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변 호텔>

또 한 번의 자기 반성, 혹은 당황스러운 변명이자 합리화.

by 뭅스타

19.03.27. @CGV압구정


금주 개봉작 중 <어스>와 함께 가장 기대가 컸던 <강변 호텔>을 오늘의 두번째 영화로 관람하였다. 포스터와 스틸컷만으로도 최근 한껏 처연해진 홍상수 감독의 작품 세계를 또 한번 경험할 수 있을 것 같았던 이 영화는, 여전히 그의 색깔이 물씬 묻어있지만 최근 몇 년간 그가 작품에서 보여준 정서나 깊이에 비해서는 다소 아쉽게 느껴졌다. 논란 이후 작품 속에 그를 투영하고 변명 아닌 변명을 해오던 그의 영화들 중에서 가장 모호하게 다가온 느낌이랄까.


쌀쌀한 1월을 배경으로 하는 영화는 사장의 배려로 강변에 위치한 호텔에 무료로 묵고 있는 시인 영환을 비추며 시작한다. 이상하게 자꾸만 자신이 죽을 것 같단 느낌에 휩싸인 그는 두 아들 경수와 병수를 그곳으로 불러 오랜만에 대화를 나눈다. 한편, 연인과 헤어진 후 호텔에 온 상희는 그녀를 위로하러 온 연주와 함께 여유로운 시간을 보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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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상수 감독의 23번째 장편 영화이자 개인적으로는 16번째로 관람하는 그의 장편인 이 작품은, 그의 전작들과 상당히 닮아있으면서도 한편으로는 무척 다르게 느껴진다. 무엇보다 눈에 띄는 이 영화만의 특징은 아직 감독의 초기작을 챙겨보지 않은 상황에서 가장 가족을 전면에 배치한 작품이라는 점이다. 아버지와 두 아들이라는, 홍상수 감독의 전작들에서 쉽게 보지 못한 인물 관계는 그 자체로 색다른 재미를 안겨주는 동시에 그들이 나누는 현실적인 대화는 때때로 제법 유머러스하게 다가온다.

영화는 크게 영환을 중심으로 한 부자의 이야기와 상희를 중심으로 한 두 여자의 이야기가 교차하는 방식으로 진행된다. 호텔에서도, 식당에서도 한 공간에 놓인 이들은 같은 시간과 공간을 공유하면서도 철저히 독립된 위치에 놓여 있다. 영환이 두 여자에게 다가가 인사를 건네기도 하고, 상희와 연주가 세 부자가 나누는 대화를 엿들으며 이와 관련된 얘기를 나누기도 하지만 철저히 분리되어 있는 그들의 상황은 마치 전작 <풀잎들>과 같이 미묘한 분위기를 자아내며 독특한 재미를 자아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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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반적으로 영화에는 <풀잎들>과 <밤의 해변에서 혼자>의 정서가 절묘하게 섞여있는 듯하다. 죽음을 감지한 영환이 두 아들과 나누는 대화를 통해, 그리고 결정적인 마지막 장면을 통해 죽음이라는 것에 한 걸음 더 다가간 듯한 영화의 분위기는 이를 전면이 배치한 전작 <풀잎들>의 정서를 더욱 확장시킨 듯한 인상을 자아낸다. 눈이 푹신하게 쌓여 절로 깨끗한 느낌을 안겨주는 영상미와 대비를 이루는 이러한 정서는 흑백의 화면 속에서 오묘한 인장을 새긴다.

한편 어떤 스캔들이 터진 이후 선보인 그의 첫 영화인 2017년작 <밤의 해변에서 혼자>는 유부남 감독과의 관계를 정리하려고 애쓰는 영희라는 인물을 김민희 배우가 연기함으로써 일종의 변명이자 합리화처럼 느껴지는 지점이 존재했는데, 이 영화 <강변 호텔> 속 이야기는 그 영화 속 영희의 또다른 이야기를 보는 것처럼 무척 닮아있다. 상희는 유부남과의 관계가 끝난 후에도 아직 그를 잊지 못해 괴로워하고 영환은 아내 이후 만난 새로운 사랑과의 관계에서도 실패했다는 점에서 이 이야기는 자연스레 영화 너머의 또다른 이야기를 떠올리게 만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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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로 이 부분이 이 영화가 홍상수 감독이 최근에 내놓은 작품들에 비해 모호하게 느껴지는 지점인데, 이전보다 더욱 삶을 초연한 듯 보이는 인물들의 대사는 영화와 쉽사리 분리할 수 있는 그들의 현실이 오버랩되며 이상한 이질감을 자아낸다. 제아무리 이 영화를 그저 하나의 픽션으로 바라보려고 해도 도저히 그럴 수 없는 상황 상황들 속에서 인물들이 내뱉는 대사는 그 어느 때보다 뻔뻔하고 혼란스럽게 느껴진다.

그럼에도 어쨌든 홍상수는 홍상수다. 비록 인물들이 처한 상황 자체가 선사하는 당혹감은 존재하지만 여전히 상영관을 나선 뒤 곱씹을수록 더욱 매력적으로 느껴지고 더욱 정을 주게 되는 그만의 독특한 색깔은 이번에도 여전히 선명하게 자리잡는다. <밤의 해변에서 혼자>를 기점으로 이 영화까지 그가 선보인 최근 다섯 작품 속에 깊게 스며들어있는 쓸쓸함과 처연함의 정서를 그가 앞으로 또 어떤 방식, 어떤 이야기로 풀어낼지는 충분히 기대하게 만드는 작품이었달까. 다만 이제 노골적인 자기 변명이자 자기 합리화는 조금만 줄여주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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