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이 모이기 전에 짜증이 먼저 모인다.
올해 극장에서 만나는 첫번째 한국 영화가 된, 오늘의 관람작 <말모이>. 시사회 이후 평가를 봤을 때 왠지 기대보단 걱정이 앞섰던 이 영화는, 역시나 우려했던 대로 개인적인 취향과는 상당히 거리가 멀었던 작품이었다. 의의만 남을 뿐 진부하고 때때로 괴롭기까지 했던 135분이었달까..
일제 치하의 경성을 배경으로 하는 영화는, 아들의 학비를 마련하기 위해 소매치기까지 일삼던 판수가 우연히 조선말 사전을 완성하고자 하는 조선어학회 대표 정환을 만나는 것으로 시작한다. 가나다조차 읽지 못하던 판수는 돈을 벌기 위해 조선어학회에서 일하게 되고, 정환을 주축으로 한 회원들과 함께 사전을 완성하기 위해 노력하지만 갖은 압박과 견제 속에서 전국의 말을 모은다는 것은 영 어렵기만 하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영화는 연출 의도가 명백한 만큼 의의는 뚜렷하다. 온갖 고난과 핍박 속에서도 우리 말을 지키기 위해 노력한 이들이 있었음을 기억하게 하고, 이를 통해 우리 말이 얼마나 소중한 것인지를 깨닫게 하는 동시에 애국심까지 고취시키고자 하는 의의는 엔딩 크레딧에 삽입된 자막으로 충분히 느껴진다. 어쩌면 이 의의가 확실히 전달된다는 것만으로도 높은 점수를 줄 수 있을 것도 같지만, 아쉽게도 영화는 수많은 단점들로 인해 그 의의를 무색하게 만들고 만다.
영화에서 가장 두드러지는 단점은 전반적인 연출이 무척 올드하게 느껴진다는 것이다. 판수와 정환이 처음 만나게 되는 계기부터 고개를 갸우뚱하게 만드는 영화는 이후 판수가 조선어학회에서 일하게 되는 과정이나 이후 펼쳐지는 수많은 갈등들이 하나같이 굉장히 진부하게 다가온다. 특히 판수의 성격때문에 누군가가 그의 행동을 오해하는 것이 한 번도 아니고 두 번이나 반복되는 것은 끝끝내 고개를 가로짓게 만들 뿐이다.
스토리 이외에 요소들도 하나같이 촌스럽게만 느껴지는데, 특히 내내 이질적으로만 느껴지는 음악의 활용이나 영 어색하고 뜬금없게 느껴지는 촬영 구도는 영화의 올드함을 한층 더하고 만다. 배우들의 연기 또한 그들이 전작에서 보여준 캐릭터를 그대로 답습하는 것처럼 느껴지는데, 판수 역의 유해진 배우는 엄유나 감독이 각본을 집필한 <택시 운전사>의 캐릭터를 그대로 옮겨온 듯 하고 전작들과 비교했을 때 유난히 힘이 들어간 연기를 선보이는 윤계상, 김태훈 배우의 연기는 시종일관 어색하게만 다가온다.
무엇보다 영화는 결코 러닝타임이 135분씩이나 될 필요도, 이유도 없을 이야기를 억지로 끌고 가는 듯한 인상을 자아낸다. 불필요하게만 느껴지는 수많은 사족들은 영화의 산만함을 키울 뿐이며, 오로지 감동을 자아내기 위해 존재하는 후반부 몇몇 시퀀스들은 가뜩이나 힘겹게 느껴진 영화를 더더욱 괴롭게 만든다. 갈등을 조성하기 위해 펼쳐지는 상황들도 당황스럽게만 느껴지는데, 제아무리 자료의 양이 많다고 한들 국민총력연맹 책임자가 정환이 무슨 일을 계획하고 있는지 대략적으로 알고 있는 상황에서 굳이 정환이 운영하는 책방에서 사전을 만들고 결국 모든 자료를 뺏길 위기에 처하는 과정은 좀처럼 쉽게 이해가 되지 않는다.
물론, 다른 단점들을 다 제쳐두고 우리 말의 소중함을 일깨우고자 한 의의만 보자면 충분히 좋은 영화라고 평가할 수도 있다. 하지만, 반대로 그토록 뚜렷한 의의와 메시지를 이러한 연출로밖에 그려내지 못했다는 점에선 결코 좋은 점수를 줄 수 없을 듯하다. 그저 마찬가지로 일제강점기를 배경으로 한 영화들 중 <밀정>, <동주>, <박열>같은 작품들이 얼마나 잘 만든 영화였는지를 새삼 깨닫게 해줄 따름이며, 오직 <차이나타운> 이후 오랜만에 상업영화에서 인상적인 활약을 하는 조현철 배우를 만날 수 있었다는 것이 반갑게 느껴질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