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심하고 찝찝한데, 희한하게 여운이 남네.
이진욱, 고현정 주연의 <호랑이보다 무서운 겨울손님>을 관람하였다. 두 배우의 만남과 시선을 끄는 제목 때문에 부산국제영화제 때부터 관심이 갔던 이 작품은 기대했던 바를 충족시켜주지는 못한, 조금은 무난하고 조금은 심드렁하게 느껴지는 영화였다고 할 수 있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딘가 경유의 마지막 얼굴이 계속 생각나는 이유는 뭘까.
영화는 여자 친구 현지의 집에 얹혀살고 있는 경유의 지극히 평범해 보이는 어느 날 아침에서 시작된다. 부모님이 올라오게 되어 며칠간 다른 곳에 있어야 할 것 같단 현지의 말에 캐리어를 끌고 집을 나온 경유는 대리기사 일을 하며 간간히 살아가는 처지이다. 여느 날과 마찬가지로 대리기사 호출을 받고 나간 그날 밤, 경유는 한때 연인 사이었던 유정과 만나게 된다.
중반까지 영화의 실질적인 주인공이라고 할 수 있을 경유의 행동은 그야말로 한없이 답답하기만 하다. 현지가 자신을 떠났음을 알게 되었을 때에도, 며칠간 신세를 지겠다며 찾아간 친구 부정과 대화를 할 때에도, 옛 연인 유정과 재회를 할 때에도 경유는 그의 마음을 제대로 터놓지 못한 채 혼자 외롭게 고독과 맞선다. 한때 소설을 써 내려갔던 그가 왜 소설을 그만두게 되었는지에 대해서도 제대로 언급되지 않는 상황에서 온전히 그의 대사와 행동을 통해 그의 심리를 파헤쳐내야 하는 관객의 입장에선 그야말로 답답한 노릇이다.
그런 그의 심리를 어느 정도 이해할 수 있게 해주는 매개체는 엉뚱하게도 영화의 제목에도 등장하는 '호랑이'다. 결국 영화에서 경유가 호랑이보다 무서워하는 겨울 손님은 없다는 점에서 어쩌면 제목에 등장하는 '겨울 손님'은 어떠한 이유로든 잠시 내려놓아야 했던, 소설가로 성공하고자 한 경유의 꿈인지도 모르겠다. 다시 말해 경유가 호랑이보다 무서워한 것은, 다시 소설을 써 내려가며 그로 인해 괴로워하고 힘들어하는 것으로 보이며 그래서인지 그가 유난히 시린 겨울을 보낸 후 써 내려간 몇 줄은 그렇기에 더욱 의미 있게 느껴진다.
류현경 배우를 시작으로 서현우, 남연우, 이상희, 서영화, 김예은 배우까지 반가운 얼굴들이 크고 작은 비중으로 출연해 영화를 보는 즐거움을 더해주는 상황에서 유정 역을 그녀만이 할 수 있을법한 스타일로 소화해낸 고현정 배우의 연기는 무척 두드러진다. 그러나 결국 경유의 발자취를 따라 스토리가 진행된다는 점에서 경유를 연기한 이진욱 배우의 힘으로 움직이는 영화라고 할 수 있을 듯한데, 그런 점에서 경유 성격 상의 답답함을 제대로 소화한 이진욱 배우의 연기 역시 제법 인상적으로 다가온다.
그럼에도 이 영화가 다소 무난하게 다가온 이유는 결국 영화를 통해 전하고자 했던 감독의 의도가 다소 불분명한 데다가 전작들에 이어 홍상수 감독의 영화 속 주제나 분위기와 '여전히' 상당 부분이 흡사하게 느껴지기 때문이리라. 더불어 결국은 후반 몇 분을 제외하면 꿈을 포기했지만 그렇다고 현실에 치열하지도 않아 보이는 경유보다, 소설을 쓰고 싶지만 번번이 실패하는 유정이나 재혼은 성공할 것이라고 믿는 친구 부정, 그리고 인적 드문 어딘가에서 자살을 결심했던 손님의 에피소드가 더욱 궁금하기만 한 것도 일종의 주객전도처럼 다가온다.
그래서인지 107분이라는 썩 길지 않은 러닝타임에도 불구 때때로 두 시간이 훌쩍 넘은 것처럼 길고 따분하게 느껴지기도 한다. 그러면서도 잠시 하고 싶은 일을 내려놓고 급한 대로 직장을 다니며 살아가는 나에게 '다시 열심히 시나리오를 써내려 가라'는 일종의 자극을 던져준 것처럼 느껴져 엔딩만큼은 어딘가 짧지 않은 여운을 자아내기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