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경의 왕>

낯섦과 기시감의 공존이 선사하는 독특한 재미.

by 뭅스타

19.03.09. @인디스페이스


재작년 서울독립영화제에서 상영했을 때부터 무척이나 보고 싶었던 그 영화 <국경의 왕>을 관람했다. 서울에서는 인디스페이스 단독 개봉인터라 주말 일찍부터 먼 길을 나와 관람한 이 영화는, 한 편의 영화를 봤다는 느낌보다 신비한 꿈을 꾸고 나온 듯한 느낌을 안겨줄 만큼 희한하면서도 오묘한 매력이 가득했다.

영화는 유진이 친구를 만나기 위해 폴란드에 도착하는 것으로 시작한다. 낯선 곳에서 이상한 우연을 연속해서 경험한 그녀는 이윽고 학교 선배 동철을 만나고 어딘가 친밀하면서도 어색해 보이는 둘의 대화는 그저 흩날리는 파편들의 연속처럼 느껴지면서도 희한하게 지속된다.

movie_imageDM4AVY6C.jpg


여기까지 봤을 때 '낯선 곳에서 유진과 동철이 만나 가까워지는 이야기인가보다' 라는 생각을 하게 되는데, 우크라이나를 배경으로 펼쳐지는 이후의 이야기는 앞선 스토리와 전혀 다르게 흘러간다. 원식을 만나기 위해 우크라이나로 온 동철은 위험한 사업에 가담하게 되고 결국 그것은 예상치 못한 사고를 낳으며 큰 위기를 맞이하게 된다.

이렇게 전혀 다른 분위기, 전혀 다른 장르로 펼쳐지는 두 이야기는 그 어떤 것도 닮아있지 않은 듯 하면서 미묘하게 연결되는 구석도 존재한다. 두 챕터에서 전혀 다른 성격, 직업으로 등장하는 인물이 있는가 하면 그와중에 인물들의 이름은 동일하기도 하다. 이렇게 영화의 구성이 꽤나 독특한 만큼 보다 보면 생각지 못한 혼란을 경험하기도 하는데, '국경의 왕을 찾아서' 라는 타이틀과 함께 펼쳐지는 세번째 챕터에서 이 혼란은 조금씩 특별한 깨달음과 재미를 안겨준다.

movie_imageIWZ51W3H.jpg


영화를 보고 있노라면 독특한 플롯 구성을 통해 인물들의 여정을 그렸다는 점에서 <군산 : 거위를 노래하다>를 떠올리게도 만들고, 전반적으로 인물들 간의 대화를 중심으로 펼쳐지는 전개 방식이나 중간중간 클래식 음악이 흘러나오는 연출 등은 자연스럽게 홍상수 감독의 영화들을 떠올릴 수밖에 없게 만들기도 한다. 그러나 중반부를 넘어서다보면 너무나 분명히 깨닫게 된다. 이 영화는 그 누구의 작품과도 닮아있지 않은, 오직 임정환 감독의 영화라는 것을.

영화는 펼쳐지는 스토리를 일일이 파악하려고 애쓰거나 숨겨진 상징을 찾아내고자 기를 쓸 필요 없이 우연이 반복되어 벌어지는 우스꽝스러운 상황이나 무엇이 현실이고 무엇이 허구인지 모를 신비로운 상황을 지켜보는 것만으로도 큰 재미를 선사한다. 그리고 결국 유진과 동철 모두 영화를 찍고 싶어한다는 점에서, 세번째 챕터에서 영화에 관한 애정과 진심이 물씬 묻어나는 대화가 깊이있게 펼쳐진다는 점에서 더더욱 조금은 서툴고 조악해보이는 이 영화는 사랑스러운 매력을 물씬 안겨준다.

movie_imageR1N6876D.jpg


한편, '왠지 잔잔한 분위기로만 흘러가지 않을까' 라는 예상과 달리 영화는 뜬금없는 유머 코드를 통해 시종일관 웃음을 자아낸다. 유진이 폴란드에서 만난 또다른 한국인에게 거리를 두고 싶어 자신을 일본인이라고 소개하는 초반부터 심상치 않더니 동철과 원식의 대화를 중심으로 펼쳐지는 두번째 챕터는 인물들 간의 아무 말 대잔치로 뜬금없는 폭소를 유발하기도 한다.

<초행>에서도 함께 좋은 연기를 보여준 두 배우 김새벽, 조현철은 이번 영화에서도 각각의 챕터마다 다양한 성격으로 변모하는 인물을 인상적으로 소화해내는데, 두 인물이 하나의 프레임 안에서 같이 대화를 나누는 장면은 영화의 전체 비중에서 그리 많지 않지만 그 몇몇의 시퀀스에서도 둘의 시너지는 제대로 빛을 발한다. 더불어 영화 내내 씬스틸러 역할을 톡톡히 해내는 정혁기, 박진수 배우의 활약 또한 그야말로 눈부시다.

movie_imageP255723Y.jpg


영화는 마치 처음 폴란드에 발을 디딘 유진의 모습처럼 어딘가 낯선 괴리감을 낳기도 하며 그와중에 예상치 못한 친근함이나 소소한 매력을 선사하기도 한다. 보는 내내 나도 낯선 곳으로 떠나고 싶다는 생각을 하게 만들기도, 같은 꿈을 가진 사람들과 모여 앉아 오손도손 이야기를 나누고 싶게 만들기도 하는 작품이라고 이야기할 수 있을 듯하며 다시 보면 분명 또다른 재미를 안겨줄 것이라는 강한 확신이 드는 만큼 아마 조만간 다시 인디스페이스를 찾게 될 것만 같다.

매거진의 이전글<나는 다른 언어로 꿈을 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