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을 하다 보면 집이 그리울 때가 있다. 보통 둘 중에 하나다. 내 편안한 침대가 그립거나 집밥이 먹고 싶어서다. 인생에서 먹는 게 최고의 낙인 내 남편은 어디를 여행하든 일주일이상은 머물고 싶어 하지 않는다. 그 이유는 음식 때문이다. 아무리 비싸고 맛있는 음식도 일주일 내내 사 먹다 보면 싫증이 나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런 그가 신기하게 한국에서 2주나 있었는데 외식에 싫증을 내지 않았다. 실증은커녕 마지막 끼니까지 진심으로 행복하게 즐겼다. 첫 끼니부터 마지막 끼니까지 자기를 실망시킨 적이 없다고 말했다. 특히 그의 첫 식사와 마지막 식사는 맛집을 검색해서 들어간 곳이 아니고, 그냥 우연히 들어간 곳이었는데도 완벽한 한 끼였다고 했다.
남편은 직장일 때문에 나와 애들보다 한참 늦게 한국에 도착했다. 우리는 남편을 픽업하러 인천공항으로 가는 날 코엑스몰에 잠깐 들렀다. 한국에서 쇼핑재미에 빠진 아이들은 기회만 되면 쇼핑몰에 가자고 졸라댔다. 2시간 정도 여유가 있어서 괜찮을 줄 알았다. 그런데 만나기로 한 별마당도서관에서 서로 못 찾고 헤매다가 시간이 많이 지체됐다. 공항철도를 타고 열심히 달렸지만 우리는 한 시간이나 늦었다. 내 남편은 2주 만의 상봉인데 재회의 포옹은커녕, 울그락불그락한 얼굴로 화를 냈다. 유순한 성격의 남편이 그렇게 화내는 건 정말 결혼 17년 동안 손에 꼽을 만하다. 장거리 비행기여행으로 피곤한 데다 말이 통하지 않는 타지에 혼자 떨어져서 잔뜩 겁을 먹은 모양이다. 어쨌든 나의 잘못이기에 변명도 못하고 쭈그러져서 숙소로 이동했다.
우리는 저녁때가 돼서야 숙소에 도착했고, 그곳은 마침 1층에 돼지갈빗집이 있는 주상복합건물이었다. 4층 숙소에 짐을 놓고 저녁을 먹으로 다시 내려왔다. 남편은 배가 고팠는지 그냥 1층 식당으로 가자고 했다. 그렇지만 남편의 한국에서 첫 식사인데 아무래도 후미진 골목의 이 식당은 못 미더웠다. 괜히 들어갔다가 맛없으면 남편은 더 저기압이 될 것이다. 나는 일단 주변을 걸으며 다른 식당들을 찾아보자고 제안했다. 큰 대로를 건너서 아파트단지 쪽으로 들어가 봤다. 치킨가게와 중식당이 나왔지만 남편은 내키지 않아 했다. 안쪽으로 더 들어가 봤지만 다른 식당들은 보이지 않았고, 결국 돌고 돌아 다시 원점으로 숙소 1층에 있는 갈빗집으로 왔다. 문을 열고 들어가니 식당 안은 술집처럼 깜깜했고 손님이 정말 하나도 없었다. 역시나하며 불안했지만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아직도 뾰로통해 있는 남편에게 뭐라도 빨리 먹여서 기분을 좋게 만들어야 했다. 주문한 돼지갈비가 나왔는데 고기색깔이 칙칙하니 불길한 예감이 두 배가 됐다. 고기를 불판 위로 옮겨 급한 마음에 뒤저뒤적 열심히 구웠다. 맥주로 일단 목을 축이던 남편이 더 이상 못 참겠다는 듯 고기 한 점을 입에 넣었다. 그 순간 나도 모르게 숨을 죽였다. 그렇지만 웬걸, 남편의 얼굴에 환한 미소가 번졌다. “바로 이 맛이야”라며 냉큼 고기 한 점을 더 집어 들었다. 나도 안도의 한숨을 쉬고 그제야 고기를 맛봤다. 달달한 육즙이 입안에 기분 좋게 감돌았다. 그날 먹은 돼지갈비는 남편의 긴 여독과 스트레스를 퇴치하는데 충분히 맛있었다. 정말 가고 싶지 않았던 후미진 뒷골목의 이런 식당까지도 맛있다니! 한국에서 돼지갈비는 언제나 옳아서일까?
