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기, 스토리, 연출. 모든 것이 강렬한 올해의 발견.
지난 해 12월 개최된 서울독립영화제에서 처음 관람한 후 생각 이상으로 강렬한 스토리와 연기로 쉽게 헤어나올 수 없을 만큼 진한 여운을 안겨준 그 영화 <죄 많은 소녀>를 약 9개월 만에 다시 관람하였다. 당시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신선한 충격을 안겨주었지만 과연 이 영화를 다시 볼 수 있을까 싶었던 이 영화는, 두번째 관람을 마친 오늘도 꽤 오랫동안 이어질 것만 같은 후유증을 안겨주었다.
영화는 여고생 경민이 어느날 갑자기 실종되는 것으로 시작한다. 경민의 실종에 대한 단서를 파헤치던 형사는 친구들의 증언을 토대로 마지막까지 함께 있었던 동급생 영희를 사건의 가해자로 의심한다. 해명을 늘어놓을 수도, 해명을 들어주는 이도 없는 상황에서 영희는 그렇게 죄 많은 소녀가 되어간다.
영화는 자연스럽게 관객들이 경민은 대체 어떠한 이유로 죽음을 택한 것인지, 그리고 정말 영희가 경민을 죽게 만든 것인지 주목하게 만들며 이에 대한 답이 나오기를 기대하게 만든다. 그러나 중반부를 지나고 나면 결국 이 영화에서 중요한 것은 경민의 죽음만이 아님을 깨닫게 된다. 영화의 핵심은, 다시 말해 감독이 하고 싶었던 진짜 이야기는 누군가가 떠난 후 어떻게든 그 책임을 밝히고자 하는, 그리고 그 책임을 누군가에게로 떠넘기고자 하는 이들이 보여주는 서늘하고도 무서운 태도에 있다.
경민과 마지막까지 함께 있었다는 이유로, 그리고 그녀가 경민에게 던진 어떤 사소한 농담을 이유로 영희는 이미 모든 이들에게 사건의 가해자로 낙인찍혀버린다. 형사도, 선생도, 반 아이들도, 그리고 경민의 어머니도 이미 경민이 영희때문에 죽게 되었다고 의심 혹은 확신을 하고 있는 상황에서 영희는 그 어떤 것도 할 수 없다. 벗어나려 할수록 더욱 그녀를 옭아매는 세상에서 끝끝내 그녀는 모두를 깜짝 놀라게 할 만한 충격적인 선택을 한다.
그렇게 영희가 어떤 행동을 취하고 난 이후를 또다른 이야기의 시작이라고 할 수 있는데, 이때 그녀를 향한 주변인물들의 행동 변화는 소름이 끼칠 정도로 무섭게 다가온다. 직전까지 그들의 머릿속에서 이미 가해자가 되어버린 영희를 괴롭히던 이들이 갑자기 영희를 살갑게 대하고, 이 사건의 새로운 가해자를 찾아 응징하는 과정은 웬만한 공포 영화보다도 무시무시하다.
이러한 스토리가 특히나 무서운 것은 그것이 지금의 현실과 무척 닮아있기 때문이다. 사건의 진실보다 그저 비난할 대상이 필요한 것마냥 여론에 휘둘려 쉽게 누군가에게 비난의 화살을 퍼붓고 만약 밝혀진 사실이 이와 다를 시 마치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금세 고개를 돌려버리는, 온갖 모순과 부조리로 가득한 세상이 이 영화 속 그것과 크게 다를 바 없는 만큼 이 영화가 선사하는 여운이 더더욱 짙게 느껴지는지 모르겠다.
크게 두드러지는 한국 영화가 유난히 적은 올 한 해, 이 영화 <죄 많은 소녀>가 여전히 한국 영화계가 어둡지만은 않다는 것을 제대로 증명해줄 수 있을 것만 같아 더더욱 반갑게 다가오고 그렇기에 더더욱 애정을 쏟고 싶은 작품이 아닐까 싶다. 다시 봐도 무척이나 강렬했던, 그리고 여전히 많은 숙제를 안겨준 영화였다는 생각과 함께 만약 나에게 권한이 있다면 <버닝>의 전종서, <마녀>의 김다미라는 강력한 후보들 사이에서도 올해의 신인 여우상의 트로피는 단연 이 영화 속 전여빈 배우에게 안겨주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