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리단길에서 길을 잃다

by 헬레나

이번 한국방문 일정을 짤 때 내가 꼭 고집한 곳이 있다. 바로 경주이다. 3년 전에 부모님을 모시고 다녀왔을 때 좋았던 기억도 있고, 남편과 아이들에게 우리의 유구한 역사를 자랑하고 싶은 욕심 때문이었다. 그리고 이번 방문 중에 일박이라도 한옥스테이를 하고 싶었는데, 그곳은 왠지 경주이어야만 할 것 같았다. 그리고 나는 운 좋게 황리단 길에 있는 200년 된 고택숙소를 찾아냈다. 그곳의 위치는 대릉원, 첨성대, 동궁과 월지 등 주요 유적지와 가까워서 차 없이 뚜벅이여행을 계획한 우리에게 적격이었다.


경주 시외버스터미널에 도착하니 폭염이 예사롭지 않았다. 바닷바람이 시원했던 부산에서 며칠 있다 와서 그런지 체감온도는 40도 훌쩍 넘았다. 경주가 가장 더운 도시들 중에 하나라는 걸, 나중에 택시기사님을 통해서 알게 됐다. 그런데 그렇게 무더운 이 작은 도시에 사람들은 또 왜 이리 많은지? 작은 도로들이 차들도 꽉 차서 주차장을 방불케 했다. ‘이상하다. 오늘은 금요일인데… 아뿔싸!’ 그제야 그날이 광복절임을 깨달았다. 오랜 기간 여행하다 보면 그날이 무슨 날인지 며칠인지 무의미해진다. 금요일이라 안심하고 계획을 짰는데 그날이 광복절인 걸 깜빡 놓친 것이다. 택시를 타고 숙소로 움직일 생각이었지만, 심상치 않은 도로상황을 보고 걸어가기로 했다. 카카오맵에 주소를 치니 예상시간은 15분. 뭐 그 정도야 갈만하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웬걸 황리단길에 들어서서 방향을 잃고 헤매기 시작했다. 제주 방문 때 운전 내비게이션으로 잘 썼던 카카오맵은 이상하게 경주에서는 영 제구실을 못했다. 이번에 처음 써본 앱이라 내가 미숙했던 건지. 25년 전에 유럽에서 핸드폰도 없이 여행가이드책 하나 달랑 들고 다녔을 때도 이렇게까지 헤맨 적은 없었다. ‘한국에서 길을 잃다니!’ 자괴감이 들었다. 내비게이션을 따라가다 보면 왔었던 곳으로 다시 오고 또 오고, 몇 번을 반복했다. 한여름의 뙤약볕이 머리 위를 따갑게 내려쬐었다. 넘쳐나는 인파들 사이에서 무거운 캐리어를 끌고 다니느라 온몸은 땀으로 범벅이 됐다. 나의 인내심은 한계점에 다다랐다. 내 뒤만 졸졸 쫓아오던 남편과 아들도 제대로 가는 거 맞냐고 짜증을 내기 시작했다.


다시 또 그 자리로 돌아와서 ‘이런 번잡한 거리에 고택이 있을 리가 없어’라며 자포자기할 즈음이었다. 갑자기 거무튀튀한 낡은 한옥대문이 내 눈앞에 딱하고 나타났다. 샛노란 경주 십원빵가게 바로 뒤에 쏙 들어가 숨어 있었다. 주의 깊게 살피지 않았다면 이번에도 또 놓칠 뻔했다. 우리 셋은 기쁨의 환호성을 질렀다. 묵직한 고택문을 열고 들어가니 깜깜하고 좁은 입구가 복도처럼 길게 안쪽으로 이어졌다. 마치 바깥세상과의 완전한 차단을 위한 관문 같았다. 몇 발자국 지나니 다시 환한 빛이 쏟아지며 꽃들이 만발한 정원이 정면에 펼쳐졌다. 그 정원을 중심으로 네 채의 한옥이 ㅁ자로 둘러싸여 있었다. 고택대문 하나를 넘었을 뿐인데, 나는 완전히 다른 세계로 순간이동을 한 것 같았다. 마치 해리포터에 나오는 킹스크로스역의 9와 3/4승강장, 마법의 관문을 통해서 호그와트에 와 있는 것 같았다. 세월에 닳고 닳아서 하얗게 바랜 툇마루에 앉으니, 방금 전까지의 스트레스가 확 날아갔다. 마당 한가운데를 가르는 빨랫줄에 걸린 알록달록 빨래들은 또 얼마나 정겨운지? 마당 한구석 수돗가옆에 옹기종기 모여있는 항아리들은 어릴 적에 자주 갔던 시골 외갓집을 연상시켰다. 그리고 신기하게 바깥의 소음이 전혀 들리지 않았다. 참 평화로웠다. 내가 지금 북새통 황리단길 한복판에 있다는 게 도무지 믿기지 않았다. 나는 도떼기시장 같은 바깥으로 다시 나가고 싶지 않아서 한참을 거기 툇마루에 앉아 있었다.