우리 집 세 남자들은 이번에 제주에 꼭 가고 싶어 했다. 믿기 어렵겠지만, 그 이유는 단순히 오리지널 제주흑돼지를 먹고 싶어서이다. 시애틀에서 제일 인기 많은 관광지가 있다. 스페이스 니들도 아니고, 파이크 플레이스 야시장도 아닌 바로 스타벅스 1호 점이다. 특히 커피를 사랑하는 한국사람들에게 인기가 더 많은 것 같다. 단지 오리지널 스타벅스란 이유로 그 허름한 구멍가게는 평일에도 관광객들의 발길이 끊기질 않아서 한 시간 이상 줄을 서서 기다려야 한다. 삼겹살을 너무 사랑하는 우리 남자들도 똑같은 이유로 흑돼지 삼겹살의 본고장 제주에 가서 제대로 된 제주흑돼지를 먹고 싶었던 것이다.
원래 미국사람들은 지방이 많은 고기부위를 안 좋아한다. 마블링이 많은 소고기를 좋은 소고기로 치는 한국과 달리 미국에서는 지방기가 적은 부위가 인기가 많다. 삼겹살과 같은 부위로 만든 베이컨이 인기 있긴 한데, 아주 바싹 구워서 기름기를 완전히 빼고 먹는다. 내 남편도 그런 이유로 처음에는 삼겹살에 손도 안 댔었다. 그러던 어느 날 친구가 서울의 한 제주흑돼지식당으로 우리를 초대했다. 숯불에 잘 구위진 겉바속촉 흑돼지를 먹는 순간 그의 고기철학이 완전히 바뀌었다. 그때 먹은 흑돼지가 자기 인생 통틀어 먹은 온갖 고기 중에서 제일 맛있었다며 지금도 가끔 그날 이야기를 한다. 그 이후 내 남편은 미국에 돌아와서 흑돼지 대신 삼겹살을 먹기 시작했고, 지금도 우리 가족은 금요일마다 삼겹살파티를 즐긴다. 그런 흑돼지삼겹살 마니아인 남편에게 드디어 흑돼지의 본고장 제주에 갈 수 있는 기회가 온 것이다. 흑돼지를 한 번도 먹어보지 못한 우리 애들도 다른 어떤 제주도 관광지보다도 흑돼지 먹는 것에 잔뜩 기대를 걸고 있었다.
그런 이유로 우리는 제주 도착 첫날부터 삼일연속 저녁마다 흑돼지를 먹었다. 본고장에서 먹는 신선한 흑돼지는 우리의 기대를 저버리지 않았다. 문제는 흑돼지삼겹살 마니아 세 남자들이었다. 제주의 흑돼지란 흑돼지는 모두 먹어치울 량 매일 저녁마다 삼겹살을 외쳐댔다. 나는 사실 고기보다 해산물을 더 좋아한다. 그런 내게 매일 저녁 고기는 고역이었다. 더군다나 멀리 제주도까지 왔는데 신선한 해산물을 한 번도 못 먹는다는 게 말이 되는가? 나는 강력한 컴플레인으로 4일째에서야 옥돔회를 쟁취할 수 있었다. 미국에 돌아가면 다시 못 먹으니 여기 있는 동안 실컷 흑돼지를 먹고 가야 한다는 세 남자의 겁박에 결국 그날 먹은 회가 제주에서의 마지막 해산물만찬이었지만 말이다.
