앞으로 두고두고 곱씹어볼 만한 문제작.
칸영화제 상영과 국내 개봉 이후 현지와 국내에서 모두 굉장히 높은 평가를 받고 있는 화제작 <버닝>을 관람하였다. 칸영화제 경쟁부문에 초청되었다는 사실, 그리고 잇따른 배우들의 논란과 무관하게 나에게만큼은 그저 이창동 감독의 신작이라는 이유 하나만으로도 기대할 수밖에 없던 이 영화는 극장을 나서 집으로 온 지금도, 그리고 아마 내일도, 모레도, 앞으로 이 영화가 불현듯 떠오를 그 언제에도 계속해서 곱씹어보고 또 곱씹어볼 만한 작품이었다고 말할 수 있겠다. 이창동 감독의 작품들 중에서 가장 뛰어난 영화라고 생각하진 않지만 그럼에도 이창동이라는 감독에게 갖고 있는 신뢰를 높여주기엔 손색없던 영화였다고 할까.
영화는 왠지 음침하고 사연 많아 보이는 청년 종수가 등장하며 시작한다. 우연히 일하는 도중 어린 시절 고향 파주에서 함께 자란 해미를 만나게 된 종수는, 그 누구에게도 의지할 곳 없던 상황에서 그에게 다가와 준 해미에게 자연스럽게 이성의 감정을 느낀다. 잠시 아프리카로 떠난 해미를 기다리면서도 그녀를 향한 사랑과 그리움을 키워가던 그는 해미의 귀국길을 반가운 마음으로 마중 나가지만 그곳에는 해미가 우연히 만난 또 다른 남자 벤이 있다. 이때부터 벤을 향한 질투와 불안, 그리고 해미를 향한 사랑 사이에서 갈등하고 괴로워하는 종수의 이야기가 본격적으로 펼쳐진다.
한마디로 말하자면, 영화는 그 어떤 의미에서든 무척이나 모호하다. 2년 전 이맘때 개봉해 각종 커뮤니티에 해석 글이 떠돌 정도로 화제가 되었던 나홍진 감독의 <곡성>보다도 더욱더. 영화가 모호하게, 심지어는 난해하게까지 느껴지는 이유는 영화가 148분의 러닝타임 동안 관객들에게 수많은 의문을 갖게 만들면서 결국 그 어느 하나 통쾌하게 답을 내리지 않은 채 끝나버리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어쩌면 그저 불친절하고 불쾌한 작품으로 느껴질 수도 있으며, 실제로 그렇게 느낀 관객들 역시 적지 않아 보인다. 그럼에도 이 모호하기 짝이 없는 영화는 무척 강렬하게 뇌리에 박힌다. 아마 그 이유는 결국 영화가 관객들에게 던진 질문들 자체가 애초에 명쾌한 답을 내릴 필요가 없기 때문인지 모르겠다.
영화의 스토리는 철저히 종수를 중심으로 흘러간다. 관객들이 자연스럽게 그에게 감정적으로 이입될 수밖에 없는 위치에 놓인 인물 종수는 무척이나 연약하고 안타까운 처지에 놓여있다. 어머니는 어린 시절 집을 나가고 누나는 결혼해서 가정을 차린 지금, 유일하게 남은 아버지 역시 한창 폭행 사건의 가해자로 재판을 받고 있다. 북한에서 흘러나오는 대남방송을 제외하면 무척 한가롭고 고요한 파주의 집에서 홀로 살아가야 하는 종수는 그렇기 때문에 너무나도 쉽게 해미에게 마음을 준다. 그런 상황에서 해미의 앞에 나타난 남자 벤은 그 어떤 면에서도 종수와의 위치에서 우위를 차지하는 인물이다. 금전적인 여유도, 함께 어울릴 친구들도, 웃고 떠들 수 있는 화목한 가정도 갖춘 벤이 자신이 사랑하는 여자 해미마저 빼앗아갈 상황에 놓이자 종수는 질투와 열등감에 사로잡히게 된다.
그렇기에 중반부 이후 펼쳐지는 영화의 주요 사건은 그것이 실제로 벌어진 사건인지, 혹은 종수의 열등감에서 비롯된 허상인지 가늠하기 어렵다. 해미가 팬터마임을 배웠다는 설정부터 종수의 앞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 고양이, 사람들마다 다른 기억을 갖고 있는 우물의 존재 등 영화가 내내 실제와 허구의 경계에서 혼란에 빠뜨리게 하는 만큼 더더욱 종수가 생각하는 '그것' 역시 전개가 진행될수록 점점 더 명확해지기도 하며 반대로 점점 더 불명확해지기도 한다. 결국 중요한 것은 종수가 추측하는 것의 옳고 그름이 아니라, 그의 추측의 하나의 조각으로 맞춰진 후 그가 벌인 어떤 행동을 통해 한걸음 나아갈 수 있었다는 것이다. 여기서의 그 행동이 정당한 것인지에 대한 여부를 잠시 미뤄두자면 아무리 치열하게 발버둥 쳐도 외롭기만 한 현실, 그리고 자신의 현실과 너무나도 다른 제3자를 보며 느끼는 질투, 혹은 분노가 끝끝내 표출되고 마는 종수의 여정은 그렇기에 어떤 면에서는 가슴 아픈 청춘의 성장 영화처럼 보이기도 한다.
그리고 이 한없이 모호한 듯하면서 한없이 안타깝고 쓰라리기까지 한 영화는 대표적인 영화감독 홍경표, 그리고 대표적인 음악감독 모그의 훌륭한 작업과 어우러져 더욱 인상적으로 다가온다. 배우들의 호연 역시 영화의 몰입도를 높여주는 주요 요인인데, 사실상 극을 홀로 이끌어가는 만큼 그 누구보다 중요한 캐릭터인 종수를 연기한 유아인 배우는 마냥 새롭지는 않을지라도 청춘의 이미지를 그만의 개성으로 훌륭히 표현해낸다. 미스터리한 두 인물 벤과 해미는 각각, 이전까지 작품들에서와는 전혀 다른 서늘한 얼굴을 유감없이 보여준 연상엽(스티븐 연)과 앞으로의 활약을 더더욱 기대하게 만드는 신예 전종서의 매력적인 연기와 어우러져 한층 더 비밀스럽게 다가온다.
이창동 감독의 다른 작품들과 마찬가지로 이 작품 역시 '영화를 봤다'는 생각을 넘어 '한 편의 문학을 읽었다'는 생각을 갖게 만든다. 그만큼 많은 은유와 복잡한 장치를 담아낸 이 영화는 바로 그런 이유 때문이라도 한동안 쉽게 헤어 나오기 힘들 것만 같다. 데뷔작 <초록물고기>를 제외한 감독의 이전작들을 모두 관람한 상황에서 앞서 말했듯 개인적으로는 <오아시스>, <밀양>, <시> 등 감독의 전작들보다 더욱 높은 점수를 주기 어려운 것은 사실이나 이창동이란 감독의 영화 세계가 한 발짝 더 나아갈 수 있는 계기가 된 작품임은 분명해 보인다.