다음 날 나는 새벽에 일찍 일어나 혼자서 황리단길을 다시 나섰다. 어제 그 많던 사람들은 어디로 갔는지 거리는 텅 비어 있었다. 그제야 아기자기한 상점들이 눈에 들어왔다. 상점마다 각각의 색과 스타일을 뽐내고 있었지만 지붕은 하나같이 기와로 통일되어 있었다. 이곳에선 이탈리안 식당도 타이식당도 아무리 스타벅스라도 기와지붕을 피해 갈 수 없었다. 기와지붕은 경주의 자존심 같았다. 길을 걷다가 한 골목으로 접어들었다. 골목 안에는 한옥을 세련되게 리모델한 식당들과 카페들이 많았다. 현대식 개량한옥이 아름다운 연못과 정원을 품으니 정말 트렌디의 정점을 찍었다. 젊은이들에게 왜 인기가 많은지 그 이유를 알 것 같았다. 골목의 풍경에 취해 무언가에 홀린 듯 안쪽으로 더 들어갔다. 조금씩 사람 사는 집들이 보이기 시작했고 드디어 나는 개발의 손이 못 미친 오리지널 풍경과 만났다.


내 왼쪽으로는 곧 무너질 것 같이 위태로운 담장이 있었다. 더러운 잿빛 시멘트벽의 반은 페인트칠이 다 벗겨져서 빨간 벽돌담장이 속살을 드러내고 있었다. 그리고 오른쪽 담장벽화에는 유유히 나는 두 마리의 학과 장구 치는 여인이 그려져 있었다. 더럽고 낡은 건너편 담장은 잊어버리고 대신 내 아름다운 벽화를 감상하라는 주인의 메시지가 전해졌다. 정겨운 풍경은 안쪽을 더 이어졌다. 슬레이트지붕도 간간이 보였다. ‘와 경주에도 슬레이트지붕이?’ 보물이라도 찾은 냥 나는 인증사진을 찍어댔다. 그 집의 나지막한 담장에도 벽화가 그려져 있었다. 너무 오래돼서 곳곳에 페인트칠이 벗겨졌지만, 분명히 달과 별과 우주, 첨성대 그림이 거기 있었다. 그리고 ‘별빛길’이라는 제법 낭만적인 시까지 덧붙여있었다. 이 집주인은 시인일 것 같았다. 세월의 흔적이 고스란히 묻어 있는, 세련의 때가 아직 묻지 않은 골목 안의 이 풍경이 나는 더 좋았다.


도시의 모습도 시대의 변화에 맞춰서 변하는 게 당연하다. 황리단길은 원래 오랫동안 문화재보호구역 내 건축제한에 묵여서 낙후된 동네였다고 한다. 그런데 지역발전과 환경개선을 위해서 법이 개정되고 주민들이 협업하면서 성공적으로 개발되었다. 이번에 처음으로 황리단길을 걸으며 그곳만의 독특한 매력을 확실히 느낄 수 있었다. 단연코 첫째는 그 지역이 가진 본래의 모습이다. 1000년 동안 그곳을 지켜왔던 터줏대감들, 대왕릉, 첨성대, 동궁과 월지 등 그 유적지들이 없었다면, 새로운 카페와 식당, 소품가게들만으로 이만큼의 성공을 거둘 수 있었을까? 일단 다른 어떤 도시에서도 볼 수 없는 이 보물들 때문에 사람들이 찾는 것이다. 그런데 거기에 편리한 상업 인프라까지 보태졌으니 금상첨화가 따로 없다. 그곳은 유적지만 잠깐 구경하고 돌아갔을 관광객들에 다양한 편리시절을 제공함으로써 더 오래 머물고 싶은 곳이 되었다. 옛것과 새것이 절묘하게 균형을 이루며 공존하는 것 이게 바로 황리단길의 매력일 거다.


다음에도 나는 다시 경주에 오고 싶다. 그때는 이 고택에서 좀 더 오래 묵으며 정원에 앉아서 차를 마시고 싶다. 그때는 황리단길 안쪽의 다른 골목들과 다른 담장들을 더 만나고 싶다. 대릉원의 모든 왕릉들과 하나하나 인사를 나누고 싶고, 동궁과 월지까지 걸어가서 아름다운 야경을 보고 싶다. 그때까지 이곳이 그대로 잘 남아 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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