다고 남편에게 얘기했다. 일하면서 학교 다니는 두 아이를 챙기는 게 쉽지 않았을 텐데, 흔쾌히 다녀오라고 지지해 준 남편이 그때 너무 고마웠다. 그때는 아버지가 우선이었다. 딸로서 아내로서의 내 역할을 잠시 뒤로 미뤄야 했다. 짧은 2주의 방문이었지만, 나는 오롯이 부모님한테만 신경을 쓸 수 있었다. 결혼해서 엄마가 된 후 처음으로 부모님과 갖은 소중한 시간이었다. 그 당시 모든 이의 적이었던 코로나상황마저 우리 편이었다. 모든 한국 입국자에게 부여된 10일간 격리 의무를 지키며 꼼짝없이 부모님 댁에서 보내야 했기 때문이다. 내가 한국에 와도 다른 일들로 바빠서 얼굴 보기 힘들다고 불만이었던 우리 엄마는 드디어 24시간 10일 내내 내 얼굴만 볼 수 있었다. 격리가 끝나고 다시 시애틀로 돌아오기 전날 부모님을 모시고 경주로 당일치기여행도 다녀왔다. 무뚝뚝한 성격으로 생전 표현을 안 하시는 아버지가 내가 떠나는 날 ‘고맙다’라고 말씀하셨을 때 가슴이 뭉클했다. 미국에서 세 남자들도 내 걱정이 무색할 정도로 잘 지냈다. 내가 한 가지 역할에 집중하니 모두가 행복했던 방문이었다.
그때 그 경험을 바탕으로 나는 이번 방문도 확실히 구분시켰다. 첫 주는 딸로서 역할에 충실하기 위해서 혼자 먼저 도착해서 부모님 댁에 머물렸다. 부모님과 함께 시간을 많이 보냈다. 맛집에도 가고 카페에서 디저트도 같이 먹고, 쇼핑도 함께 했다. 나중에 아이들과 남편이 와서 바빠졌지만, 부모님은 서운해하시지 않으셨다. 그리고 아이들이 도착하고 숙소를 따로 잡아서 묵었다. 좁은 아파트에서 다 큰 사내 녀석들과 일주일이나 묵는 건 연로하신 부모님께 민폐라고 생각했다. 24시간 내내 같이 부대낄 필요 없이 각자의 공간에서 각자 편하게 쉴 수 있는 게 훨씬 좋았다. 대신 숙소를 친정과 가까운 데로 잡아서 서로 자주 왕래할 수 있었다.
사실 이번 한국방문을 제안한 건 큰 애였다. 8년 전 방문 때 다섯 살이었던 둘째는 한국에 대한 기억이 거의 없다. 더위를 식히며 즐겼던 죠스바와 매일 도장 찍었던 키즈카페에 대한 기억정도가 전부이다. 그에 비해 여덟 살이었던 큰 애는 많은 부분들을 기억한다. 원래 사교적이고 사람들을 좋아하는 성격인데 말이 안 통해서 사람들과 소통을 못해서 많이 힘들어했다. 그 부분 때문에 나는 부정적인 기억만 있을 거라고 짐작했었다. 그래서 큰 내 입에서 한국에 가고 싶다는 말이 나왔을 때 나는 많이 놀랬다. “전에 갔었을 때 힘들어하지 않았어?”라고 물었다. “아니, 재미있었는데. 우리가 자주 갔던 키즈카페도 다시 가고 싶고, 할머니댁옆에 개천에서 가서 물고기도 보고 싶고, 할머니 김치도 또 먹고 싶어”라고 의외로 구체적인 이유들을 댔다. 안 좋았던 기억들을 잊고, 다시 한국에 가고 싶다니 나는 너무 감사했다. “그렇지, 할머니김치는 정말 최고지? 네 말을 들으니 나도 얼른 할머니김치 먹고 싶다.”라고 답하고 나는 바로 한국방문 계획을 짜기 시작했다.
애들이 도착한 다음 날 우리는 친정에 들렀다. 엄마는 큰 애가 먹고 싶어 하는 김치를 만들기 위해서, 그 더운 날 몸도 안 좋은데 시장을 몇 군데나 다니셨다고 말씀하셨다. 폭염 때문에 배추구경을 할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엄마는 세 번째 시장에 가서야 배추를 찾아내셨고, 기어코 김치를 담그셨다. 반찬은 달랑 두 가지, 불고기와 갓 담근 할머니표 김치였다. 큰 애가 김치를 한입 넣더니, “음, 바로 이 맛이야! 너무 맛있어요”라고 말했다. 엄마의 얼굴에 미소가 활짝 번졌다. 그날 큰 애는 밥을 두 공기나 해치웠다. 친정집을 나서면서 큰 애가 저녁 맛있게 잘 먹었다고 엄마에게 포옹을 해줬다. 순간 8년 전 힘들었던 기억이 떠오르면서 눈물이 확 날 뻔했다. 내가 사랑하는 이 두 사람이 화해하고 있었다. 나는 속으로 기도했다. 그 옛날 할머니에 대해 섭섭했던 기억들이 오늘 먹은 이 맛있는 김치로 완전히 씻어내려 갔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