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애니메이션의 미래는 어쩌면 아직 밝을지도.
유아사 마사아키 감독의 신작 <밤은 짧아 걸어 아가씨야>를 관람하였다. 지난해 부산국제영화제에서 상영했을 때부터 감독의 전작 <새벽을 알리는 루의 노래>보다 더욱 평이 좋았던 만큼 일찍부터 기대치가 높았던 이 영화는 한마디로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정말 훨씬 더 내 취향을 제대로 저격해준 작품이었다고 말할 수 있겠다. 그림체며 스토리며 주제며 하나같이 너무나도 맘에 들어 빨리 끝나지 않기를 바랐던 영화였다고 할까.
영화는 적극적이고 낙천적인 검은 머리 아가씨와 그녀를 남몰래 좋아하는 선배가 겪는 하룻밤의 일들을 그리고 있다. 폰토초 거리 이곳저곳에서 술을 마시며 겪는 일들부터 헌 책 시장 거리에서 겪는 기이한 일들, 대학 축제에서 겪는 알콩달콩한 일들, 그리고 마을 사람들 모두가 감기에 걸린 날의 일들까지. 마치 봄, 여름, 가을, 겨울 사계절을 거치며 겪을 일들을 마법 같은 하룻밤 동안 겪은 이들의 이야기가 러닝타임을 꽉꽉 채운 에피소드들로 영화 내내 흥미진진하게 펼쳐진다.
간단히 말해 이 영화는 유아사 마사아키 감독 특유의 스타일이 제대로 빛을 발하는 작품이라고 말할 수 있겠다. 정해진 틀이나 규격에 얽매이지 않고 하고 싶은 대로 자유분방하게 자신의 스타일을 밀어붙이는 감독의 뚝심이 무척이나 두드러지고, 바로 그 뚝심이 이 영화만의 개성을 극대화해주는 느낌이랄까. <새벽을 알리는 루의 노래>에서도 그러했듯 영화는 전개 과정에서 수시로 그림체가 변화하며 술을 마시거나 음식을 먹을 때의 인물의 형태가 조금은 기하학적으로 표현되기도 한다. 이러한 그림체는 정형화된 스타일의 애니메이션에 익숙해져 있는, 혹은 당연히 그러한 정형화된 스타일이 구축이 되어야 한다고 믿는 관객들에게 마냥 이질적으로 다가올 수 있음에도 불구 이 영화의 그 독특하디 독특한 스타일은 희한할 정도로 매력적으로 다가온다.
가장 돋보이는 것이 다양한 그림체가 주는 신선함이라면, 영화의 그다음 장점으로는 너무나도 개성이 뚜렷한 캐릭터들의 향연을 꼽을 수 있다. 영화는 극 중에 특별한 이름이 존재하지 않는 두 남녀 주인공부터 학교 축제 사무국장, 빤스 총대장, 헌책 시장의 신 등 그 별칭만으로도 심상치 않아 보이는 각각의 캐릭터들 저마다가 톡톡 튀는 매력으로 가득 채워져 있다. '검은 머리 아가씨'라고 불리는 여성 주인공은 주체적이고 활달한 성격으로 극의 활력을 더하며, 그에 비해 조금은 찌질하고 소심한 선배 캐릭터 역시 끝끝내 검은 머리 아가씨를 향한 그의 짝사랑을 응원하게 만드는 희한한 매력으로 관객의 마음을 사로잡는다.
위 장점들만으로도 충분히 인상적인 영화는 여기에 더해진 확실한 메시지로 더더욱 장점을 극대화한다. 영화는 결국 무척이나 길었던 두 청춘의 하룻밤을 통해 소소한 일상 속에서 얼마나 다양하고 재미난 추억을 쌓을 수 있는지, 그렇기에 하루하루를 알차게 보내는 것이 얼마나 가치 있는지를 보여주고자 한 듯 보인다. 초반에 등장하는 노년들의 시계 초침이 대학생 주인공의 그것에 비해 무척이나 빨리 흘러가고, 그렇게 빨리 흘러가는 초침을 보며 노년들이 아쉬워하는 모습은 이렇게 조금이나마 더 많은 경험, 다양한 추억을 쌓을 수 있을 때 의미 있는 삶을 살아가야 나중에 후회하지 않는다는 감독의 신념을 단적으로 보여주며, 절대 끝나지 않을 것처럼 길고 긴 하루를 보낸 아가씨에게 한 인물이 영화의 제목과도 같은 '밤은 짧아, 걸어 아가씨야.'라는 대사를 하는 장면은 그런 의미에서 더욱 의미심장하게 느껴지기도 한다.
분명 조금은 이질적으로 느껴질 수 있는 그림체나 적잖은 비중으로 등장하는 변태 캐릭터 때문에 어느 정도 호불호가 갈릴 영화라는 생각이 들기도 하나 최소한 나에게만큼은 미야자키 하야오, 호소다 마모루, 신카이 마코토의 뒤를 이을 일본 애니메이션 감독은 단연 유아사 마사아키라고 확신할 수 있을 정도로 매력 넘치는 작품이었다고 할 수 있겠다. 독특한 그림체, 개성만점 캐릭터들의 향연, 하루하루를 알차게 살아가라는 주제, 여기에 웃음을 자아내는 코믹 요소부터 사랑스러운 로맨틱 코미디로써의 마지막까지. 그 모든 것이 마음에 쏙 들었던 종합 선물 세트 같은 영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