시애틀로 다시 떠나는 날 우리 비행기가 늦은 저녁시간이어서 친구가족과 공항 근처에서 함께 시간을 보냈다. 친구가 맛집을 열심히 검색해서 찾아간 곳이 하필 휴가로 문을 닫았다. 어쩔 수 없이 다시 검색해서 찾은 두 번째 식당에 도착했다. 그런데 도착해 보니, 맛집이라기보다는 그냥 허름한 동네 식당이었다. 내 친구는 우리에게 한국에서 먹는 마지막 식사를 제대로 대접하고 싶었나 보다. 그래서 허름한 그 식당외관이 영 맘에 안 들었는지, 바로 옆쪽에 상대적으로 깔끔해 보이는 커다란 중식당으로 가자고 권했다. 짜장면을 좋아하는 아이들은 당연히 좋다고 했다. 그런데 예상외로 남편이 반대표를 던졌다. 한국에서 먹는 마지막 식사인데 한식을 먹고 싶다는 것이다. 그의 말도 틀리지 않았다. 결국 애들이 양보해서 그 허름한 식당으로 들어갔다.
홀에 테이블이 네 개뿐인 아주 작은 식당이었고, 그중 한 테이블을 단골손님으로 보이는 사람들이 차지하고 있었다. 메뉴는 단촐하게 찌개류 4가지가 전부였다. 내가 메뉴를 설명하자 내 남편은 확실히 실망하는 눈치였다. 내 남편으로 말할 것 같으면, 국찌개류를 안 좋아하고, 해산물도 안 먹고, 야채와도 거리가 멀고, 끼니마다 고기를 꼭 먹어줘야 하는 사람이다. 자기가 고집해서 들어온 집이니 다시 나가자고 하기도 민망했는지, 자기는 밥생각이 별로 없다며 다른 사람들에게 주문을 맡겼다. 그래서 우리는 모두 7명이었는데, 간단히 5인분의 동태찌개와 김치찌개를 시켰다. 연세가 꽤 들어 보이시는 할머니가 혼자서 부엌과 홀을 분주히 오가며 장사를 하고 계셨다. 그래서 시간이 꽤 걸렸고, 드디어 보글보글 끓는 찌개가 상에 올라왔다. 내가 먼저 수저를 들고 맛을 봤는데, 엄마가 집에서 해주는 딱 그 김치찌개맛이었다. 배 안 고프다던 우리 애들도 한입 맛을 보더니 숟가락이 바빠지기 시작했다. 모두들 정신없이 맛있게 먹으니 남편도 궁금했는지 한번 맛보고 싶다고 수저를 들었다. 그런데 한입이 두입으로 그리고 세입, 그러더니 밥하나를 시켜서 제대로 먹기 시작했다. 배부르다던 내 남편과 아이들이 먹어대는 바람에 찌개냄비는 한 방울도 남김없이 깨끗하게 싹 비워졌다. 평상시 밥도 잘 안 먹는 남편이 그날은 밥 한 공기를 뚝딱 해치웠다. 내 친구도 그런 남편에게 놀라며, 맛집을 제대로 찾아서 다행이라고 웃었다.
정말 그날 그 할머니집 김치찌개가 얼마나 맛있었는지 남편이 김치찌개러버로 변했다. 얼마 전에도 남편의 요청으로 김치찌개를 해 먹었다. 그 할머니 김치찌개에는 못 미치겠지만 남편은 땀을 뻘뻘 흘리며 맛있게 먹었다. 초등학생 입맛인 우리 남편도 변화시키는 한국음식의 깊은 매력. 여행의 막바지에서 집밥이 그리웠던 남편에게 김치찌개만 한 메뉴가 또 있었을까?
한국에서 맛있는 건 물론이고 가격까지 착한 한국음식에 흠뻑 빠져서 돌아온 내 남편은 만족도가 얼마나 높았는지 은퇴하면 한국에서 1년 살자고 한다. 가까운 주변에 김치찌개집과 돼지갈빗집이 있는 그런 동네에서 더 이상 삼시세끼 밥차릴 걱정 없이 1년 사는 상상은 상상만으로도 나를 즐겁게 만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